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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48화 (548/1,064)

548화

“오셨어요.”

“음. 몸이 좋지 않다 들었는데, 괜찮소?”

“감기 기운이 조금 있었을 뿐입니다. 많이 좋아졌어요.”

몇 개월 만에 만난 벨리사의 안색은 상당히 초췌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의사는?”

“진찰을 받았고, 약도 처방 받았어요.”

“그렇군. 바람이 차니 들어가 쉬시오.”

군터는 벨리사를 들여보낸 후, 따로 야스메티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장군. 바크렌의 반란군을 지원했던 자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만…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실망스럽군.”

“송구합니다. 사실 꼬리를 잡을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꼬리를 잡기 직전, 은근한 경고가 있었습니다.”

“경고?”

“예. 직접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묘하게 정보를 흘리더군요. 더 깊게 파고 들었다가는 다칠 거라는 경고였습니다.”

“읽혔다는 건가.”

“읽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손아귀 안에서 놀아난 꼴입니다. 관은 물론이고, 민간까지도 저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추측컨대, 이번 일은 다수의 권력자들이 손을 잡고 벌인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권력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모두 연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로 완벽하게 정보를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변명처럼 들리지만, 군터는 야스메티의 말이 마냥 변명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유게르 티브리악으로부터 얼핏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견제하는 자‘들’이 이번 일에 관여되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것이야말로 권력자들의 생리일지도 모른다. 상처 하나만 났다 하면, 피 냄새만 났다 하면 사방에서 승냥이들처럼 이빨을 들이미는.

“경고가 경고로 끝난 것은, 저들이 장군을 적대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군터는 그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쪽의 호의도 바랄 수 없지만, 동시에 어느 쪽의 적의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까지의 이야기일 뿐.

“티브리악과 손을 잡기로 하신 것은 아니지만, 바깥에서 어찌 볼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렇겠지.”

“유게르 티브리악도 그것을 의도한 것이겠지요. 그는 장군께서 그의 적들에게 밉보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겁니다.”

“알고 있다.”

“결정하신 겁니까?”

“간단하게 생각해라. 아군이 반란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난 원군 요청에 응했지.”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응하기는 하되, 생색으로만 그칠 수도 있었던 것을 전력으로 도왔다. 어떤 이들은 그것에 대해 의심하리라.

허나 그게 어쨌다는 건가.

“거래를 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그런 녀석들까지 신경 써야 하겠느냐.”

“우문이었군요.”

“무뎌진 것 같구나. 너를 테리브란에 남긴 것이 내 실수였더냐?”

니클라스로부터 야스메티가 근래에 술과 계집을 지나치게 탐닉한다고 전해 들었다. 군터는 야스메티가 얼마나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송구합니다.”

야스메티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한 번이라서 실수라고 했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켜보겠다.”

“증명하겠습니다.”

야스메티의 눈에 독기가 돌았다.

* * *

“소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야스메티 공이 특별히 안일하게 대처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단지 상대의 세력이 너무 거대하고, 그 눈길과 손이 안 뻗치는 곳이 없었기에 역부족이라는 느낌이었지요.”

니클라스가 담담히 말했다.

“그런 것치고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꽤나 신랄하던데.”

“술과 여자에 파묻히다시피 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런 와중에도 할 일은 똑바로 했다는 뜻이다. 과연 야스메티라고 해야 할까.

“알고 계시겠지만, 그간 야스메티 공은 귀족 가문들과의 연을 만드는 데 주력했습니다. 너무 깊게 발을 들이지 않는 선에서 교분을 다지고, 그들의 호의를 사려 노력했지요. 그렇게 해서 나름의 성과도 거뒀습니다만…이번의 일에서는 조금도 그 덕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번 일에 손을 쓴 자들이 거물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변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니클라스는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든 변명을 입에 담을 사내는 아니었다.

“카엘과 수인병들은 어떠하던가.”

베이고르에서 바르바피들을 따라 만든 수인병들. 그들은 일찍이 군터의 수하로 들어왔다가 코누다이안이 미겔에게 넘어갈 때 포로로 사로잡혔었다. 그런 그들을 토어릭이 구해온 후, 그들은 한동안 상한 몸을 치유하는데 집중했었다.

본래 군터는 그들을 파헨델로 데려가 친위대처럼 독립적으로 편성해 쓰려고 했다. 처음 그들을 부렸던 전쟁에서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니클라스가 그들을 자신에게 달라 요청했다. 그는 수인병들이 일반 병사로 부리는 것보다 음지에서 활약하는 데 더 적합할 것이라 주장했다.

“큰 도움이 됩니다. 기본적인 신체능력도 그렇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들 특유의 감은…….”

음지의 일을 하다 보면 온갖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성적인 판단보다 순간의 감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때. 그럴 때 그들의 특별한 감각은 그 어떤 지혜보다도 큰 역할을 한다.

“정보원으로도 호위로도, 써본 적은 없지만 암살자로도 제격일 것입니다.”

