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전투가 끝나고 하루가 지났지만, 칼페람에 치솟은 불길은 여전히 맹렬하게 타올랐다.
서늘한 밤공기가 물러가고 해가 고개를 들 무렵.
군터는 작게 타오르는 불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오늘 새벽. 수하들을 시켜 화장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머리 없는 시신 하나를 태웠다.
작게 타오르는 불 앞에는 보리스도 있었다. 그는 불길에서 눈을 떼지 않는 군터를 흘깃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장군.”
“사석이다.”
“…아버님. 어째서 직접…….”
지금 저 불 속에 타들어가는 시신이 누구인지 안다. 어찌 모를까. 머리를 베어낸 것이 바로 자신이다.
반란군의 수괴. 로크.
그런 자의 시신을 굳이 수습한 것도 그렇고, 이렇게 직접 화장까지 해주는 이유를 보리스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알던 사이다. 친우였지.”
“…예?”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알면서도 의심하게 된다. 비현실적인 것을 믿는 것보다는 멀쩡한 것을 잘못됐다 의심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옛 이야기다.”
“…….”
군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보리스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부친이 농담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농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부친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정말로 자신이 자랑스럽게 취한 수급의 주인이 부친의 친우인 것이다.
‘무슨 이런…….’
책망하지 않는다. 노한 것 같은 기색도 아니다. 그래도 보리스는 불편해진 마음으로 부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잘했다.”
“…예?”
“아티아였던가. 그런 별 볼 일없는 놈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네 칼에 죽는 것이 더 낫다. 그 녀석도 그리 생각했겠지.”
“으음.”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불길은 점점 사그라졌다.
군터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이 꺼져갈수록, 이리저리 뻗쳐있던 생각도 덩달아 그 크기를 줄여갔다. 현재. 그리고 과거.
지치고 상처 입은 채로 당도한 제국. 두려움을 안고 도착한 마을. 그곳에서 마주쳤던 또래의 사내 아이.
넝마로 몸을 간신히 가리고 있던 자신과 달리 말끔히 차려 입고 있던 그 녀석과 눈싸움을 벌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던 것은 녀석이었다.
고맙다, 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는 그 순간을 그렇게 기억했다.
기억. 그렇다. 기억.
로크는 그에게 있어 기억이었다.
‘애석하군.’
분명 자신의 삶 속에 남은 기억일 터인데, 어째서 이렇게 와 닿지 않는 것일까. 기억을 더듬는 것이 마치 책 속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다. 과거 자신의 삶이, 마치 타인의 삶이었던 것처럼 낯설었다.
“네가 남아 정리하도록 해라.”
거의 다 꺼진 불에서 눈을 뗀 군터는 보리스에게 뼛가루를 챙기라는 한 마디를 더 남기고 돌아섰다.
* * *
“이만 돌아가겠소.”
“음? 너무 이르지 않소?”
유게르 티브리악이 태연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객은 이쯤에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생각이오?”
“장군. 장군은 돌려 말하는 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소. 가끔씩은 지금의 나처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연스럽게 할 줄도 알아야 하고.”
“그러지 않아도 문제없지 않은가.”
“음?”
“지금처럼, 결국 아쉬운 쪽이 원하는 것을 말하게 되니까.”
“하핫! 그렇지. 허나 반대로 그대가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면 될 일.”
“정말이지, 참으로 한결 같군.”
솔직, 대담. 혹은 오만. 그 어떤 말로도 이 사내를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이 사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속 편하다고, 진즉 결론을 내렸다.
“음. 허면 다음에는 테리브란에서 만나게 되겠구려.”
“아마도.”
“선물은 곧 보내리다. 이미 본가에 사람을 보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설마하니 유게르 티브리악이 이런데서 얄팍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테니까.
“그대의 도움에 감사하오 군터 장군. 내 누누이 말했듯, 티브리악은 그대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이오.”
떠나는 날. 유게르 티브리악은 이른 아침부터 예를 차려 그를 배웅해주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배웅을 받으며, 군터와 그의 군대는 파헨델로 돌아갔다. 커다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군대의 발걸음은 떠나올 때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파헨델로 돌아가는 길. 그들은 그들이 정복했던 땅을 고스란히 되짚어갔다.
하루건너 하루 꼴로 폐허가 눈에 띄고, 살점이 다 뜯긴 백골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바크렌은 본래도 비옥한 땅이 아니었다. 반왕 주앙 칼 고르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부터 북쪽의 반절은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땅이었고, 남부에서나 안정적으로 농사짓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척박한 곳이었다.
이렇듯, 본래부터 살기 좋다는 말이 나오기는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수차례의 전쟁을 거친 지금은 그마저도 넘어 죽음의 땅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황폐해졌다.
“이 땅이 다시 사람이 살만하게 변하려면, 대체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할까요.”
불어터진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개천을 건널 즈음, 할렌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딱히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닐터였다. 그의 말은 독백에 가까웠다.
이 땅이 다시 살만해지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그걸 누가 알겠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뿐.
“흥. 우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있나.”
