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서신의 내용은 간단하다 못해 투박하기까지 했다. 지위 있는 자들의 치장된 글만 주구장창 읽다가 간만에 이런 솜씨 없는 글을 읽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에게 전하는 간단한 인사와, 각자의 처지에 대한 이해. 그리고 부탁.
‘내 목을 원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어떤 야료도 부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싸울 것이다. 그러니 애꿎은 백성들에 대한 살육은 관두고 이곳에 와서 내 목을 가져가라.’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굉장히 순진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말은 전쟁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서신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에서지만.
‘거짓은 아닌 것 같은데.’
로크를 알아서가 아니다. 객관적인 상황을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독하게 마음을 먹은 뒤로 전세는 썩 괜찮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국군은 바크렌 서부를 풀 한포기 남기지 않을 것처럼 우악스럽게 밀어붙이고 있었고, 정말 죽더라도 제국의 통치는 못 견디겠다 하는 소수를 제외한 백성들은 물밀 듯이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복족의 의사를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반란군에게 미래는 없다. 그것을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
‘이런 상황에서 백성 운운이라.’
너무 거창하고, 순진하지 않은가. 설마 못 본 사이에 대의에 죽고 사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하긴, 세월이 오래 흘렀으니 어떻게 변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군터 자신도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으니.
‘흠.’
어떻게 할까.
로크의 제안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그의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처음의 말랑한 마음을 버리고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유게르 티브리악과는 달리, 군터는 이 전쟁을 길게 끌어 득을 볼 것이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얻을 것은 대부분 얻은 이 전쟁이 이제는 슬슬 끝나주는 것이 좋았다. 이곳에 발이 묶이는 것도 묶이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제 슬슬 전면에 내세웠던 유게르 티브리악을 넘어 그에게도 이 잔혹한 전쟁의 주역으로서의 오명이 들러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아.’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야스메티에게서 서신이 왔었다. 그는 테리브란에서 유게르 티브리악의 폭주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강하게 나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우스운 이야기다. 그들 중 북쪽 끝의, 이미 한 차례 반란이 일어났던 ‘더러운 땅’의 백성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다.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건수를, 명분을 잡고 티브리악을 공격하는 것뿐이다. 그런 주제에 늘 입으로는 백성이 어쩌고 민심이 어쩌고를 주절댄다. 그렇게 떠들어대는 이들 중 반 수 이상은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자들이다. 이 또한 단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소?”
조촐하게 마련된 간만의 술자리. 유게르 티브리악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동의를 구했다. 군터는 말없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사심도 없이, 그의 생각에도 유게르 티브리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자들이 제 욕심만 앞서 전장의 일을 망치려 드는 것은 피땀 흘려가며 싸우는 자들의 입장에서 참기 힘든 일일 수밖에 없었다.
“장군도 알겠지만, 나와 내 가문은 이 전쟁에 사활을 걸었소.”
결코 그냥 하는 말도, 과장도 아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괴물이다. 생명도, 재물도, 그야말로 모든 것을 휩쓸고 파괴한다. 그런 전쟁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현재 바크렌에서의 전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거의 온전히 티브리악 가문이니, 아무리 그들 가문이 오랜 세월 동안 강대한 역량을 쌓았더라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에 투입된 병사가 얼마이며, 그들이 소모하는 물자는 또 얼마란 말인가. 그 상상하기도 힘든 부담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만 해도 티브리악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힘도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다. 밖에서 흔들고, 안에서 잡아당기면 티브리악이 아니라 그 어느 곳이라도 휘청거릴 수밖에.
“저 남쪽에서 편히 앉아 나와 내 가문을 헐뜯고 있는 놈들을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오.”
술자리에서도 꺼내기 힘든 과격한 언사. 허나 이해한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이니.
“헌데 말이지.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즐겁기도 하다오. 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시겠소 장군?”
“글쎄. 잘 모르겠소만.”
“저놈들이 한 목소리로 지껄여대는 것을 보시오. 저놈들이 언제 저렇게 사이가 좋았소? 평소 어떻게든 서로 헐뜯으려고 눈에 불을 켜던 놈들이 갑자기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은 모두 티브리악을 견제하기 위함이오. 우리 가문이 놈들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지.”
보잘것없는 상대를 견제하는 이는 없다. 하물며 최고 권력자라는 자들이 할 일이 없어 전쟁 중인 아군을 물어 뜯겠는가. 유게르 티브리악의 말처럼, 바크렌을 집어삼키려 하는 티브리악 가문이 그들에게 있어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와 내 가문에 닥친 큰 시련이지.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긴다면 지금의 어려움 따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 있는 크나큰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눈은 이쪽을 보고 있지만, 아마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술을 들이켜는 것도 모두 자신의 안에서 싹을 틔우는 불안을 달래려는 것일 테고.
“장군. 장군도 알고 있겠지만,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나와 내 가문에게 일임하셨소. 이곳에서 거두는 모든 것이 온전히 티브리악의 것이란 말이지. 모든 것이.”
‘모든 것’은 좋은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티브리악이 바크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된다.
“실은, 전하께서 따로 우려의 말씀을 전하셨소. 물론 비공개적으로, 은밀하게 말이지.”
“…….”
“물론 전하의 뜻은 아닐 것이오. 아마 제레이스가 부추긴 것이겠지. 뱀 같은 자들. 전하께서는 놈들을 멀리 하셔야 해. 그 놈들이 지금처럼 버티고 있는 한, 진정한 충신들은 높이 설 수 없을 테니까.”
