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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41화 (541/1,064)

541화

보리스는 첨탑 위에서 소리치던 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남들은 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혼자 소리만 쳐대던 것이 척 보기에도 꽤나 지위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화살 한 발로 노려보기도 했었고.

하지만 설마, 그 자가 로크였을 줄이야.

“커…커흑!”

겪어보기 전까지는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죽여도 입을 열지 않을 것처럼 굴던 이도 죽이기는커녕, 몸에 칼 몇 번 박히고 나니 이렇게 술술 불고 있지 않은가.

서걱!

보리스는 협조해준 적에 대한 답례로 깔끔하게 목을 쳐 주었다.

“대장님. 어찌 하실 겁니까?”

“어찌 하기는. 적의 수괴가 바로 저곳에 있다고 하지 않느냐.”

피 묻은 검이 우뚝 솟은 첨탑을 가리켰다.

“그저 그런 놈도 아니고, 반란군의 수괴입니다. 호위 병력이 적지 않을 터인데, 저희만으로는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그 호위병력, 다 분산되었다고 하지 않더냐.”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아닐 거다.”

“예?”

“죽이라고 애원하던 놈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한 방 먹이려고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럴 정도로 대가 센 놈 같지는 않았어.”

“으음. 하지만.”

두려움.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수하들의 눈에서는 두려움이 보였다. 보리스는 그것이 조금 한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이해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고작 백인대 하나가 수만을 지휘하는 적장의 목을 치러 간다고 하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테니.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그것을 공이라 하겠느냐.”

예전이었다면 윽박을 질렀으리라. 강압적으로 병사들을 휘어잡고, 이끌었을 것이다.

“내가 백부장이 되었기에 너희도 십부장이 되었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공을 세운다면 그것이 나 혼자만의 공으로 끝나겠느냐?”

여러 사람을 만나고, 부대끼며 배웠다. 아랫것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 있지 않았다. 여럿이 있었는데, 어떤 것들은 비슷하고 어떤 것들은 상반됐다. 무엇이 옳은지, 더 나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으나 가장 마음에 와 닿은 한 가지는 있었다.

욕망을 자극하는 것.

사람에게는 누구나 욕망이 있다. 군인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매우 단순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전공과 포상에 목말라있다. 보리스는 그것들로 부하들을 다스렸다. 평소에도 그들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하게 굴지 않았으며, 일전에 공을 세워 백부장으로 올라갈 때에도 휘하의 병사들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십부장들 중 몇 명은 그때 당시 그가 거느리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알고 있다. 보리스가 결코 허투루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공을 세우면 자신들에게까지 그 달콤한 과실을 나누리라는 것을.

“따르겠습니다.”

약간의 고민이 있었으나, 결국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 두려워하고 망설여하던 병사들이 의욕에 차올랐다. 보리스는 그들을 이끌고 적의 수괴가 있다는 첨탑으로 향했다.

“이놈들!”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첨탑으로 가는 도중에 여러 번 적과 마주쳤다. 그 중에는 제대로 갖춰 입은 적들도 있었으나, 제대로 된 무장도 하지 않은 부랑배 같은 이들도 있었다. 보리스는 그들이 훈련받지 않은 일반 백성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유게르 티브리악. 어지간히도 원망을 샀군.’

살기등등한 정예병의 앞길을 무지렁이 백성들이 가로막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덤벼들었다. 대충 나뭇가지를 꺾어 든 것 같은 몽둥이, 녹슨 농기구, 전장에서 주워온 것임이 분명한 이 빠진 칼 등. 온갖 잡다한 것들을 들고서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쓸어버려라!”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보리스와 그의 병사들은 가로막는 모든 적들을 베어 넘기며 이동했다.

그렇게 피를 뒤집어쓰며 첨탑 앞까지 도착했을 때. 보리스는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첨탑 입구 쪽에는 수십 구가 훌쩍 넘는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선객이 지나간 흔적임이 분명해 보였다.

‘나보다 앞선 자가 있다고?’

순간 허탈한 기분이 들었으나 속단하지는 않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보리스는 자신보다 빠르게 이곳에 온 아군이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그 역시 성벽을 오르자마자 거의 바로 이곳에 왔는데, 그런 그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다.

‘뭐가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올라가봐야지.’

입구 쪽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로크라는 놈도 몸을 피했을 확률이 높다.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가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올라간다.”

신중하게 계단을 올랐다. 계단 중간에도 몇 구의 시신이 있었다. 모두 얌전히 죽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 나보다 먼저 온 자가 있는 건가?’

보리스의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선수를 빼앗겨버린 것인가 하는 아쉬움과, 대체 누가 자신보다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첨탑 꼭대기에 올랐을 때. 보리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추측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 그 다음 들어온 것은 복부를 움켜쥔 채 반쯤 쓰러져 헐떡이는 외팔이.

‘저 자가 로크.’

일반 병사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행색으로 그들이 장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또한 그들 모두 제국군이 아니라는 것도 역시 한 눈에 알아보았다.

‘뭐지 이 상황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그 둘이었을 뿐, 장내에는 수십이 훌쩍 넘는 병사들이 있었다. 모두 반란군의 병사였으나, 그들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병사들을 나머지 병사들이 둘러싼 모습이었다. 두 명의 장수는 그 두 무리의 선두에 있었고.

