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할렌 천부장! 아직입니까?”
“아직이다! 기다려!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자리를 지켜라!”
보리스는 할렌의 고함을 듣고 이를 악 물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여전하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이미 저 성벽 아래까지 달려간 것처럼 바쁘게 뛰고 있었다.
“방패 들어! 진군하라!”
전투는 이미 시작됐다. 얼마간 쉼 없이 투석 공격을 퍼부은 이후, 곧장 진군 명령이 떨어졌다. 보리스가 속해 있는 할렌 천인대와 아드리안 천인대, 그리고 또 몇몇 부대들을 제외하고는 칼페람의 성벽을 향해 착실히 다가가는 중이었다.
“들어라! 우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대기한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말이다. 이미 장교들은 물론이고, 말단 병사들까지 모르는 이가 없다. 전투가 시작되면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고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성벽을 넘는다는 것.
그들은 언제 떨어질지 모를 명령을 기다리며 자꾸만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보리스도 그 중 하나였다.
“진정하게. 지휘관이 흥분해서 어쩌자는 게야.”
자밀 우슈무르가 그에게 다가와 한 마디를 건넸다. 그러자 보리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라. 흥분 때문에 실수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의욕 있는 것도 좋지만, 적당한 것이 제일 좋아.”
“그래그래. 나도 알고 있다.”
본래 보리스와 자밀 우슈무르는 파헨델에 남을 처지였다. 그랬던 것을 보리스가 강하게 주장하여 참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은 군인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보리스는 특히 그게 더 심했다. 일전에 있었던 베이고르와의 전쟁 이후, 그의 공명심은 더욱 커졌다. 막연히 달콤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한 번 제대로 맛 보고 나니 거기에 아주 푹 빠져버린 것이다.
“실수는 하지 않아. 충분히 조심하고 있어. 허나 두고 보게. 로크라는 놈의 수급은 내 차지가 될 테니.”
‘바로 그런 점이 걱정이란 말이네.’
자밀 우슈무르는 여전히 걱정스러웠으나, 더 말하지는 않았다. 한 마디는 조언이 될 수 있으나, 두 마디는 참견이다. 이미 조언을 했으니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보리스의 몫이다.
‘보리스가 날뛰려 해도 할렌 천부장이 알아서 제어하겠지.’
사석에서는 공자 대우를 하는 할렌이었지만 공적으로는 칼 같았다. 보리스도 그런 할렌을 가벼이 대하지 않았다. 할렌이 그의 직속상관이기도 했으며, 부친의 손발과 같은 심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리스는 할렌을 믿고 의지했지만, 동시에 그가 부친의 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자밀 우슈무르는 틀림없이 할렌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하고 있을 거라며 쓴웃음을 짓던 보리스를 기억했다.
“좋아! 움직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진 명령이 떨어진 것은 공성추가 칼페람의 성문을 두들기고, 성벽에 수십 개의 사다리가 걸리며 본격적인 공성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할렌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몇몇 부대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장군!”
로크는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성벽의 첨탑 위에 서서 성벽을 내려다보며 지시를 내리기에 바빴다.
“서쪽에 병사를 더 보내! 몇 안 되는 적에 수십 배나 되는 인원이 몰리면 어떻게 하나! 저 사다리들부터 밀어내란 말이다!”
“장군!”
공성전이, 수성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대규모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때문에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장교들조차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눈앞의 싸움에만 급급해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 선 로크의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보였다. 때문에 그는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연신 고함을 질러댔다.
“장군!”
그런 그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를 불러대던 장교가 어쩔 수 없이 그를 붙잡고 흔들어 댔을 때였다. 감히 상관의 몸에 멋대로 손을 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로크는 그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적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적들이 움직인다? 애매한 말이다. 척 듣고서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무슨 뜻이지?!”
“적의 후군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뒤쪽에 남아있던 적의 병력이 북쪽으로 움직인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쪽의 시선을 동쪽에 묶어두고, 북쪽을 치겠다는 건가.’
정석적인 전술 중 하나다. 한 쪽을 치는 척하면서 적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실제로는 다른 쪽을 치는 것. 정석적인 전술인 만큼, 당연히 로크도 적이 이리 나올 것을 예상했었다.
“제 3 예비대를 북쪽 성벽으로 보내라! 화살과 기름도 같이!”
“옛!”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정확히는 예상했던 것들 중 하나가 들어맞았다. 적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안도해야 할 일일 텐데, 로크는 조금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전황은 나쁘지 않다. 한 마디로 치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이 넘는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지만, 적들도 꾸준히 피를 흘리고 있다. 패배와 죽음을 각오하고 벌이는 싸움의 목적은 지금도 충실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좀처럼 가시지 않는 이 불안과 초조는.
‘설마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확신을 가지기란 어렵다. 특히 짊어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이 많을수록 믿음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한 점 의심 없는 확신이라면 더더욱.
