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훌륭해.’
일부러 열어준 길인 줄도 모르고, 혹은 알고 있었다고 해도 기회라며 좋다고 달려든 적들이 양 측면의 협공에 비틀거린다. 거기에 더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아군의 기병 때문에 뒤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그렇게 수가 줄어드니 돌파력도 줄어든다.
“창대 끝을 땅에 두어라! 팔로는 창이 쓰러지지 않게 지탱하기만 해!”
“방패! 방패 들어!”
“궁수들은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시위를 당기지 마라!”
일사분란하다. 방패병과 창병이 어우러져 벽을 형성하고, 뒤로 물러선 궁수들은 가까워지는 적을 보며 침착함을 유지한다. 고도로 훈련되고, 많은 실전경험을 겪었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파헨델의 군대. 그야말로 정병이군.’
이전부터 말도 많이 들었고, 이번 전쟁에서 파헨델의 군대가 합류한 후로 그들의 활약을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저런 군대를 거느릴 수 있다면 만금인들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병사들만이 아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장교들의 역량도 훌륭하다. 맡은 일을 철저하게 해내며, 재량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에는 망설이지 않고 움직인다. 기본적으로 능력도 능력이지만, 믿음이 있는 것이다. 저 믿음은 자신감이기며, 또한 상관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모레인이라.’
모레인. 모레인 티브리악.
저 병사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적을 차근차근 분쇄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 담담함에는 긴장도, 여유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그저 할 일을 한다는 느낌.
‘보기 드문 인재야.’
티브리악의 밑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 그 중 인재라고 할 만한 자들이 어찌 없겠는가. 재주 있는 자들이 제발 자신들을 써달라며, 봐주기라도 하라며 구름처럼 몰려든다. 그 중 거르고 거른 자들이 현재 티브리악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지금 이 군대에 있다. 그들 중에는 분명 저 모레인 티브리악 못지않거나, 더 뛰어난 인재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레인에게 마음이 갔다. 불길 속에서 자신을 구했으며, 먼 방계라고는 하나 어찌 됐든 혈족이다. 마음이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리 말로 충성한다, 충성한다 해도 그 충성심을 어찌 알아보겠는가. 충심을 증명할 기회는 드물며, 증명하지 못하는 충심은 아첨과 분간하기 어렵다. 능력과 충성심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후자를 택하는 이가 유게르 티브리악이었고, 그의 입장에서는 옅다고는 해도 같은 피가 흐르는데다 능력까지 있는 인재에 대해 욕심이 크게 들 수밖에 없었다.
“장군. 마무리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나름대로 내 목을 노리고 준비한 한 수 일 텐데, 상당히 허술하군.”
매복한 기병의 존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반란군 내에 그와 내통하던 자로부터 일찍부터 귀띔을 들었었다. 그렇기에 신경은 썼어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적이 어떻게 나오더라도 결코 뒤를 찔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티아라는 자. 그 자가 정말 로크의 목을 가져올까요?”
“아무래도 상관없다.”
가져오면 좋고, 아니라도 괜찮다. 포위는 굳건하고, 로크라는 놈은 절대 칼페람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테니.
“뭐…그래도 일이 놈의 말처럼 되면 편하기는 하겠지.”
“허면 그 후에는……?”
“달라지는 것은 없다.”
칼페람은 본보기가 될 것이고, 깔끔하게 사라지리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함께.
* * *
군터는 서문에서부터 쭉 동쪽으로 이동했다.
저절로 열렸던 성문과 달리, 도시 내에는 전의가 가득한 반란군들이 그를 반겼다. 그럭저럭 괜찮게 병사들도 있었고,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의 백성들도 있었다. 무장을 했어도 통일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었으나, 그런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제국의 깃발을 보며 사납게 덤벼들었다는 것.
푸욱!
그러니 적이었으며, 그러니 죽였다. 하나도 남김없이.
“장군. 아군이 승기를 잡은 듯합니다.”
도시의 중앙 즈음을 지날 때, 도시 곳곳에서 아군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서문 외에 다른 쪽도 뚫렸다는 뜻.
“벌써 시작한 것 같군요.”
시작했다 함은 약탈을 의미했다. 도시 곳곳에서 본 아군 병사들은 전투도 전투지만, 무엇보다 약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칼페람이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으로 집결한 도시라지만, 이런 곳에도 재물과 여인은 있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전투를 치르기 전부터 칼페람에서 벌이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겠노라 선언했었고.
그런 그의 선언은 전면적인 약탈의 허용이었으며,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마저 눈에 불이 켜지는 소리였다.
“그렇군. 약탈을 허용하겠다.”
군터는 그의 수하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인지 잘 알았다. 묵묵히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한껏 몸이 달아 있다는 것도.
“십인대 단위로 움직여라.”
“예. 병사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약탈에 눈이 멀어 목 날아가는 일은 없도록 주의하고.”
마지막 말은 의미 없는 덧붙임이었다. 재미를 보다가 목을 잃을 만한 머저리는 그의 휘하에 없었으니까.
아무튼 군터는 그렇게 병사들을 풀어준 뒤, 친위대만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계속 움직였다. 승기가 기울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적잖은 적이 도사리고 있는 적지였다. 그런 곳의 한복판을 지나면서도 군터는, 그를 따르는 이들은 여유로웠다.
“정말 주력은 죄다 바깥쪽으로 뺐나 봅니다.”
아드리안이 말했다.
