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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40화 (540/1,064)

540화

이번만큼은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모레인 티브리악은 정말로 그리 생각했다.

보고에 따르면 후방에서 나타난 적의 수는 대략 천오백 남짓.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름대로 신경 쓴 한 수라고는 하나 그래봐야 반란군의 기병일 뿐이다. 파헨델에 있으면서, 군터를 따르면서 온갖 적들을 상대해온 그의 눈에는 그저 오합지졸들이 말 타고 기병 흉내를 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찌 상대하는 것이 좋겠는가?”

“놈들은 장군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 그러니 지금까지 인내심 좋게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놈들이 가까이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지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옆에서 버럭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무시했다. 유게르 티브리악도, 모레인 티브리악도.

“나를 미끼로 써서 놈들을 끌어들이라는 말인가?”

“별 위협도 되지 않는 놈들입니다. 단지 귀찮아질 뿐이지요. 손쉽게 쓸어버릴 수 있는 방도가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유게르 티브리악이 피식 웃었다.

“자신만만하군.”

“혹 소관이 무례했다면…….”

“아니. 아니야. 무릇 무관이라면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물론 패기가 객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소관은 전장에서는 항시 목을 걸고 싸워왔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담담함 목소리지만 할 말은 다 한다. 어찌 보면 건방지다고 여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런 모습조차도 믿음직스럽다고 느꼈다.

모레인은, 우연찮게 만난 그의 혈육은 불길 속에서 그의 목숨을 구한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러니 한 번도 믿음을 저버린 적 없는 이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좋아.”

유게르 티브리악의 허락이 떨어지자, 몇몇 이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들은 대놓고 잡아먹을 것처럼, 혹은 은밀한 적의를 담아 모레인 티브리악을 바라보았다.

“실망시켜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레인 티브리악은 자신을 향한 짙은 악의들 속에서도 담담했다. 그런 당당한 모습이 유게르 티브리악의 눈에 더 듬직하게 보였음은 물론이었다.

* * *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갑옷이며 온갖 무장들에 체중까지 더해져 무거운 발소리가 났다. 그러나 발걸음보다 더 무거운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로크 장군은 좋은 사람이다.’

그는 분명 따를만한 사람이다. 수만이 넘는 병사들과, 수십만의 백성들이 그를 따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티아도 그를 존경했다. 만약 다른 길이 있었더라면 분명 그를 위해 목숨바쳐 싸웠을 것이다.

‘이건 가망 없는 전쟁이야. 기병대를 운용해 친다는 계획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 함께 죽을 것을 각오했다면 차라리 카베르 장군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다. 비겁한 변명이기도 하다. 아티아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한때는 정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죽더라도 원한 한 번 시원하게 갚고 가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여인을 만나고, 그녀가 아이를 가지면서 그 굳건하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이야 이대로 죽는다 해도 아쉬울 것 없으나, 몇 개 월 뒤 세상에 태어날 아이와 어미는 어쩐단 말인가.

복수심과 미련.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과 함께 후자로 기울어갔다. 그리고 끝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비겁하다는 것을 안다. 배신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나 비열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장군. 나를 용서치 마십시오.’

욕을 하고 침을 뱉은들 어찌 그것을 외면할까. 아티아는 딱딱하게 굳힌 표정으로, 그의 발걸음보다도 더 무거운 마음을 안고서 동쪽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 마주치는 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의아한 기색을 보였으나, 다급한 듯 빠르게 이동하는 그와 그의 병사들을 보고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면서 지나쳤다. 그런 행동의 기저에는 아티아라는 사내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아티아는 더욱 괴로웠다.

“로크 장군께서는 어디에 계시느냐.”

“첨탑에 올라 지휘하고 계십니다.”

지나는 장교에게 로크의 위치에 대해 물을 때도 그들은 아무 의심도, 거리낌도 없이 즉시 답해주었다. 아티아는 영문을 묻는 그들에게 로크에게 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둘러댔다. 다소 서툰 말이었으나 역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와아아아!

동쪽 성벽에 다다를 무렵. 거친 함성이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보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너머에서 얼마나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

입술을 깨문 아티아가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 * *

카앙!

칼과 칼이 부딪치고, 불똥이 튀었다. 서로 온 힘을 다해 부딪쳤지만, 힘의 차이는 현격했다.

“커윽!”

연달아 날아든 칼날을 막아낸 대가로 한센은 볼썽사납게 뒤로 굴러야했다. 대장이 된 몸으로 수치스러운 꼴을 보인 셈이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뒤로 구르는 와중에 가슴과 등에 입은 충격 탓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 문제였다. 즉시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몰아치는 할렌의 검이 매순간 그의 목을 노렸고, 한센은 살기 위해 받아쳐야 했다.

챙! 채챙!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버티기에 급급했다.

“허억!”

그러나 그마저도 더 이상 가빠질 수도 없던 숨이 턱 막히는 순간, 더 이어질 수 없었다.

푸욱!

