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화
“적은 칼페람에 있다!”
5만에 이르는 반란군이 한 곳에 집결해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 제국의 군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도발이라면 도발이다. 숨지 않을 테니 와서 덤비라는 뜻 아니겠는가?
“진군하라!”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 발칙한 도전을 피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시간만 끌어도 승리는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시끄러운 소리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보다 눈에 띄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승리. 그것도 커다란 승리.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압도적인.
“칼페람에서 우리가 반란군 놈들을 모조리 쓸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소. 허나 얕봐서는 안 되겠지. 막다른 길에 몰린 놈들이 얼마나 독하게 물고 늘어질지 알 수 없는 데다…….”
칼페람으로 진군하기로 결정을 내린 그날. 유게르 티브리악은 군터에게 은밀히 말했다.
“장군도 알고 있을 거요. 우리 가문을 적대하는 놈이, 혹은 놈들이 저 반란군을 뒤에서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니까.”
쉽게 끝날 수도 있었던 전쟁이 여기까지 끌렸던 것은 물론 반란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했던 것 때문도 있지만, 정체 모를 배신자들의 지원도 단단히 한 몫 했다.
“배신자라.”
“그렇소. 배신자지. 아무리 우리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국의, 황자 전하의 적을 편 든다는 것이 말이나 되오? 이게 이적행위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흥분한 듯 말하지만 유게르 티브리악의 목소리는 높아지기는커녕, 평소보다도 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 배신자들의 정체라도 알아냈소?”
“그랬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니오. 말했듯, 그 행사가 워낙에 은밀하여 쉽사리 꼬리를 잡을 수가 없었소. 어찌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지, 잡았다 싶으면 허탕이었지. 그것을 못해도 대여섯 번은 반복했을 거요.”
전쟁 중인데다 배신자들의 접선이 반란군의 세력권에서 이루어지다보니 그들을 잡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물자의 흐름을 추적해보기도 쉽지가 않은 것이, 그 흐름이 한 갈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퍼져 있으며 특히 타라냐드처럼 티브리악 가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통하는 경우는 아예 추적을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테고.”
“로크. 반란군의 수괴. 그놈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요. 놈의 증언만 있다면 그 배신자들을 징치할 수도 있지.”
“…생포하라는 건가?”
“비열한 배신자 놈들에게 나와 내 가문이 겪은 고초 이상으로 되갚아줘야 하지 않겠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사로잡히느니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을 거요.”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아마 그럴 것이야. 허나 꼭 그 로크라는 놈이 아니어도 괜찮소. 증언을 해줄 입만 있으면 되니까.”
“그렇게 증언을 얻어낸다 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을 텐데?”
“괜찮소. 그렇다 해도 충분한 압박이 될 테니까. 제 발 저릴 일을 저지른 이상, 놈들은 알아서 몸을 움츠리게 될 거요.”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요. 입을 맞춰달라는 건가?”
“그렇소. 만에 하나라도 증언을 해줄만한 놈을 구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함께 증언을 들었다 말한다면 저 남쪽에 있는 놈들이 감히 뭐라 할 수 있겠소?”
“좋소. 그리하지.”어려울 것 없는 요청이다. 이번 전쟁에서 티브리악과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들어주지 못할 것 없다. 물론 가장 최선은 그런 일을 할 필요도 없이 반란군의 수뇌를 잡아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이겠지만.
‘생포라.’
다시 한 번, 로크가 적이라는 것이 와 닿았다. 이제 곧 칼페람에서 로크를 마주하게 되면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생포하거나, 죽이거나.
“…….”
별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아주 오래 된, 빛바랜 기억은 그에게 지나간 과거일 뿐이었다. 군터에게는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 여겼다. 과거의 경험, 인연들 역시 마찬가지.
로크. 로크. 로크.
유게르 티브리악의 막사를 나선 군터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이름을 되뇌며, 서쪽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 * *
“제국군이 베니프라에서의 약탈을 멈추고 회군했다 합니다.”반가운 소식이나 누구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겁니다.”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모두 그리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예견했던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니 각오를 다졌던 이들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들 하실 필요 없습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아군은 5만이 넘습니다. 칼페람의 성벽은 결코 허술하지 않고요.”누군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입을 열었으나 그의 말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아군의 병력이 5만을 넘어선 것도 맞고, 칼페람의 성벽이 튼튼한 것도 맞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이 있으니, 그들은 5만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칼페람의 성벽 안쪽에 몸을 숨긴 처지라는 것. 그리고 칼페람에 비축된 군량이 5만이나 되는 병력을 먹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진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성문을 열고 야전으로 맞붙는다면 승리할 자신이 없다. 비록 ‘후원자’의 지원으로 무장 상태가 일부 좋아지고 기병 전력까지 부족하나마 갖춰졌다지만, 어디까지나 ‘부족한’ 수준에 불과했다. 적과 일전을 논할 수 있는 수준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적이 오고 있다. 허나 걱정할 필요는 없네. 걱정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그뿐이야.”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한다. 간단한 진리이지만 실제 이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어려울 것을, 어쩌면 불가능할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리해야 한다. 그것이 이끄는 자의 책무였으니.
“날이 차군.”
“그럴 시기지요.”
회의를 마친 로크는 시내로 나왔다. 괜한 눈길을 끌기 싫어 호위는 최소화하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거리를 두고 은밀히 따라오게 했다. 때문에 지금 그를 옆에서 지키는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헌데 장군. 너무 무방비하신 것이 아닌지.”
