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로크는 적의 움직임이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하게는 적의 후열에 대기하고 있던 적이 전장에 투입된 것을 말이다.
‘또 눈속임인가?’
요 며칠 동안 이런 식의 움직임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양동인 줄 알았는데, 저들은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기만 할 뿐 실제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쪽을 현혹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일까.’
그러기를 바랐다. 기만과 현혹은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 넘어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창칼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적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요 며칠 동안과는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센!”
“예 장군!”
“자네 휘하 병력에 더해 5, 6 예비대를 이끌고 성벽으로 가라!”
“옛!”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한센은 조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로크를 따르는 것은 맹목적이었다. 다만.
“장군. 그렇지만 제 휘하의 호위대는 남겨두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눈 먼 화살이 다시 한 번 날아올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고맙지만, 방패는 하나 뿐인 팔로도 충분히 들 수 있네.”
“으음.”
“이제껏 상대한 적들과는 달라. 줄곧 기회만 엿보던 놈들이다.”
“알고 있습니다.”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성벽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늘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곳에 제 목숨 하나 안 내놓고 싸우는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맞아.”
로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다시 보세.”
“방패. 항시 들고 계십시오.”
“그러지.”
한센이 휘하 병력들과 예비대 두 부대를 이끌고 성벽으로 향했다. 로크는 그 신속함을 보다가, 성벽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란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부족한, 난잡하기 짝이 없는 전장을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적. 그들의 움직임은 이제 막 성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한센과 병사들에 비해 조금도 느리지 않았다.
‘범상치 않은 놈들이다.’
눈속임이 아니다. 적은 확실히, 오늘 칼페람의 성벽을 넘을 작정인 것이다.
“성벽 쪽으로 병사들을 바짝 붙여라! 방패를 이어 세우고 사다리를 올라오는 족족 다 걷어내!”
다행히 요 며칠 동안 계속 이어진 전투로 아군 병사들도 수성전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는 그들도 성벽을 넘으려는 적들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알았다.
“궁수 부대! 지금 성벽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집중 사격하라!”
한센과 병사들을 보내고, 로크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는 한 손으로 방패를 들고서 끊임없이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목에서 피가 끓도록 소리친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빠르게 성벽 쪽으로 접근하던 적의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다. 그리고 그 사이, 한센과 병사들이 성벽에 올라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좋아!’
그를 보고서야 로크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적의 움직임에 최선의 대응으로 맞섰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셈.
‘부탁한다. 한센.’
* * *
“적이 눈치 챘다!”
할렌의 고함은 불필요했다. 갑작스레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 비가 이렇게까지 굵어지면 바보가 아닌 이상 적이 그들을 집중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패 들어! 밀집하라!”
병사들이 안 그래도 좁던 간격을 더욱 좁혔다. 어깨를 맞대고 머리 위로 올린 방패를 이어 붙인다. 한 벌의 갑옷처럼 틈 없이 이어진 방패는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냈다.
“큭!”
“버텨!”
다만 머리 위가 아닌, 다른 쪽에서 간간이 날아오는 화살들은 어쩔 수 없었다. 팔뚝이나 다리 같은 곳에 박히는 화살들은 이를 악 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들은 갑옷이 뚫리고,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명이 쓰러지거나 대열을 이탈하면 굳건한 ‘갑옷’이 한 순간에 망가진다는 것을 잘 아는 탓이다. 또한, 혼자 떨어져나가면 살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 빨리!”
방패 위로 떨어지는 화살들도, 보채는 할렌의 목소리도 모두 짜증스러웠다. 보리스는 커다란 사각방패에서 계속해서 전해지는 충격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젠장.’
앞서 말한 두 가지 보다도, 무엇보다도 짜증나는 것은 그가 빨리 가고 싶다고 해서 빨리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와 보조를 맞추는 병사들이 느려 터졌기에 그의 걸음 역시 기어가는 수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벽이다!”
그보다 조금 앞에 있던 이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보리스는 방패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사다리!”
여러 개의 사다리가 거의 동시에 성벽에 걸쳐졌다. 그것을 보자마자 보리스는 대열을 이탈하며 외쳤다.
“보리스 백인대! 따르라!”
뒤에서 자밀 우슈무르의 목소리가 얼핏 들리는 듯도 했으나, 보리스는 들은 채 만 채하며 가장 먼저 사다리를 올랐다. 방패로 머리를 보호하고, 한 손과 두 다리로 빠르게 사다리를 올랐다. 그런데 그 속도가 엄청났다. 과장 조금 보태어 평지를 달리는 수준이었다.
퉁! 투둥!
방패 위를 때리는 화살들의 힘이 갈수록 강해졌다. 보리스는 그 충격에 몇 번이나 휘청거리면서도 달리듯 사다리를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다리를 밀어내!”
성벽 아래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데 어째 성벽 위의 목소리는 이리도 뚜렷하게 들리는지. 보리스는 적 장교의 것일 것 같은 목소리를 듣고서 위쪽으로 있는 힘껏 방패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단번에 사다리를 달려 올라가며, 동시에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엇?!”
