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536화 (536/1,064)

536화

“그나저나, 이거 참 놀라운데.”

“무엇이?”

“얼굴. 네 얼굴 말이야. 더 험상궂어지긴 했는데, 거의 늙지 않았어. 아니, 그냥 그때 그대로인데?”

농담인가 싶었지만 놀라는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래. 그런 말도 했었지.’

그가 신을 품었다는 것을 안 7황자가 이런 말을 했었다. 이제 그는 범인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노화를 겪지 않거나, 아주 천천히 겪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신과 완전히 동화를 이루게 된다면 불노불사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도 했었다. 그때는 별로 크게 생각지 않았지만, 지금 로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젊었을 적에는 지독한 노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일찍 늙은 얼굴이 이제 제 나이를 찾아가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군터는 굳이 시시콜콜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계속 버틸 생각인 것 같군.”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럴 생각이다.”

로크의 각오는 굳건하다. 설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되도록 죽이지 않는 쪽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힘들겠군.’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다. 정확히는 친구였던 녀석이지만, 얼굴을 보고 나면 이런저런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다 늙은 얼굴을 보고 있어도 특별히 어떤 감정이 들지도 않고.

그래서 슬슬 일어나려는데, 로크가 그에게 툭하고 물었다.

“잘 지내냐?”

“…….”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로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물었다.

“뭘 그렇게 보냐? 잘 지내냐고? 이게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나?”

“아니.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냐니. 말 그대로지. 잘 지내느냐고.”

“잘 지낸다는 건, 어떻게 지내야 잘 지내는 거지?”

“음? 그야…행복하면 잘 지내는 거겠지.”

행복. 행복이라.

군터는 잠시 그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그런 말을 떠올려 본지가 너무 오래 되어 낯설었다. 행복하냐고? 모른다. 예전에는 알았지만, 지금은 눈앞의 로크처럼 그저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모르겠군.”

“음? 너무 건조한 거 아닌가?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별로 행복하지는 않은가 보구만. 예전에 그렇게도 바라던 자리였잖아? 지금 그 자리.”

“…그렇지.”

처음으로, 그의 메마른 마음이 흔들렸다. 로크의 가벼운 말 몇 마디는 군터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군터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바로 그 고민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면 할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구만.”

“동감이다.”

“우리의 상황 때문이겠지. 서로 무기가 아니라 술잔을 들고 만났더라면 할 이야기가 많았을 거야. 몇 날 며칠을 지새워도 부족했겠지.”

“…….”

쓸쓸해 보이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쓸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목을 취할 생각에 몰두하게 되겠지.”

“당연히.”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해봤다. 그때, 내가 팔을 잃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난 계속 군에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너와 함께 움직였을지도 모르지.”

그랬을 수도 있다.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후회하나?”

“아니.”

대답은 단호했다.

“내 삶이 그렇게 흘렀을 뿐이야. 그 속에서 발버둥 친 결과가 이것이고. 지난 세월을 원망하면 원망했지, 내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하냐고? 그런 물음은 나에 대한 모욕이야.”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알아. 그냥 주의해달라는 거지.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만.”

“…….”

“군터. 말했듯,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우린 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지.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있다.”

“부탁?”

“내가 죽으면, 날 고향에 묻어줘. 물론 유게르 티브리악이 내 목을 탐할 테니 멀쩡히 묻힐 수는 없겠지. 한 줌 뼛가루만이라도 좋아. 고향 마을…이제는 다 무너지고 타서 잘해봐야 폐허나 조금 남았겠지만, 그곳에 묻어다오.”

“…그래. 그러지.”

“고맙다.”

로크가 먼저 일어섰다. 할 이야기는 다 했다는 듯.

“죽지 않게 조심해라. 네가 죽어버리면 날 묻어줄 사람이 없어지잖아?”

아주 약간, 웃음기 묻어나는 한 마디를 남기고서 로크는 떠났다.

홀로 남은 자리.

군터는 멀어져 가는 로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 * *

유게르 티브리악이 이끄는 본군이 당도했다.

“상당히 조심스럽군. 아무래도 놈들은 아군의 위세에 눌린 것 같소.”

그는 성문을 닫아 걸고 꼼짝 않고 있는 적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군터는 그의 말에 일부 동의했다. 적이 조심스러운 것은 맞았다. 5만이 넘는 대군이면서 5천이 조금 넘는 선발대를 치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단단히 웅크렸다는 거겠지.”

“그런 것 같소. 쯧! 저런 적은 시간을 두고 말려 죽이는 것이 상책일 터인데, 사정이 따라주지 않아 그리 할 수가 없는 것이 아쉽구려.”