호위로 붙은 한센이 그에게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이곳에 모인 동지들 중 누가 나를 해하겠는가.”
“동지가 아닌 자들이 섞여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간자를 부리듯, 적들 또한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적은 나를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네. 설령 죽이더라도 암살 같은 방식은 아닐 것이야.”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런 식으로 내 목이 떨어진들, 제국의 반감을 가진 백성들의 마음은 꺾이지 않을 테니까. 유게르 티브리악은 나를 산채로 매달아놓고 상상도 하기 힘든 처참한 방식으로 욕보이려 할 걸세.”
“…….”
그런 말을 어찌 이리도 담담하게 한단 말인가. 한센은 혀를 차면서 동시에 감탄했다. 그가 모시는 대장은 생사에 초연하여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입으로 제국을 타도해야 한다느니, 유게르 티브리악을 찢어 죽여야 한다느니 하는 자들은 넘쳐났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속에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은 자는 없었다. 오직 한 명. 눈앞의 로크만을 제외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조용히 둘러보고 있는 로크를 보며, 한센은 들리지 않게 물었다.
* * *
“…….”
로크는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한다는,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은 피폐했다. 거리도,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못 먹어서 야위었고, 열에 여섯은 마른 기침을 토했다. 홀로 바람을 피해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이들, 몇 안 남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체온을 나누는 이들.
그 몰골은 가지각색이지만, 보잘것없고 처량한 신세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후우.”
제법 쌀쌀한 바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로크는 옷깃을 여미려다가 문득 생각을 바꾸고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았다. 절로 이가 떨렸다. 나이를 들어가며 약해진 몸은 추위를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지.’
자신이 추위에 떨고 있다면, 저들은 소리 없이 절규를 하고 있다. 자신은 얼마 후에 다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휘부로 돌아가겠지만, 저들은 계속 저 자리를 지키며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곳에 남아봐야 고통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이들을 이곳에 남게 하는가?
‘외치기 위해서지.’
한평생 살면서 밟으면 밟히고, 닥치라 하면 닥치며 살아온 이들이다. 단 한 번도 세상에, 자신들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은 적 없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려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대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쳐보려는 것이다. 그 대가가 끔찍한 고통이요, 처참한 죽음일지라도.
‘저들과 내가 다르지 않아.’
아니. 자신이 저들이며, 저들이 자신이다. 차이가 있다면 서로가 싸우는 위치일까. 그러나 로크는 저들과 그를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저들이 자신을 보며 용기를 얻는다면, 자신 역시 그러하다. 저들이 있기에 외롭지 않으며, 두렵지 않다. 우습게도, 모든 것을 다 잃고서 마지막으로 내몰린 순간에 의지할만한 또 다른 것을 찾은 것이다.
캄캄한 밤의 끝에 얻은 빛이다.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새벽이 오기 전에 져야 한다면, 자신 역시 이들과 함께 질 것이니.
* * *
칼페람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이 깨진 것은, 먼 길을 숨가쁘게 달려왔음이 분명한 전령이 헉헉대며 토한 한 마디가 전해지면서였다.
“동남쪽 닷새 거리! 적 출현입니다! 그 규모는 최소 오천 이상! 하옵고, 적기(赤旗)가 휘날리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제국군의 붉은 깃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적의 선발대인 것 같습니다. 군터 그 자가 직접 오는군요.”
“좋은 기회입니다! 군터 그 자가 간이 부었군요! 만약 놈들이 그대로 칼페람에 당도한다면 즉각 성문을 열고 나가 쓸어버립시다! 아니, 차라리 놈들이 오는 길목에 매복을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초장에 선발대를 격파하고, 장군의 목을 벤다면 단번에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겁니다!”
패기 넘치는 말을 하는 사내의 이름은 아티아. 카베르가 죽은 지금, 로크의 바로 뒤를 잇는 자였다. 거친 외모처럼 거칠게 주장하는 그였지만, 그의 의견은 다른 이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티아 장군의 말대로 되면 더없이 좋겠으나, 적들도 바보는 아니오.”
“설마하니 고작 수천으로 오면서 별다른 방비도 없이 오겠소?”
“선발대라고는 하나, 결국은 정찰대겠지. 그들을 치기 위해 군을 성 밖으로 빼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자칫 적의 함정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이 칼페람은 무슨 병력으로 지키겠소?”
부정적인 말이 이어질수록 아티아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자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해가니 다른 이들도 그의 눈치를 보며 슬슬 입을 다물거나 목소리를 줄여갔다. 하지만 역시 그 누구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힘을 실어주지는 않았다.
분위기가 좋지 않게 변하자 로크가 끼어들어 중재했다.
“아티아. 그대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위험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지. 적의 수가 최소 오천 이상이라는데, 그 병력은 모두 파헨델의 정예병이다. 기존 유게르 티브리악이 이끌던 제국군과 비교하면 안 되는 강군이야. 그들을 치기 위해서는, 설령 매복이라 할지라도 최소 배 이상의 병력은 투입해야 할 터. 만에 하나 작전이 실패하거나, 이런 움직임이 적의 함정이기라도 할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군.”
“이해해줘서 고맙네.”
아티아는 여전히 불만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최대한 그것을 삭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로크는 그에게 가볍게 사과하고 정찰병의 수를 늘릴 것을 명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닷새 후.
제국기와 적기를 흔드는 수천의 군세가 칼페람의 앞에 당도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