의심은 당연하다. 불안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를 넘어선다면, 마치 등 뒤에서 사나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감각이라면 한 번쯤은 뒤돌아보는 것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
“아티아 장군에게서 소식은 없나!”
“아직 없습니다!”
아티아는 서쪽의 방비를 담당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에게서 사람이 올 터. 소식이 없다는 것은 아직까지 버틸만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나쁘지 않다. 모든 것이.
“기름을 퍼 부어라! 공성추에 불을 붙여!”
전후로 흔들리며 성문을 때려대는 공성추에 기름이 부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날아든 여러 대의 불화살. 공성추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그를 움직이던 병사들 역시 불벼락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성문을 부술 듯 두들기던 나무 기둥이 멈춘 것은 물론이다.
“적들이 공성추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 화살을 쏴라! 계속 쏴!”
로크는 막연한 불안보다는 눈앞에 실재하는 위협에 집중했다. 불타오르는 공성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뒷목을 긁어내리던 불쾌한 감각은 어느새 잊어버리고서.
* * *
“저놈들…….”
유게르 티브리악은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보며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뒤가 없는 놈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첫날부터 저렇게 죽기 살기로 싸워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오늘만 싸우고 말 생각인가?’
아군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 비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불타오르는 공성추에 다시 쏟아지는 기름은 또 어떤가. 허술하게 선 성벽 위의 적병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반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반나절만 전투를 지속해도 성벽 위의 적을 반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만큼 아군의 피해 역시 불어나겠지만.
“피해를 줄이는데 조금 더 신경 쓰라고 전해라! 어차피 성문을 깰 수 없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옛!”
지금 동문을 두들기고 있는 부대는 주공(主攻)이 아니다. 본인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저렇게 무리를 하는 것은, 역시 공을 세워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일 것이다.
‘어리석은 놈들.’
심정은 이해 하지만, 용납은 할 수 없다. 넘치는 의욕을 결과로 보였다면 당연히 치하하겠으나, 저들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시선은 제대로 끌었군.’
어쩌다보니 본연의 임무에는 충실한 셈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펠트에게서는?”
“아직입니다.”
“느리군.”
과한 의욕과 조급함은 저 동문에서 고투를 벌이고 있는 장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해야지.’
느린 것은 아군이지만, 또한 적이기도 하다. 적이 빠르게 반응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하루 만에 저 성벽을 넘어선다는 건 역시 과욕이겠지.’
하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피로 쌓은 승리는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장군. 날이 밝아옵니다.”
“그렇군.”
어두운 새벽에 시작된 전투였다. 그런데 어느새 해가 완전히 고개를 들려 하고 있었다. 전장의 함성은 여전히 우렁차게 울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처음보다는 힘이 빠진 느낌이었고.
“펠트에게서 신호가 오면 곧바로 회군의 북을 쳐라.”
“옛.”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그에 티브리악은 곧장 회군 명령을 내렸고, 그것으로 첫 전투는 막을 내렸다.
* * *
“이해할 수 없군.”
첫 전투. 어쩌면 승리를 거뒀다 봐도 무방했지만 로크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피로를 핑계로 홀로 방에 남아 생각에 잠긴 그는 오늘 새벽의 전투를 천천히 복기해 보았다.
‘공격이 거세긴 했지. 속임수는 아니었다.’
적의 공세는 맹렬했다. 필사적으로 버티지 않았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만큼. 만약 적이 거기서 수작을 부릴 만한 여유가 있었다면, 차라리 그 힘까지 더해 성문을 돌파했으리라.
‘하지만…너무 순순히 물러난 것 같은데.’
전투가 지속되면서 적의 기세는 줄어들었다. 그 상황에서 계속 밀어붙였다면, 끝내 성문을 뚫거나 성벽을 넘었을지도 모르지만 피해는 커졌을 것이다.
‘무리는 하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서라도 피해를 줄이며 천천히 공략하겠다 이건가.’
이제껏 봐온 유게르 티브리악의 성향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듯한 추측이다. 그러나 로크는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적이 공세를 멈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적의 병력은 어느 정도 균등하게 나뉘어 있다. 새벽의 전투를 돌이켜보면 주공은 동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투가 진행되던 와중에 일부 병력이 은밀히 북쪽으로 이동했었지.’
그 때문에 예비대를 북벽으로 이동시키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는 쓸데없는 일이 되었지만, 수상한 시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군터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곳은 동쪽이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틀림없이 온다.’
확신했다. 군터와 그가 이끄는 파헨델의 병력은 제국군이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이다. 그들이 움직이는 때가 비로소 적이 전력으로 칼페람을 무너뜨리려 하는 순간일 것이다.
‘예비대의 수를 늘리는 수밖에 없나.’
로크의 고민이 깊어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