칼페람이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5만이나 되는 병력을 수용할 정도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저 도시 안에 얼마나 많은 군량이 비축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만 포위를 유지해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성벽 위의 적보다는 성벽 아래의 적과 싸우기가 편한 것이 당연하다. 적을 그렇게 만들 수 있지만, 유게르 티브리악의 말처럼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

“투석기와 충차, 사다리. 공성에 필요한 병기들은 충분히 준비했소. 병사들에게 하루 정도 휴식을 준 뒤에 즉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합시다.”

본군이 괜히 늦게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칼페람에서 웅크린 적이 완강하게 버틸 것을 생각하여 공성을 위한 준비를 단단히 해왔다.

“뜻대로 하시오.”

“직접 전투에 나서시겠소?”

“이제껏 그러지 않은 적은 없었소.”

유게르 티브리악이 그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군.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오만. 그, 사령술은 되도록 자제해 주시오”

“여유가 있나 보군.”

“내 승리에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도 남지 않기를 바라오.”

“원하는 대로 하지.”

“고맙소.”

예전의 그였다면 하지 않았을 말이다. 지금도 사실 별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 예를 표하기에, 유게르 티브리악은 너무도 고귀한 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군터에게 부탁을 하고, 고맙다고 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군터에게 자연스럽게 예의를 갖췄다. 그래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이, 그저 자연스레 그리 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그런 변화를 알아차렸음에도 그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협력자이며, 티브리악의 은인이다.’

그렇게 스스로 이유를 대고, 납득했다.

* * *

쾅!

새벽의 정적을 깬 것은 천둥 같은 굉음이었다. 칼페람의 동쪽 성벽에서부터 시작된 굉음은 곧 나머지 세 방향에서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작된 건가.’

로크는 옆에 세워두었던 검을 쥐고 방을 나섰다. 눈을 붙이기 전에 갑옷을 입어두었기에 따로 준비를 할 것도 없었다.

“장군! 적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아직까지는 투석기로 돌만 쏴대고 있습니다만, 이제 곧…….”

“흔들릴 필요 없다. 예상했던 것 아닌가.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야.”

흥분. 불안. 무엇이든 로크는 이해했다. 그의 가슴 역시 빠르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대단한 각오를 다졌든 몸은, 감정은 솔직하다. 사방에서 천둥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는데 불안하고 초조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후회 없이. 마지막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한 말을 다시 한 번 들려주었다. 흔들리던 수하의 눈이 안정을 찾았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니네.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

“각자 위치로 이동했습니다. 지휘부에는 아티아 장군과 몇몇 분만이 계십니다.”

“일단 그리로 가지.”

지휘부는 소란스러웠다.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뛰어들어온 병사들이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 뛰어나가고, ‘장군’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런 병사들에게 악을 써대며 명령을 내렸다.

“장군! 오셨습니까!”

“늦었군. 미안하네.”

“어인 말씀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신 것 같습니다만.”

“아니야. 충분히 눈을 붙였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로크가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여 일전을 앞두고 강권하다시피 하여 쉬게 한 것이었는데, 적이 해가 뜨기도 전에 공격을 개시할 줄은 몰랐다.

“빌어먹을 놈들. 해가 뜰 때까지 쏴대려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야.”

“예?”

“쏴댈 돌이 충분하지 않을 테니까. 또한 어느 정도 돌을 쌓아놨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쏴대면 금방 동이 날 걸세.”

“허면…….”

“기를 꺾어놓으려는 수작이겠지. 곧 밀고 들어올 걸세.”

로크의 추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투석 세례가 잠잠해질 즈음, 도시 밖의 제국군은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포위를 좁혀왔다.

“적의 수는 우리보다 적다! 필시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하여 성벽을 넘으려 할 터! 적의 움직임에 휘둘리지 말고 예비대는 언제든 신호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라!”

병력의 수만 보면 공과 수가 바뀐 꼴이다. 그러나 수성을 하는 이쪽도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칼페람이 아무리 튼튼한 성벽을 갖고 있다 해도 그 위에 올라설 수 있는 병력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제국군이 한 점에 집중해 밀고 들어온다면 허무하게 성벽을 내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득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조건 수적 우위를 이용해야 한다.’

두 명이 죽어 한 명을, 아니 네 명이 죽어 한 명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좋다. 지휘관으로서 할 생각은 아니나, 이것은 칼페람에서 싸우고 있는 장정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장군! 신호를 보내시지요!”

아티아가 말했다. 그가 말하는 ‘신호’는 몰려오는 적들에게 활을 쏘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한 수를 지금 쓰라는 것이었다.

“아니. 아직이다.”

로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평소의 유한 모습과는 달리, 깊게 가라앉은 눈에다 서늘함까지 감도는 무표정에 아티아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조급해하지 말게.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니.”

크지도, 힘이 있지도 않았으나 믿음을 주는 목소리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