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마중을 나올까 싶었는데, 꿈쩍도 안 하는군요. 죄다 겁쟁이들만 모였나 봅니다. 아니면 주제파악이 빠르던지요.”
할렌의 말을 아드리안이 코웃음 치며 받았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다. 주제파악이 되는 놈들이었다면 애당초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장군?”
“…….”
군터는 말없이 멀찍이 보이는 칼페람의 성벽을 보았다. 아무런 깃발도 걸려 있지 않은 성벽 위에는 복색의 통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병사들이 엉성하게 지키고 서 있었다.
“5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한숨이 나왔습니다만, 직접 보니 함락시키는 것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
답이 돌아오지 않자 살짝 멋쩍어졌는지, 아드리안이 말을 돌렸다. 그에 이번에는 군터도 답을 해주었다.
“그런 것 같군.”
칼페람의 성벽은 그럭저럭 튼튼해 보였다. 성문 역시 견고한 듯했고. 허나 저 도시에서 느껴지는 군기는 별 볼일 없었다. 당장 성벽 위에 선 병사들만 해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이들은 볼 수 없어도, 군터의 눈에는 그들의 두려움이 똑똑히 보였다.
“사자를 보내라.”
“옛?”
수하들의 휘둥그래진 눈을 무시하고, 군터는 한창 지어지고 있는 군영으로 몸을 돌렸다.
* * *
로크는 자신을 토어릭이라 소개한 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군터가 보냈다는 이 자는 그 흔한 서신 한 장 없이 몸만 덩그러니 와 그에게 군터의 전언이라는 것을 전했다.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그것이 쉬이 믿기지가 않는 것이라 로크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그가 그리 말했다고?”
로크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 대신 ‘군터’라고 이름을 말하고 싶었으나, 함께 있는 수하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표현을 달리했다.
“그렇다.”
“기껏해야 남의 말이나 전하는 놈 주제에 건방지구나!”
아티아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들 것 같은 얼굴로 토어릭을 노려보다가 휙 하고 로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따위 헛소리를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장군! 명만 내려주십시오! 당장 이 칼로 저놈의 목을 쳐, 군터라는 놈에게 우리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겠습니다!”
아티아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토어릭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무식한 놈이 저열하기까지 하군.”
“뭐라!”
아티아의 손이 칼 손잡이로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어릭은 지루해 보이는 얼굴로 신랄하게 독설을 퍼부었다.
“네놈의 말대로, 나는 장군의 말씀을 전하러 여기 왔다. 호위병 열 명과 말이지.”
그는 칼 손잡이에 올라간 아티아의 손을 슬쩍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내 목을 베겠다고? 그래. 베어라. 나와 함께 온 병사들의 목도 베어라. 수만이 있는 곳에 온 열 하나의 목. 꽤나 자랑스럽겠군 그래. 음. 네놈들의 수준에 딱 맞는 전리품이겠어. 우리 장군께서도 가볍게 웃어주긴 하실 것이다.”
“이놈이……!”
아티아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기어이 칼을 뽑기 전, 로크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게.”
“장군.”
“저 자의 말이 틀린 것이 없네. 여기서 저들의 목을 벤다 하여 우리가 얻을 것이 무엇이겠나? 저런 담대한 자를 벤다면 우리는 적의 인정은커녕, 비웃음만 사게 될 터.”
“그래도 대장이라고, 그대는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는군.”
“무의미한 도발은 그쯤 하지. 군터라는 자가 자네더러 이곳에서 죽으라 보낸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내일이다. 해가 서쪽 산의 중턱에 걸릴 즈음.”
“…….”
“호위병력은 얼마나 데려와도 상관 없다. 허나 우리 장군께서는 휘하 기병 오십 기만을 대동하고 나오실 것이다. 그대의 배짱이 어느 정도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군.”
그렇게 제 할 말만 다 하고서, 토어릭은 거침없이 몸을 돌렸다. 그를 막아 세우려는 이들이 있었지만, 로크는 그들을 다 물러나게 했다.
그렇게 토어릭이 돌아간 후.
“장군! 설마 저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응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절대 아니 됩니다. 분명 적의 함정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가신다면 틀림없이 해를 입으실 겁니다.”
로크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반대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로크는 그들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정신 없이 쏟아지던 목소리들이 가라앉았다.
“자네들의 생각은 충분히 알겠네. 그러니 이제 내 생각을 말하지. 내가 보기에는, 전혀 나쁜 제안 같지 않아.”
“그게 무슨…….”
“함정일 수도 있겠지. 나는 오히려 그러길 바라네.”
모든 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
설명을 바라는 그들을 둘러보며, 로크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내 자랑 같아 이런 말을 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함정에 빠져 해를 당한다면 아군은 분노할 터. 결국 더욱 강하게 단결할 수 있을 것이네.”
