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장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래. 이쪽도 시작하지.”
군터는 할렌의 말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투석기가 움직임을 멈추고, 명령만 기다리던 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전진했다.
“이번에는 성벽을 넘는 겁니까?”
할렌이 물음에, 군터는 화살을 쏴대기 시작하는 성벽 위의 적들을 보았다.
“글쎄.”
포위를 마치고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한지 오늘로 벌써 엿새째. 적의 저항은 여전히 완강하다. 처음에 비하면 기세가 죽기는 했지만, 그건 아군도 마찬가지. 적도 아군도 지쳤다. 다만 적은 죽음을 각오했고, 그런 마음가짐의 차이는 양측의 체력이 서서히 떨어져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났다. 성벽으로 다가가는 아군 병사들의 걸음은 첫날처럼 힘이 실리지 않는다.
‘오늘 성벽을 넘는다 한들,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물론 군터는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공격에 참여한다면 날이 저물기 전에 성벽을 넘을 자신이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기에 그러지 않을 뿐.
‘어차피 피를 보는 건 그쪽이니.’
그러고 보면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는 로크의 역량도 인정할 만했다. 아무리 유게르 티브리악이 시간을 끌고 있다고는 하나, 로크가 능력이 없었다면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는 녀석이었지.’
예전, 십인장이었던 시절. 로크의 병사들은 로크를 잘 따랐다. 단순히 상관으로서 따르는 것 이상이었다. 그때는 그저 부하들을 잘 챙기니 잘 따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로크에게는 확실히 남다른 기질이 있었다. 사람을 이끄는 힘이.
다만 부하들을 잘 부리는 것과 전투를 잘 수행하는 것은 별개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군재의 영역에 들어가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로크는 군재도 꽤나 괜찮은 편이다. 반란군의 수장으로서 여기까지 전쟁을 이끌어왔고, 지금도 전투를 그럭저럭 잘 이어가고 있었으니.
‘장군으로서는, 녀석이 나보다 나을지도 모르겠군.’
군터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자신에게 뛰어난 군재는 없었다. 다만 초인적인 무력으로 적의 사기를 꺾을 줄 알며, 군기를 감지하는 감각으로 전황을 보다 빠르게 파악할 뿐. 살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기본적인 군재는 잘 쳐줘봐야 평균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길이 엇갈렸군.’
특별히 로크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재주를 지녔어도 제대로 된 기회를, 길을 찾는 이들은 흔치 않다. 그러니 로크의 처지가 딱하거나 하지는 않다. 다만,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십 여 년 전, 로크가 팔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부질없는 가정.’
알고 있다. 쓸 데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무료함 때문이다.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노라면, 달리 할 일도 없다. ‘신호’가 올라온다면 당장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하겠으나, 그게 아닌 이상 그는 움직일 수 없다.
“장군. 허면 소관은 슬슬 움직여보겠습니다.”
할렌이 군례를 취하고 물러갔다. 그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할렌이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도 벌써 며칠 째던가.
‘속임수가 아니라면, 어지간히 겁이 많은 녀석인 모양이군.’
군터는 말의 고삐에서 손을 놓고서,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칼페람의 성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 *
“장군! 남쪽에서 지원 요청입니다!”
“예…쿨럭! 예비대를 보내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억지로 악을 지르니 기침이 터지고 비릿한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오래 버텼지.’
벌써 며칠째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으니,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서쪽은? 괜찮은가?”
“예. 아직까지 별다른 신호는 없습니다. 아티아 장군이 잘 막아서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성문을 내주기 전에 자신의 목부터 내주겠다며 각오를 드러냈던 아티아다. 그런 대장의 결의가 병사들에게도 전해졌는지, 그가 맡고 있는 서쪽은 현재까지 제국군에 맞서 가장 잘 버티고 있었다.
‘다른 쪽도 마찬가지지.’
다들 잘 싸우고 있다. 아니, 잘 버티고 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가 온전히 그들의 분투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속셈이지.’
생각했던 것보다 적의 공세가 느슨했다. 매일 쉬지 않고 공격을 해오기는 하지만, 끝을 보겠다는 듯이 맹렬히 덤벼오지는 않았다. 적당한 때에 북을 울리고, 그러면 망설임도 없이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벌써 며칠째 공성전이 계속 되고 있음에도 적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시간을 끌 생각은 없어 보였는데.’
시간을 끌어 고사시키려는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칼페람을 포위할 필요도, 포위를 마치고서 곧바로 공격을 가해올 필요도 없었다. 로크는 ‘지원자’가 언질을 주었던 대로, 유게르 티브리악이 시간에 쫓기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때문에 빠르게 승부를 보려고 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요 며칠 동안의 움직임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어중간하다. 공격을 할 것이면 확실히 하고, 안 하려면 말 것이지. 변죽만 올리는 것 같은 이런 식의 운용은 뭐란 말인가.
‘우리를 지치게 할 생각인가?’
의심이 가는 것은 그 한 가지 밖에 없다. 공격의 주도권은 저쪽에 있고, 성벽 안에 갇힌 이쪽은 저쪽의 움직임에 이끌려 가야하는 처지다. 그러니 저쪽이 이쪽의 힘을 뺄 작정으로 이리 나오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거라면, 머지않았겠지.’