적지 한복판을 이동하고 있음에도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간간이 맞닥뜨리는 적은 제법 있었으나 그들 모두 제대로 된 병력이라 보기는 어려웠고, 심지어 규모도 기껏 많아봐야 백 정도였다. 병사들에게 자유를 주어 풀어놓으면서 본대의 규모가 줄어서일까? 하지만 제국기와 붉은 장군기는 여전히 높이 휘날리고 있었다. 두 개의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은 눈이 있다면 멀리서도 충분히 확인 가능할 터였다.
“결국 이 정도라는 것이겠지요.”
아드리안의 말대로다. 아무리 반란군이니 뭐니 해도, 결국 그들의 본질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잡다한 무지렁이들에 불과했다. 그런 이들 중 일부가 어떻게 몇 번 실전을 치르며 경험을 쌓았다고 한들, 그게 뭐 그리 큰 위협이 되겠는가. 베이고르의 잔당이 합류했다고 해도 소수에 불과하고, 그들은 이미 지난 전투에서 갈려나갔거나 지금도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을 터. 도시 안쪽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병력은 대충 이 정도 수준일 것이다. 5만 대군은 허상이며, 실제로는 그 대다수가 이런 허수아비들일 테고.
그런 수준의 적이다. 게다가 그들 대다수는 지금 도시 밖의 아군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어느 정도냐면, 서문이 뚫린 지 오래임에도 별다른 조치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아티아라는 놈 말입니다. 그놈이 로크의 목을 갖다 바친다면, 유게르 티브리악이 어찌 나올까요?”
“글쎄. 넌 어떨 것 같으냐.”
“음.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적당히 목숨만 살려주지 않겠습니까? 재물이나 조금 안겨줄지도 모르겠군요.”
“어째서?”
“예? 그야…놈이 칼페람을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로크의 목까지 가져다 바친다면, 어느 정도 대접받을 만하지 않겠습니까?”
타당한 말이다. 적이라고 해도 투항을 한다면 받아주는 것이 보통이고, 공을 세우면서 투항한다면 어느 정도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허나 지금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유게르 티브리악은 처음부터 칼페람을 본보기로 보이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배신자들’에 대해 증언할 입을 제외하고, 그는 칼페람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기로 결정했다. 아티아라는 놈이 내통과 투항의 대가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유게르 티브리악이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거 좋군요.”
아드리안이 씩 웃었다.
“음?”
“그런 비열한 배신자 놈이 잘 되는 꼴을 보는 건 재미없으니까 말입니다.”
배신자라.
배신이라고 하면, 그도 한 번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일구었던 기반을 모두 잃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가까스로 몸을 뺀 뒤로는 복수를 다짐하며 이를 갈았고, 기어이 이루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배신이나 배신자라는 말만 들으면 절로 눈이 치켜 뜨이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월이 분노를 묻은 것일까? 어쩐지 지금은, 그의 목을 베었던 미겔이 살아서 앞에 있다고 해도 별로 화가 날 것 같지 않았다.
* * *
처음 딱 봤을 때부터 힘깨나 쓸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려운 상대일 것 같지는 않았고, 막상 칼을 맞대보니 실제로 그랬다.
챙강!
제대로 배운 검술이 아니다. 형도 없고, 식도 없다. 실전에서 어설프게 몇 가지 요령만 익힌 느낌이 강했다. 그나마 힘은 쓸 만하지만, 그마저도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과연 군터의 아들’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보리스에게는 말이다.
“흐윽!”
호기롭게 덤벼들었던 이의 몰골은 처참했다. 갑옷은 이곳저곳이 잘려나갔고, 몸 곳곳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이를 악 물고 버텼지만 보리스가 본격적으로 몰아붙이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쓰러졌다.
“딱 쥐새끼 수준. 그 이상, 이하도 아니군.”
“이…이 노옴……!”
원독에 찬 눈. 심약한 이가 저런 시선을 받는다면 움찔이라도 하겠지만, 보리스에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였다. 얼굴에 들어서 있던 심드렁함이 더 진해질 뿐.
“수급은 잘 쓰마.”
아티아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의 한 마디보다 보리스의 검이 더 빨랐다. 서걱! 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목에 혈선이 그어졌다.
‘싱겁군.’
부하들도 거의 다 정리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훌륭한 솜씨군.”
보리스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아까 전보다 훨씬 더 안색이 창백해진 로크가, 이제는 아예 주저앉아 헐떡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도의 솜씨가 있으니…그 나이에 백부장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아무리 입에 꿀을 발라봐야 소용없다.”
“흐흐. 자네 눈에는 내가 무슨 노회한 여우로 보이는 모양이군.”
“아닌가?”
“글쎄. 좋을 대로 생각하게. 아…그나저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것 같나?”
“모르지. 허나 자네에게 필요한 건 결국 내 수급이 아닌가.”
“음?”
“몸통은 저기 광장에다가 버려주게. 뭣하면 로크의 머리 잃은 몸뚱이라고 함께 써 붙여도 좋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쓸모없는 몸뚱이라도 챙겨갈 놈이 있거든.”
“…….”
무슨 영문 모를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그래도 보리스는 순순히 그러겠노라 답하지는 않았다. 부탁의 내용을 떠나, 뭔가 상대의 뜻대로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불쾌했기 때문이다.
“남길 말은 더 없나?”
보리스는 검을 늘어뜨리고 로크에게 다가갔다. 그의 주변을 지키던 몇 안 되는 병사들은 전투가 벌어지던 와중에 죽은 터라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로크는 혼자였다.
“고맙네.”
“멋대로군.”
보리스가 검을 들어올렸다.
“자네. 내가 아는 어떤 녀석을 닮았어.”
“착각이겠지.”
검이 바람을 가르며, 거칠고 희미하게 이어지던 숨소리가 멎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