미끼로 휘두른 검에 한센이 전력으로 반응한 직후. 할렌은 재빠르게 검을 회수하고 체중까지 실어가며 찔렀다. 한센이 착용한 갑옷은 제법 두꺼운 철판을 이어 만든 것이었으나, 할렌의 검은 정확히 가슴 사이의 이음새를 파고들었다.

“끄…….”

입과 목에서 흐른 피가 할렌의 어깨를 적셨다.

할렌은 무너지는 한센의 몸을 걷어차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꿈틀거리며 그의 발을 더듬는 한센의 손을 거칠게 짓밟았다.

‘꽤 괜찮았다.’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막아서기 위해 몸을 던졌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이다. 할렌은 이런 자를 좋아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짜증이 나는 것은 나는 것이었다. 이 끈질긴 놈 때문에 너무 길게 묶여 있었다. 상대가 할 일을 한 덕에 이쪽이 할 일을 다 못하게 된 것이다.

‘조금 더 과감하게 했더라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일찍 끝낼 수 있는 순간이 여럿 있었다. 몸에 칼을 맞는 것을 각오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할렌은 그러지 않았다.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안정적인 쪽을 택한 것이다.

‘나도 꽤 변했어.’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몸에 칼을 맞든 화살을 맞든,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를 죽이는 것만 생각했었다. 지금처럼 앞뒤를 재지 않았단 말이다.

할렌은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어 씁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런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도 나이를 먹었다. 이틀 밤을 새어도 멀쩡했던, 한창 때와는 다르다. 아직까지는 팔팔하다고 자부하지만, 때때로 몸이 생각처럼 안 움직여 줄 때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살라스님만 봐도 그렇지. 나도 언제까지 직접 칼에 피를 묻히고 살 수는 없다.’

자식이라고 두 놈 있는 것들이 이제야 한 사람 몫을 할까 말까 하고 있다. 적어도 그놈들이 걱정 살 일 없게 될 때까지는 몸 멀쩡히 있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싸워야 할 때에 비겁하게 발을 뺄 생각은 없지만.

‘이 싸움이 그런 싸움은 아니니까.’

시시하기도 할뿐더러, 기본적으로 남의 집 잔치다. 이런 자리에서 안 흘려도 될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않겠나.

“다들 모였나!”

“보리스 백인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할렌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자밀!”

“예!”

“보리스! 어디로 갔나!”

“적장의 수급을 취하겠다며…….”

알고 있었다. 전투 중간에 보리스와 그의 병사들이 전혀 엉뚱한 곳의 적을 돌파해서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 말이다.

‘이런 젠장!’

부대를 이탈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기도 애매하다. 그들 천인대가 똘똘 뭉쳐 움직인 것은 성벽을 오를 때까지였다. 이 좁은 성벽 위에서 천인대가 통째로 움직이기는 무리가 있었기에, 성벽을 오른 후로는 백인대 단위로 쪼개져 각개 전투를 벌이기 바빴다. 그러니 보리스가 독자적으로 움직였다고 해서 그를 벌하기는 어렵다. 그가 군터의 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할렌 천부장!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의 적도 적이지만, 보리스는 군터의 아들이다. 둘 중 뭐가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겠으나, 군터는 분명히 보리스 때문에 전장의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을 원치 않을 터였다.

할렌의 선택은 절충이었다.

“절반은 이곳에 남아 성벽 위의 적들을 상대한다! 나머지 절반은 나를 따라 적장의 목을 따러 간다!”

말은 적장을 친다 하지만, 그것이 보리스를 찾으러 간다는 뜻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옛!”

* * *

‘이상하군.’

로크가 의문을 가진 것은 성벽 위에 조금씩 늘어나는 제국군도, 아직까지도 잠잠한 유게르 티브리악의 군영도 아니었다.

‘어째서?’

그가 신경을 쓰는 것은 서쪽. 아티아가 맡고 있는 칼페람의 서쪽이었다. 적이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서고 나서도 아직까지 소식 하나 없는 곳.

그 의문이 풀어진 것은 전신에 상처를 입은, 곧 숨을 거둘 것처럼 헐떡이는 한 병사가 장교 둘의 부축을 받으며 오고서였다.

“조금 전에 말했던 그대로 아뢰어라!”

잔뜩 분노한 휘하 장교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로크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강 짐작했다.

“장군! 아티아 장…아니, 아티아가 배반했습니다!”

“…….”

그랬기에 병사가 울부짖기 전부터 표정이 굳었으며, 끝내 짐작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에는 어느 정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놈을 따르는 무리는 적장 군터가 성문 앞에 당도했을 때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성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또한, 아티아 그놈은 지금 장군을 노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로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티아가 어째서 배반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견디기 힘든 상실감에 몸을 떠는 데만도 벅찼다. 피로가 잔뜩 쌓인 몸에 정신까지 흔들리니 똑바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만약, 눈을 감은 직후 아래에서 들린 비명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필시 주저앉았으리라.

“으악!”

“무슨!”

호위를 위해 첨탑 위에 올라 있던 장교와 병사들이 계단 아래쪽을 경계했다.

비명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아티아…….”

“장군. 모두 다 들으신 것 같군요.”

아티아가 피 묻은 검을 털어내며, 그의 병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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