마치 자신들은 그 ‘충신’에 속하는 것처럼 열변을 토하는 유게르 티브리악이었다.
“하소연이나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 테고.”
그러나 군터는 그의 넋두리 같은 헛소리를 얌전히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는 불그스름한 얼굴의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약간의 귀찮음을 느끼고 있었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척하면서-어쩌면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공감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과한 기대였다. 군터는 격정적인 그를 보며 따분함과 귀찮음 외에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당장 그가 벌떡 일어나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른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게르 티브리악이라는 사내는 그에게 그 어떤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것은 군터가 이 티브리악의 후계자에게, 바크렌의 총독이 될지도 모를 사내에게 전혀 흥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소.”
군터의 건조한 반응이 예상외였는지, 유게르 티브리악은 잠깐 옅은 불쾌함을 드러냈다가 다시 표정을 고쳤다.
“저 남쪽에 있는 놈들이 뭐라 지껄여대건, 나는 내 결정을 밀고 갈 것이오. 그리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릴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갖잖은 명분을 들이대며 우리를 헐뜯으려 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라. 군터는 유게르 티브리악의 얄팍한 화술을 굳이 꼬집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 유게르 티브리악이 보이고 있는 광폭한 행보는 그의 용인과 협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장군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오. 절대 흔들리지 마시오. 아시겠소?”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런 염려는 할 필요 없소.”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은 자.
그 어떤 가면을 쓰고 행세하더라도, 결국 바뀌지 않는 그의 본질은 이것이다.
‘어지간히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군.’
안 그러는 것이 이상하긴 하다. 자기 자신, 자신의 가문이 가진 모든 것을 건 판이 지금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어렵지 않겠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조금은 고민했었다. 그냥 직설적으로 의견을 피력해도 되지만, 가뜩이나 열이 오른 유게르 티브리악이 반발이라도 하면 피곤해지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상태를 보아하니 적지 않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신은 없고, 자꾸만 의심하고 걱정한다. 이럴 때는 가볍게 등 떠밀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이 중심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적이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요.”
“알고 있소.”
“마지막 일전이겠지. 놈들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옥쇄하겠다는 각오인 것 같소.”
“장군이 하고 싶은 말이 뭐요.”
“전쟁을 계속 끄는 것은 그대에게도 부담이지. 그대의 위엄은 보일 만큼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이대로 진군하여 집결한 반란군 놈들을 끝장내자?”
“시끄러운 자들을 입 다물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군터의 말을 들은 유게르 티브리악은 곰곰이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야.’
틀리지 않다 뿐인가. 옳은 말이다. 적이 결집했다면 바로 가서 싹 쓸어주는 것이 저 아래쪽의 잡것들을 입 닥치게 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장군도 알다시피,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에게 유리하오.”
반란군의 약점은 여러 개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오합지졸이라는 점. 그리고 보급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첩보에 의하면 반란군은 필요한 물자를 점령한 곳에서 탈취하거나 백성들을 통해 징발 혹은 지원을 받고 있다 한다. 그러나 털 수 있는 도시나 성이 계속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성들을 통해 긁어 모으는 것도 한계는 있다. 그 어떤 상인들도 그들과 거래하지 않으려 하니 상인들을 통해 물자를 얻을 수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머릿수만 늘었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머릿수는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막대한 머릿수는 고스란히 짐이 된다. 물자를 들여올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인데, 물자를 소모하는 병사들의 수는 많으니 자연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처음에 반란군이 대대적으로 봉기했을 때도 유게르 티브리악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본 가장 큰 이유였다. 장기전으로 끌면 자연히 무너져 내릴 거라 생각한 것이다.
“후방의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더군.”
“…….”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모르나, 놈들도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다른 수가 없으니 짜낸 방법이겠지만, 그리 효과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고 해도 제대로 수확을 하려면 해가 바뀌어가 할 터인데, 적들은 그때까지 버틸 여력이 없다. 아니, 없을 것이다.
‘어림도 없지. 하지만…신경이 쓰이긴 하는군.’
사실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되도 않는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반란군들이 아니라 지금도 테리브란에서 간사하게 입을 놀려대고 있을 작자들이었다.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모를까, 한 번 건수를 잡아 입을 뗀 이상 다시 그 입을 얌전히 닫지는 않을 터. 앞으로 그들의 압박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고려해보겠소.”
“시간이 많지 않음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
“늦어도 며칠 안에 결정할 것이오.”
* * *
“자네 이름. 모레인이 아니더군.”
“제 이름은 모레인이 맞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나머지를 말하지 않았지.”
모레인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물려받았으나 허락 받지 못한 성입니다.”
“얼마나 옅든, 네 몸에 티브리악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유게르 티브리악은 모레인을 ‘너’라고 불렀다. 하대였으나 이전의 ‘자네’보다 훨씬 친근감 있는 호칭이었다.
“얼마나 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한들 우리는 혈족이라 할 수 있어. 그렇지 않나?”
“소관이 어찌 감히.”
유게르 티브리악이 흐릿하게 웃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야. 이제부터 네 이름을 숨기지 마라. 티브리악의 일원임을 당당히 밝히고 다니라는 말이다. 내가, 이 유게르 판 티브리악이 너를 우리의 일원으로 인정했으니.”
모레인 티브리악의 고개가 더욱 깊이 숙여졌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