“능력은 그렇다 쳐도, 그 성미는?”

수인병들은 이따금씩 과하게 흥분하곤 했다. 카엘은 그것을 부작용이라고 표현했다. 자신들이 실패작인 증거 중 하나라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전투가 수시로 벌어지는 전장에서야 난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이끌면 그럭저럭 써먹을 수 있다지만, 침착함을 유지해야 하는 분야에서는 그런 성미는 치명적이다.

“카엘이 수인병들을 잘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일전에 말씀드렸던 안정제가 생각보다 효과가 좋더군요.”

말이 안정제지, 엄밀히 말하면 독이다. 마약과 비슷한 종류로, 한 모금만 마셔도 들끓는 감정을 순식간에 가라앉힐 수 있다. 수인병들은 자신들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기에, 그럴 때마다 휴대하고 있는 안정제를 마심으로써 평정심을 유지한다.

니클라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야스메티가 고안하고 모페이브가 제작한 안정제는 기대했던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는 듯했다.

“이미 나름대로 일거리를 맡기고는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들은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특히 카엘은 장군께서 이번에 전장에 다녀오신 일로 몸이 상당히 달아 있습니다.”

호위를 제외하고, 음지의 일이라는 것은 대개 이권과 관련한 암투다. 그러나 군터가 관련된 이권은 고작해야 파헨델에 납품하는 군상들과 관련한 것 정도라, 암투를 벌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때문에 현재 그들이 하는 일은 정보를 캐는 것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도 아니다. 이번에 야스메티가 주도했던 바크렌 전쟁의 배신자들을 좇는 일은 큰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끝을 보지 못한 채 도중에 발을 뺐기에 힘이 빠지는 감이 있었고.

본래 전장에서 활약했던 카엘과 수인병들이기에, 현재 그들이 맡고 있는 일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 주어라.”

“으음. 개인적으로는 아깝습니다. 그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곳은 전장이 아니라 이쪽이라고 봅니다만.”

“맡길 일이 없어 억지로 일을 만들어 부리고 있지 않느냐. 녀석들 모두가 군인으로서 살아가길 원하는 것은 아닐 테니, 원하는 녀석들은 남겨서 쓰면 되겠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군터는 그 뒤로도 니클라스에게 몇 가지를 더 보고받은 뒤 마지막으로 모페이브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고생 많았다.”

“별 말씀을. 제가 한 일은 없습니다. 있는 재료를 그냥 가져다 썼을 뿐이지요.”

“굳이 그리 깎아내릴 필요 없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지 않았는가.”

“사실만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런저런 방도를 다 찾아보았지만, 결국에는 그저 요정의 팔을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모페이브는 진정으로 자신이 한 일이 그리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호닝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좋군.”

자신을 깎아내리면서도 모페이브의 얼굴은 밝았다.

“하하. 간만에 술사로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군터의 무조건적인 지원 아래 호닝거와 함께 살라스의 팔을 회복시킬 방법을 연구하며 온갖 귀한 재료들을 다 써서 원 없이 연구할 수 있었다. 꽤나 고되고, 때때로 암초에 부딪칠 때는 약간의 회의마저 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런 모든 과정들이 즐거움이었다.

“그래. 큰 공을 세웠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바라는 것이 있는가?”

“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자네가 크지 않다 생각해도 난 크다 생각하니 나는 상을 내리겠다. 거절하지 말게.”

“저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장군의 덕으로 안락한 삶을 살고 있고,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리고 있습니다.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

“다만, 한 가지 청이 있다면…….”

“기탄 없이 말하게.”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비단 이번만이 아닙니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잔병들조차 심하게 앓으십니다. 한 두 번이 아니지요. 몸이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예전의 고생 때문에 몸이 상하시고, 이제는 연세도 있으시니 복합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일 테지요.”

모페이브는 살짝 군터의 기색을 살폈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에서는 무심함만이 엿보였다. 흡사 석상을 앞에 두고 이야기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도가 없는 건가.’

처음 봤을 때부터 감정 표현이 드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드문 것을 넘어 아예 감정 표현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 군터 스스로 이야기 했듯, 조금씩 희미해져 가는 감정이 이제는 아예 자취를 감춰버린 것 같았다.

신을 품은 대가라 하지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연구를 해봐도 답은커녕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제를 불러 축복을 해도 그때뿐입니다. 부인께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근본적인 방법. 그게 뭔가?”

“영약입니다.”

“구하게. 돈이라면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돈만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군의 존함을 내세워야함은 물론이고, 어쩌면 그 이상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내게 청할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하게. 필요하다면 황자라도 찾아갈 테니.”

“감사한 말씀입니다.”

“자네 자신을 위한 상을 말하라 했더니 안사람을 챙기는가.”

“집사로 지낸 세월이 짧지 않으니, 이제는 이 집의 일이 제 일 같습니다.”

“고마운 말이군.”

건조한 목소리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오가는 말들은 따스한데, 어째서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한 것일까.

모페이브는 습관적으로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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