병사들은 지쳤다. 첨탑 위에서 소리만 지르는 자신보다 훨씬 더 지쳤으리라. 한 것이라고는 입을 놀린 것밖에 없는 자신도 이렇게 녹초가 되었는데, 직접 전투를 치른 병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전투 경험을 꽤나 쌓은 병사들은 어느 정도 버티고 있지만, 신병이나 다름없는 병사들은 이미 한계일 것이다.
첨탑 위에서도 보이는 것을 성벽 아래라고 보지 못하겠는가. 유게르 티브리악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는 이제 곧 그 ‘때’를 포착할 터.
와아아아!
제국군의 함성. 그 소리에 로크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고개를 돌렸을 때 점 하나가 보이고,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튼 것은 우연이었다.
쒜엑!
순간적으로 보였던 점 하나가 화살이었다는 것은, 화살이 어깨를 스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이 거리를?’
화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성벽 위에 우뚝 솟은 첨탑이다. 그 꼭대기에 서 있는데, 저 아래에서 쏜 화살이 닿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무리 비상식적인 일이 판을 치는 곳이 전장이라고 해도, 이게 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두고 가능, 불가능을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
“장군!”
로크는 방패를 들고 자신을 감싸는 병사들 사이에서, 화살이 날아든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 *
“쳇!”
보리스가 혀를 찼다.
“자네. 대체 뭘 한 건가?”
“한 번 노려봤지. 하지만 역시 모자라는군.”
자밀 우슈무르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활을 들더니 하늘에다 대고 화살 한 발을 쏜 게 전부였다. 그런데 노리긴 뭘 노렸단 말인가? 하늘을 날아가던 새 한 마리?
‘모자랐어.’
첨탑 위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던 자. 꽤나 지위가 있어 보이기에 욕심을 한 번 부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힘이 모자랐다. 잘 뻗어나가던 화살이 끝에 가서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릿느릿해져버린 것이다.
‘아버지였다면…놓치지 않으셨겠지.’
인간 같지 않은 부친과의 비교는 언제나 속 쓰림을 동반한다. 이제는 받아들일 때도 되었건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부모를 넘어서고 싶은 것이 자식의 본능이라서일까.
“신호다!”
실망감을 애써 지우고 있던 보리스는 할렌의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어차피 요 며칠 동안 계속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괜히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만 하다가 끝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부장들은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곧 성벽을 넘는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말에, 보리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할렌을 보았다. 어제와, 엊그제와 달리 상기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할렌 천부장! 정말로…….”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타박하는 노성조차 즐겁게 들렸다. 보리스는 즉시 휘하의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 * *
‘왔군.’
유게르 티브리악의 신호가 올라왔다. 그것을 본 군터는 한참동안 놓았던 말의 고삐를 다시 쥐었다.
지독할 정도로 늑장을 부리던 놈이 드디어 기회를 잡았거나,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내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겠다.”
“옛!”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하나, 나름대로 눈치를 채고 있던 수하들은 별다른 명을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이제껏 전투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파헨델의 병사들이 군터의 주변으로 집결했다. 군터는 그들을 거느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칼페람의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
군터는 간간이 날아드는 눈 먼 화살들을 창으로 쳐내면서 이틀 전에 유게르 티브리악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신호는?”
“아직이오.”
“믿을 수 있는 건가?”
유게르 티브리악이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어째서?”
“멍청한 놈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야심도 있는 것 같고. 이전에 지껄인 소리들을 보면 말이오.”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놈이 준 정보는 이제껏 틀린 것이 없었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기대는 해봄직 하지.”
그 말이 맞았다.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와아아아아!
유게르 티브리악의 병사들은 여전히 요란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군터가 나아가는 방향으로는 저절로 길이 열렸다. 장교들이, 병사들이 의식적으로 길을 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풀들이 눕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군터 장군!”
그를 알아본 몇몇 장교들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 외침은 전염병처럼 퍼져, 곧 모든 제국군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와아아아!”
“군터 장군이다!”
“파헨델의 군대다!”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사실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이제껏 가만히 자리만 지키던 군터와 파헨델의 병사들 때문에 슬슬 안 좋은 이야기가 퍼지던 시점이었다. 그러던 차에 군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니 환호가 나올 밖에.
그그그그긍!
“엇?!”
제국군의 환호가 다 끝나기도 전에 칼페람의 성문이 열렸다. 환호가 당황의 목소리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함정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오직 군터만이 당황하지 않고 계속 말을 몰았다. 파헨델의 병사들 역시 당황한 와중에도 충실히 상관의 뒤를 따랐다.
“군터 장군! 성문을 열어 항복의 뜻을 밝히니, 받아주십시오!”
활짝 열린 성문 너머에는 일단의 무리가 무기를 내려놓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군터는 그 중 선두에 있는 자를 보며 물었다.
“네놈이 아티아냐?”
“아닙니다.”
“놈은 어디에 있지?”
“아티아 장군은 로크의 목을 바치기 위해 따로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였습니다!”
무릎을 꿇은 와중에도 장군이라니. 그 우스운 호칭이 귀에 거슬리기는 했으나, 군터는 그보다 그 뒤에 이어진 말에 집중했다.
‘로크의 목이라.’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확실히 욕심이 있는 놈인 것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