누가 보아도 서로 다투고 있는 상황. 그 형세는 건장한 체구의 장수 쪽이 우세였으며 외팔이 장수, 로크일 것이 거의 확실한 자의 무리가 열세였다.

“대장님. 이게 무슨…….”

뒤따라온 보리스의 수하들도 이 뜻밖의 상황에 눈이 동그래진 것은 마찬가지. 그러나 그들과 함께 지금 막 이 자리에 도착한 보리스다. 그라고 해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제국군인가.”

건장한 체구의 장수가 보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난 아티아라고 한다. 난 내 수하들과 함께 유게르 티브리악 장군에게 투항하기로 했다.”

짐작이 들어맞았다. 보리스는 자신을 아티아라고 밝힌 반란군 장수와 복부를 움켜쥔 외팔이를 번갈아 보았다.

“저 자는?”

“반란군의 수괴. 로크다.”

“아티아 이놈!”

반란군이라. 반란군의 장수씩이나 되는 이가 입에 담기에는 낯부끄러운 말일 터인데,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의 태도는 꽤나 당당했다. 그와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이 욕지거리를 토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래서…투항을 하는 김에 로크의 목을 가져다 바치려는 건가?”

“자잘한 공을 세우며 투항했다고는 하나, 이제껏 제국에 맞섰던 우리에 대한 대우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을 안다. 해서 챙겨갈 수 있는 것은 다 챙겨갈 생각이었다.”

“…….”

좋은 생각이다. 어차피 투항을 한다면 최대한 공을 세워야 조금이라도 나은 대접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 로크의 목이라면 그들이 챙겨갈 수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최상의 선물일 터.

하지만 보리스는 이 아티아라는 작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크의 목은 그의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피땀을 흘려가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웬 같잖은 놈이 그의 것을 가져가려고 한다. 그것부터가 마음에 안 들지만, 무엇보다 짜증나는 것은 이놈이 배신자라는 것이다. 세상 어느 누가 배신자를 좋아하겠냐마는, 보리스는 특히 배신하는 족속을 경멸했다. 원래도 싫어했지만, 그의 부친이 베이고르에 있을 당시 미겔이라는 놈에게 등을 찔린 이후로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보게. 제국의 젊은 장교.”

보리스가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헐떡이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복부를 움켜쥐고 있던 외팔이 장수, 로크였다. 칼을 한 방 맞았는지, 그의 손이 가린 부위에서는 핏물이 꽤나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아하니…이 일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모양이군. 그렇지?”

“…그런데?”

보리스가 로크와 대화를 하려하자 아티아가 끼어들었다.

“곧 죽을 자의 말을 들을 필요 없다.”

“그건 내가 판단한다. 반란군.”

보리스의 싸늘하면서도 신경질적인 대꾸에 아티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뒤에 선 병사들도 덩달아 발끈하는 기색이었으나 보리스의 뒤에 늘어선 살기등등한 병사들 때문에 나서지 못했다.

로크는 그를 보며 낮게 웃었다. 배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웃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으나, 보리스는 그래서 더 그에게 흥미가 갔다. 과연 이런 꼴을 당하기는 했어도 수만 군대를 이끌던 자라는 것일까.

“저놈이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투항을 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 설령 그렇다 한들 자네는 몰랐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자네가 이 자리에서 내 목에 더해 저놈의 목까지 취한다 해도 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네.”

“무슨 헛소리를!”

아티아가 버럭 소리쳤다.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보리스에게 말했다.

“저놈의 잔꾀에 넘어가지 마라! 나와 너를 상잔시키려는 속셈이다!”

“상잔?”

보리스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런 말은 서로의 전력이 비슷할 때에나 성립하는 것이지. 지금 상황에는 해당하지 않아.”

아티아의 표정과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너무 자신만만하군. 기껏해야 백부장 정도 되어 보이는데.”

“쥐새끼한테 들을 말은 아니로군.”

“쥐…새끼?”

“자기만 살겠다고 아군의 등에 칼을 꽂는 놈 아닌가. 그런 놈에게는 쥐새끼라는 표현도 과분하지.”

이제 아티아와 그의 병사들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대장님.”

그의 뒤에 선 병사들은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구든지 전투를 앞두면 긴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보리스는 예외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는 아티아와 그의 무리를 없는 것처럼 대했다. 그의 시선은 조금 전보다 더 숨이 가빠진 로크에게 머물렀다.

“꽤나 간교하군. 그 간교함으로 반란군을 이끌었나?”

“흐흐…쿨럭! 적잖이 도움을 보긴 했지.”

생기가 꺼져가고 있다는 것이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데, 그런 와중에도 두 눈에 만큼은 힘이 있었다. 보리스는 그 두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뭐, 좋아. 그 간교함에 어울려주지.”

그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취할 수 있는 장수의 목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

“쥐새끼의 말로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로군.”

쥐새끼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그런 낯짝을 보는 것도 꽤나 즐거웠다.

“하필 나와 마주친 불운을 탓해라 쥐새끼.”

첨탑에 오른 것이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얌전히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이름이 나오고 어쩌고 하면 일개 백부장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지니까.

그러나 보리스는 일개 백부장이 아니었다. 그는 유게르 티브리악이 두렵지 않았고, 혹시 모를 뒷감당도 역시 두렵지 않았다.

그런 그와 마주친 것이, 저 아티아라는 쥐새끼의 불운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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