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반란군의 수괴! 로크의 목이다!”
첨탑 위에서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보리스. 그리고 그 손에 들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급.
그것을 멀찍이서 보았을 때, 군터는 잠시 말을 멈춰 세웠다.
“하하! 공자…아니, 보리스 백부장이 한 건 제대로 했군요.”
아드리안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한바탕 소리친 보리스가 또 하나의 수급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웃음은 더 커졌다.
“보리스 백부장에 대해서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장군. 한 사람 몫을 차고 넘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 전투의 제1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겠습니다.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아드리안의 말이 맞다. 적장의 목을 둘이나 취하고, 특히 수괴인 로크의 목을 벤 것은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공이다. 어쩌면 이 전쟁에서 세운 가장 큰 공일 것이다. 만약 이 전쟁이 티브리악의 전쟁이 아니라 7황자의 전쟁이었다면 단번에 천부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자식이 그리 큰 공을 세웠으니 아비로서 응당 기뻐야 할 터인데, 조금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옛 친구의 죽음이 마음에 걸려서일까?
“…….”
아주 조금,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픔도, 쓸쓸함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조금, 무언가 스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십 개의 가지를 뻗은 거목이, 선선하게 불어온 바람에 살짝 잎을 흔드는 것 같은.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유게르 티브리악이 조금 심술이 날 수도 있겠습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배신자들에 대해 증언할 ‘입’을 원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입은 저기 보리스의 손에 머리가 잘린 놈이 될 예정이었을 터. 그런 놈을 보리스가 죽여 버렸으니, 유게르 티브리악의 입장에서는 조금 속이 쓰릴 것이다.
“그럴지도.”
“문제는 없겠지요?”
“당연히.”
자기 속이 좀 쓰리다고 해서 공을 세운 이를 벌할 것인가? 그 자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보리스는 군터의 아들이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억지로라도 활짝 웃으며 포상을 안겨줘도 모자라리라.
“헌데 장군.”
“음?”
“기쁘지 않으십니까?”
무표정한 얼굴은 익숙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뚝뚝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자식이 대공을 세웠는데도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군터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의 상관은,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진대, 어째서 그의 생각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기뻐해야 하나.”
“예? 뭐,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은 말입니다.”
“자식이 없지 않았던가.”
자식만 없던가. 부인도 없다. 칼밥 먹고 사는 인생에 가정을 꾸리고,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칼로 베거나, 베여보지 않아도 칼이 날카롭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비유였을까? 아마 아닐 테지만, 그에게 있어 갑작스럽게 짜낼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래도 다행히 그의 상관은 납득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리곤 말 머리를 돌렸다.
“가보지 않으십니까?”
“볼 일이 없어지지 않았느냐.”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은 보리스다. 굳이 뒤늦게 가서 얼굴을 비출 필요가 뭐 있겠는가.
“네가 가서 로크의 시신을 챙기거라.”
“예?”
아드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요한 것은 수급이지, 머리 잘린 몸뚱이가 아니지 않느냐.”
“그렇긴 합니다만, 어째서?”
그의 말대로 필요한 것은 수급뿐이다. 허나 그렇다면, 필요도 없는 것을 왜 챙기려 하는가.
“부탁을 받았다.”
“부탁…말입니까?”
군터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어찌 됐든 명령을 받았으니, 따르면 그뿐.
* * *
“깔끔한 승리요 장군.”
“승리를 축하하오.”
“우리의 승리지. 함께 축하합시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웃는 얼굴로 군터를 맞이했다. 그는 점점 더 번져가는 불길과 검은 연기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대의 아들이 적장의 목을 두 개나 취했다고 들었소. 훌륭한 아들을 두었군.”
“그 중 하나가 그대가 부리던 간자였다고 들었는데.”
“간자라기보다는 잠깐 써먹은 말 정도지. 그에 대해서는 괘념치 마시오.”
예상했던 대로,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 부분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대의 계획이 조금 틀어진 것 아닌가?”
“조금은? 허나 별 문제 될 것은 없소.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저들은 어지간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끼리 물고 뜯는 것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이번엔 좀 심했거든. 그들도 알고 있겠지.”
“…….”
권력자들 간의 사정이라. 군터는 이제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유게르 티브리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락했소. 해가 저물기 전에 끝이 나겠지. 그러고 나면, 난 저 도시 안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태울 것이오.”
멀리 치솟는 불길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장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지. 어떻소? 저 정도 크기의 도시가 통째로 불타는 것을 본 적 있소?”
“아니. 없소.”
“그렇다면 장군에게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군.”