“장군. 그것은.”
“자네들이 날 어찌 보는지 모르겠지만, 난 나 자신을 안다네. 난 결코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나 하나 없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가 꺾일 것이라 생각지 않아.”
장내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뭐라 말하고 싶은 이들이 많았지만, 이따금씩 그들에게 향하는 로크의 시선이 그들로 하여금 입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궁금하다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군터라는 자. 소문은 무성하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없지 않나. 카베르 장군이 보았지만, 그는 먼저 떠났지. 하여 난 그가 어떤 자인지 보고 싶다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로크는 그리 말하고서, 아직 납득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불안해 하는 이유를 알고, 이해하네. 허나 날 믿어주게. 이제껏 그래 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복수를 부탁하지.”
* * *
“올 거라 보십니까?”
할렌이 물었다.
“올 거다.”
“어찌 그리 장담하십니까?”
“오고 있으니까.”
“예?”
보지 않아도 할렌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과, 곧 칼페람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칼페람 쪽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 땅에 들어온 이후로, 그의 감각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제는 이것을 감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나쁠 것은 없지.’
이유는 찾아야겠지만, 이런 능력이 생겼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이전에는 하기 힘들었던 일들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엇!”
할렌이 당황한다. 성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수십의 무리를 본 것이겠지. 초원인치고도 할렌은 눈이 꽤나 좋은 편이었기에, 멀찍이 떨어진 칼페람의 성문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어찌 아셨습니까 장군?”
오고 있는 것을 알았다고 말음 했음에도 믿지 않는가. 그렇다면 더 말한들 무슨 소용일까.
군터는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오십 기의 기병. 그 선두에 있는 사내를.
‘로크.’
그들이 만나기로 한 구릉 정상은 군터의 군영과 칼페람의 중간지점이었다. 로크가 성문을 열고 나오고서 머지 않아, 그들은 간단하게 준비된 자리에서 마주앉았다.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러지.”
“장군!”
로크의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군터를 본 순간부터 안색이 하얗게 질렸던 이들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군터의 뒤편에 조용히 서 있던 할렌과 병사들 역시 마주 나왔다.
“걱정 말게.”
“하오나…….”
“이곳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내 목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네. 내 결정에 따라와주었으니, 이번에도 그리들 해주게나.”
군터는 로크와 그의 수하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로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던가. 얼추 이십 년? 그만한 세월이 지났으니 많이 변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실제로 다시 만난 로크는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많이 변해 있었다.
“기다리게 했군.”
“응하기 쉽지 않은 제안이긴 했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단 둘이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지? 너무 많이 변해서 몰라볼 뻔했다.”
“너 역시.”
“음. 그래도 무뚝뚝한 것은 여전하군 그래.”
“…….”
오랜 세월이었다. 서로에게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그러나 로크는 어제 그를 보았던 것처럼 편안하게 대했다. 군터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보는 이들은, 조금 전 로크의 수하들처럼 주눅들기 일쑤였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음 속에 껄끄러움이나, 두려움 한 조각 정도는 품고서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자신을 대하는 그런 태도가 이제는 익숙해진 군터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로크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니. 이 녀석은 원래 이랬지.’
겉만 보면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반백의 머리, 주름진 얼굴. 굽은 어깨 등은 그를 5, 60대 노인처럼 보이게 했다. 왠지 모르게 잔잔히 가라앉은 두 눈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 그것만은 젊었을 적 서로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싸구려 술을 주고 받던 그 시절 그대로였다. 군터는 그것이 꽤나 놀라웠다.
“많이 변했군.”
로크가 말했다.
군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런 것 같아. 난 예전부터 네가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 생각했었지. 이렇게 대단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십인장이 되고 자축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장군이라니. 하하.”
“너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수만을 이끄는 장군이 되었으니.”
“음. 그러고 보니 그렇군. 나도 꽤 대단해진 셈인가. 우리 아버지께서 딱 거기까지만 들으셨더라면 놀라 자빠지셨을지도 몰라.”
“…….”
“돌아가셨다. 마을 사람들도 거의 모두.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전쟁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키더군.”
“유감이다.”
“널 찾아갈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거리도 거리고,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았어. 안타깝게도.”
“…….”
어째서 찾지 않았느냐 원망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 날 부른 건 무슨 용건이지?”
“그냥,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제 와서?”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로크가 픽 웃었다.
“한때는 얄팍한 원망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도 보고 싶었다. 죽기 전에 말이야.”
“죽지 않을 수도 있다.”
“항복하라는 말인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
“너희는 이길 수 없어.”
“이기는 것은 생각지 않아.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하고 있을 뿐.”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자라고는 보이지 않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