아드리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에 할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그렇지.”
그의 말대로다. 그것은 떠나는 그들이 짊어지거나,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로도 계속 이 땅에 남아 살아갈 자들의 몫이다.
* * *
파헨델로 돌아오고, 한동안은 한가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병사들에게 순차적으로 포상과 휴가가 주어졌다. 당장 휴가를 받지 못한 병사들도 충분한 휴식을 누렸다.
“보리스.”
“무슨 일인가 자밀.”
보리스는 자신을 찾아온 친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들렀네.”
“아. 내일이었나?”
“그래.”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러 가는군.”
“음. 좀 됐지.”
하필 바크렌으로 출정한 시기가 휴가 기간과 겹친 탓에 자밀은 거의 1년에 가깝도록 가족을 보지 못했다. 서신으로는 꾸준히 교류를 했다지만, 가족들이 꽤나 그리웠을 터.
“잘 지내다 오게.”
“함께 나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말이야. 율리아를 못 보여줘서 안타깝군.”
“음? 하하. 아직도 그 소리인가? 됐다니까 그러네.”
“자네가 못 믿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지.”
“믿네. 믿는다니까?”
“거짓말도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닌가? 최소한 그 입꼬리 정도는 내려 주지 그래?”
자밀이 진심으로 불쾌한 티를 내자 보리스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 꼬리를 매만졌다.
‘아무리 그래도, 한 배에서 난 남매인데 말이지.’
자밀의 외모는 객관적으로 평범했다. 군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귀족 가문의 자식이라, 어렸을 때부터 잘 먹고 자라서인지 피부는 꽤 괜찮았으나 기본적인 이목구비는 평범 그 자체였다. 그런 그를 보면, 자밀의 ‘내 동생은 미인이다’라는 말이 썩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평소에도 워낙 동생 자랑이 심한 자밀이었기에 더더욱.
“안 되겠군. 안 되겠어. 다음번에는 휴가 일정을 조절해서 나와 함께 나가세. 그때는 내 꼭 율리아를 보여주지.”
“안 그래도 되네. 믿어. 믿는다니까?”
“다음에 볼 때까지는 그 망할 표정 연습도 좀 해놓길 바라지.”
자밀이 휴가를 떠나고, 보리스의 일상은 더욱 단조롭게 변했다. 평온하다 못해 지루한 나날들이 이어지던 중, 군터가 보리스를 호출했다.
“찾으셨습니까 장군.”
“티브리악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
“예?”
“일전의 전공에 대한 포상이다.”
보리스는 그제야 탁자 위에 놓인 길쭉한 상자에 눈길을 주었다.
“혹시…….”
“열어보아라.”
보리스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고급스러운 비단에 둘둘 말린 길쭉한 물건의 정체는 비단을 다 풀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으음.”
비단을 다 걷어내고,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들어 올린 물건은 꽤나 묵직했다.
“다룰 수 있겠느냐?”
“한 번, 뽑아봐도 되겠습니까?”
“그리 해라.”
허락을 얻은 보리스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한 자루 검.
그러나 일반적인 크기의 검이 아니었다. 마상용 검치고도 유난히 큰, 어지간한 힘으로는 다루기 어려워 보이는 검이었다.
보리스는 그 커다란 검을 천천히 검집에서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한 손으로, 두 손으로 번갈아 쥐어가며 검 끝에서부터 자루까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제껏 다뤄온 검과는 전혀 다르군요. 길이, 무게, 모든 것이 다릅니다. 하지만…좋은 느낌입니다.”
손에 착 감긴다고 해야 할까. 뿐만 아니라 검을 쥐자마자 온 몸에 힘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그저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이름이 있습니까?”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네가 쓸 물건이니 직접 이름 붙여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하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정말 제가 이런 귀한 것을 받아도 될지…….”
물론 보리스도 군터가 쓰는 검이 보통 검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충분히 명검이라 할 만한 것이나, 그렇다고 지금 자신이 쥔 것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보다는 아버님께서 쓰시는 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
정곡을 찔린 터라, 보리스는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보물이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기왕 손에 쥐었다면 제대로 다루거라.”
“그리하겠습니다.”
군터는 들뜬 기색이 역력한 보리스를 내보내고, 이어 테리브란에서 온 전령을 들였다.
“야스메티의 서신인가?”
“야스메티님의 서신도 있고, 모페이브님의 서신도 있습니다.”
“모페이브?”
모페이브가 따로 서신을 보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군터는 모페이브의 서신부터 확인했다.
“…….”
꽤나 긴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중, 담담하던 군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잠시 후. 군터가 집무실 밖의 병사에게 명을 내렸다.
“살라스를 불러와라.”
* * *
“테리브란으로 가라.”
업무를 보던 중 불려온 살라스는 곧바로 떨어진 군터의 명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휴가는 아니다. 그랬다면 ‘가라’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임무일 터.
“소관이 해야 하는 일을 말씀해주십시오.”
“네 잘린 팔.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
“모페이브를 찾아가라. 자세한 설명은 그가 해줄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