그는 승리에 도취된 것 같았다. 지긋지긋했던 골칫거리를 드디어 마무리 지었다는 성취감과 패배한 적에 대한 분노가 그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는 듯했다.
‘흔한 일이지.’
자존심이 하늘에 닿았다고 해도 모자라는 권력자다. 그런 권력자가 낭패를 보고 기가 죽어 있었으나, 그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거기에 적당한 명분도 있으니 이 정도의 화풀이는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아! 그렇지. 장군의 아들. 음…보리스라고 했던가. 전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을 내려야 할 것인데. 무엇이 좋을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오. 내가 알아서 상을 내려도 되니.”
“아니지. 그럴 수는 없소. 이 전쟁이 내 이름을 걸고 치러지는 것인 이상, 전공에 대한 포상은 내가 직접 내려야 맞는 것. 음…그러나 장군의 아들이며 휘하에 있는 자에게 내가 따로 관직을 내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니,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겠군. 그렇다고 재물로 하기는 그렇고…….”
유게르 티브리악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가 금방 뭔가를 떠올렸는지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그거면 되겠군. 내게 좋은 검이 한 자루 있는데, 그것을 주겠소.”
“검?”
물론 명검이라고 하는 것들의 값어치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나간다지만, 한 전쟁에서 적 총대장의 목을 벤 것에 대한 포상치고는 작은 감이 있었다. 더군다나 보리스가 벤 목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런 군터의 생각을 읽었는지, 유게르 티브리악의 웃음이 더 진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군. 허나 그것은 보통 검이 아니오. 용의 뼈로 검신을 만들고, 용의 피를 달구어 제련했지. 거기다 고위 술사들이 몇 명씩이나 매달려 몇 가지 술법을 각인시키기까지 했소. 법보에 버금가는 귀물이지.”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분한 포상이군.”
“하하. 그런 감이 있지. 그 검은 일전에 줄카 전하께서 토벌하신 붉은 용의 부산물로 만든 것이니까. 내 조부님께서 정말 어렵게 구하신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렇게 얻은 보물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소.”
“어째서?”
“자루부터 칼끝까지 전부 용의 뼈로 만든 것이라, 그 무게가 어지간한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거든. 우리 가문의 사람들 중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 하여 가신들에게 하사할까도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귀물이라 그러지도 못했소.”
“부담스러운 이야기인데.”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의 가슴은 평온했다. 즉답은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흘러나갔다. 군터는 자신이 거짓말에,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데 능숙해졌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부담을 느낀다면 기쁘군.”
그런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유게르 티브리악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건 전공에 대한 포상이기도 하지만 그대와 나의, 티브리악의 우호를 다짐하는 선물이기도 하오.”
순수한 의도로 주는 선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순수’같은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유념하지.”
도시 위로 일렁이는 붉은 빛이 빠르게 번져갔다.
* * *
“경솔한 행동이었다. 보리스 백부장.”
할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느 때였다면 이런 진지한 나무람에 얌전히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사사로운 친분을 떠나 그는 보리스의 직속상관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고개를 숙이지도, 입을 닫지도 않았다.
“경솔함이라는 말씀은, 소관이 군터 장군의 아들이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전장에서의 일은, 백부장 보리스의 일로서 봐주십시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 때가 되지 않았나?”
“…….”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보리스는 어리석지 않았다. 할렌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부장 보리스로서 공을 세우는 것보다, 장군의 아들 보리스로서 안위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그러나 알면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혈기의 가면을 쓴 치기 때문일까.
“언젠가 제가 아버님의 뒤를 잇게 되겠지요.”
‘장군’이 아니라 ‘아버님’이다. 백부장 보리스가 아니라, 장군의 아들 보리스로서 하는 말.
그에 할렌도 말투를 바꾸었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그때, 아버님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가 그 뒤를 이을 수 있겠습니까? 장교들과 병사들이 납득하겠습니까?”
“그 또한, 당연히 그럴 겁니다.”
“납득은 할지라도, 인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는 겁니다. 훗날 내가 아버님의 뒤를 이을 때, 내가 거느릴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음.”
“할렌님께서 우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압니다. 이번에 제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놀라시고, 걱정하셨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공자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번 같은 일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공을 세우지 않더라도 공자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무작정 위험을 무릅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이는 이들 중 자신 없이 움직이는 이들은 드물지요. 그리고 보통, 그런 자들은 전장에서 종종 거꾸러집니다. 전 이제껏 이 두 눈으로 직접, 그런 자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할렌이 보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과감해져야 할 때 과감해지십시오. 오늘 공자가 보인 모습은 조급함입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공자는 아직 어리고, 기회는 많습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