전력으로 사다리를 올라 성벽 위에 닿았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어정쩡하게 손을 뻗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적병이었다.
푸욱!
보리스는 자신을 보며 당황하는 적병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밀려나는 적병에게 몸을 기대다시피 하며 밀고 들어갔다. 당연한 것이지만, 그쪽에는 족히 수십은 되는 적병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죽여!”
그때부터는 정신없는 살육전의 시작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칼. 얼굴에 닿는 적들의 뜨거운 숨결, 살의.
피할 곳 없고, 물러날 곳 없는 협소한 성벽 위에서 쉼 없이 검을 찌르고, 휘둘렀다.
“커윽!”
보리스는 처음 성벽에 올라오자마자 목을 찔렀던 적병을 방패막이로 적절하게 사용했다. 한 손으로 검을 쓰면서도 한 손으로는 피를 토하는 적병의 몸뚱이를 이리저리 밀고 당겨가면서 날아드는 창칼을 막아냈다.
서걱!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런다고 해서 모든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팔이며 다리, 심지어는 방패로 쓰는 몸뚱이를 뚫고 찔러오는 통에 복부에 창상을 입기도 했다. 튼튼한 갑옷이 아니었다면 진작 몸에 바람구멍이 나 쓰러졌으리라.
“허억…허억…….”
보리스가 사다리를 달려 올라와 성벽 위에서 사투를 벌인 것은 당사자에게는 말 못하게 긴 시간이었으나, 사실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허나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라도, 파헨델의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보리스 백인대 병사들의 경우, 보리스가 먼저 성벽에 올라가 시간을 벌어준 탓에 별 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신속하게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다.
“쓸어버려!”
휘하 병사들이 올라오면서 보리스는 한숨 돌렸다. 그는 요긴하게 쓴 적병의 시신을 내던지고서,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에 잠깐 휴식을 주었다.
‘두 번 할 짓은 못 되는군.’
위험한 짓이었다. 정말로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다.
‘어찌 됐든 죽지 않았지만.’
아마 이 전투가 끝나고 나면 꽤나 잔소리를 듣지 않을까 싶었다. 할렌부터 시작해서 자밀, 수하 십부장들까지.
‘하지만…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서도 창을 찔러오는 적병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목이 베인 적병은 피를 쏟아내며 허물어졌다.
‘로크. 그놈의 목을 벤다.’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목표다. 이 손으로 반란군 수괴의 목을 친다면 유게르 티브리악도, 부친도 자신의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터.
활활 타오르는 눈을 하고서, 보리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로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기어이 올라왔군.’
막기 위해 한센과 예비대를 보냈지만, 적이 성벽 위에 오르는 것 자체를 저지하기는 힘들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래도 최대한 늦출 수 있기를 바랐지만, 적의 움직임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날랬다. 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혀를 찰 정도로.
‘정예다. 파헨델의 병사들이겠지.’
아마도 적이 마지막까지 숨겨놓았을 한 수일 터.
‘그렇다는 건…다른 쪽도 마찬가지란 뜻이겠지.’
적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허나 저 깃발이 위장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했던 바이니, 아마 군터도 다른 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대장기는 움직이지 않아.’
적기와 함께 나란히 휘날리는 티브리악의 깃발. 저것도 위장일까? 로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직접 전투에 나설 성격이 아니다.’
이제껏 봐온 바를 토대로 내린 판단이다. 그는 깃발이 휘날리는 저곳에 있을 것이다.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는 칼페람을 보며 흐뭇해 하고 있지 않을까.
‘안심했겠지.’
성벽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터지고, 피가 흐르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넓게 번져가고 있다. 그것을 유게르 티브리악도 보고 있을 터였다.
‘지금이다.’
로크는 마음을 먹었다. 지금이 적기다. 더 기다리면 보다 위협적으로 찌를 수 있겠지만, 칼페람이 위험해진다.
“봉화를 올려라!”
“옛!”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칼페람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연기였다.
“신호다!”
칼페람 공성전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도시 밖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일단의 병력. 제국군이 당도하고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그들은 칼페람에서 피어오른 회색 연기를 놓치지 않았다. 오직 그 하나만을 기다리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신호를 포착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목을 치는 거다!”
열흘이 넘도록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불도 피우지 못하며 마른 고기와 풀 따위로 배를 채웠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이 한 순간을 위해서였다.
히히힝!
그 오랜 기다림을 참았던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말들 역시 마찬가지. 간만에 힘껏 달릴 수 있게 된 말들이 잔뜩 흥분해서 땅을 박찼다.
* * *
“음?”
칼페람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던 유게르 티브리악은 묘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후방에서 이는 먼지구름을 본 것은, 다급하게 달려온 휘하 장교가 배후에 나타난 적에 대해 고하고나서였다.
“기병? 매복을 해놨던 건가.”
언제부터? 라는 생각과 함께 헛웃음이 나왔다.
“장군! 일단 몸을 피하시지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담은 목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마음에 든 것은 두 번째 목소리였다.
“막을 수 있겠나?”
“손쉬운 일입니다.”
모레인 티브리악이 조용히 답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