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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32화 (532/1,064)

532화

학살.

다른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제국군의 군홧발이 닿는 곳마다 벌어지는 참극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그 한 마디만이 적합했다.

“기회는 줄만큼 주었다. 제국인이 되기를 거절하고, 제국에게 저항하는 자들에게 제국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뜻을 군터는, 모레인은 부족함 없이 이루어주었다. 복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죽음을.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에게 죽음을. 강력한 군대에게 있어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장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성정이 거칠기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할렌마저 우려를 표했다. 불태운 마을의 수가 스무 개를 넘어가고, 베고 태워 죽인 사람의 수가 수만을 넘어갈 즈음이었다.

“적은 이미 집결했다.”

“적이 더 늘어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지. 만약 그것이 우려스럽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거드는 입장일 뿐이다. 결정은 그가 하는 것이고.”

“으음.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던 할렌이 다른 용건으로 넘어갔다.

“하옵고 장군. 모레인 말입니다만.”

“모레인이 왜.”

“그 녀석. 평소 같지 않습니다. 지금의 녀석을 보면 아드리안보다도 더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게 굴고 있습니다.”

“주장(主將)이 그것을 원하니까 그 뜻에 따를 뿐인 게지.”

군터의 담담한 대꾸에 할렌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서서히 표정이 변했다.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혹시 장군. 장군께서 모레인에게 무언가 언질을 주신 바가 있는 것인지.”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치가 있다. 감각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전장에서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할렌의 감각은 군터도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다. 아마 이번에도 그런 감각이 그에게 말해준 듯했다.

“모레인은 바크렌에 남을 것이다.”

군터는 숨기지 않았다. 드러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할렌에게까지 비밀로 할 정도는 아니다. 또, 할렌이 어디 가서 가볍게 입을 놀릴 성격도 아니고.

“그 말씀은, 그러니까…유게르 티브리악에게 갈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째서.”

할렌은 조금 화가 나 보였다. 모레인이 배신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살짝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군터는 그런 할렌의 착각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할렌이 모레인을 찾아가 언성을 높이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녀석은 너와 다르다.”

“예?”

“녀석의 꿈은 티브리악에서 우뚝 서는 것이다.”

가서 외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내가 이렇게 너희 위에 섰노라고. 그것은 단순히 인정받기 위한 욕구일까? 아니. 아마 그보다는 좀 더 진중한, 어쩌면 한이라고 할 만한 것이겠지.

“녀석은 그곳에서 날 위할 것이다. 그 대가로 난 녀석을 도와줄 것이고.”

“그렇다면…지금 녀석이 하는 짓들이 전부?”

“유게르 티브리악은 흡족해 하더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느낌일 것이다. 안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구한 모레인이 아닌가. 듣자 하니 가끔씩 찾아오거나 불러서 사적인 이야기도 잠깐씩 나누고 있다고 하던데.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비록 바크렌에, 전장에 나와 있다고는 하지만 유게르 티브리악이라면 지금쯤 모레인에 대한 것을 다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그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질 수 있고, 궁금한 것이 있다면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이니까.

‘원하는 대로 되고 있군.’

모렌이 원했던 대로다. 그는 확실하게 유게르 티브리악의 눈도장을 받았다. 동시에 적지 않은 이들의 여러 가지 시선들도 받았다. 벌써부터 어떤 이들은 모레인을 가리켜 잔인한 학살자라고까지 칭했다. 적이 불렀다면 그럭저럭 괜찮다고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아군에서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점. 모레인은 그가 말했던 대로 유게르 티브리악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더 없는 잔혹함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것을 얻는 대신,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 대가다.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지.’

어리석은 녀석이 아니다. 문제 되는 일이 없도록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 * *

“뭐라고?”

잘못들은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잘못 들었다는 듯이 대꾸한 것은, 들은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놈들은 지나가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있습니다. 과장하여 드린 말씀이 아니라, 정말로 학살입니다. 그 외에는 그 참극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되풀이 된 보고에 로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들이 내건 명분은 간단하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제국과 제국에 맞선 반란군과의 싸움이 벌써 오래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반란군이 점거한 땅에서 부역하고 있는 자들은 반란군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

완전히 틀려먹은 말은 아니다. 확실히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백성들은 반 제국 정서가 강한 이들이 대부분이며, 그들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이쪽에 가담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제국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심증만 가지고 백성들에게 손을 댔다가는 민심이 들끓을 수 있기에 자제하면서 증거를 쥐었을 때에만 잔혹하게 짓밟았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그 어떤 증거도 없이 그저 단순한, 명분이랄 수도 없는 명분 하나만을 가지고 백성들을 학살하고 있다. 그 어떤 통치자도 저런 식으로 나온 적은 없다. 저건 그야말로 말살해야 하는 적을 상대로 할 때나 취하는 방식이 아닌가.

‘카베르가 불타 죽었다고 했던가.’

화공으로 유게르 티브리악이 이끌던 제국군에게 꽤나 피해를 입혔다고 들었다. 그 분풀이 때문이었는지, 카베르는 잔혹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심한 꼴을 당했다고.

그 분풀이의 연장선일까? 유게르 티브리악은 명문 귀족가문의 후계자다. 어쩌면 그 자존심은 범인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일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런 멍청한 작자였다면 상황이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혹자는 유게르 티브리악이 책상물림이라고, 실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로크가 생각하기에 그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확실히 전쟁을, 전투를 책상에서 배운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판단력을 다소 흐리더라도, 유게르 티브리악은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최선은 아닐지라도 나쁘지 않은 쪽을 택하곤 했다. 즉, 평범한 수준은 된다는 이야기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어리석지 않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활용할 줄 알며,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아는 자다. 그런 자가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우리를 대적으로 인식했다는 거겠지.’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숨이 턱턱 막히기도 했다.

‘어쩌면, 나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지도 모른다.’

그가 처음에 제국에 맞섰던 것은 다분히 감정적인 이유에서였다. 베이고르의 잔당 진압이라는 명분 하에 패악을 저지르던 제국군에게 마을이 화를 입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그는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하여 그와 뜻이 맞았던 이들을 규합하고, 제국의 병기고를 급습. 자그마한 도시 하나를 점거했다.

‘나의 복수를 위해서 숱한 이들을 끌어들인 꼴이 되었다.’

물론 그와 함께하는 이들도 다 저마다 가슴 속에 제국을 향한 앙심 한 조각 정도는 가지고 있지만, 그들을 선동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놈들이 원하는 건 무조건적인 항복이겠지.’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어차피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싸우다 죽고자 하는 이들. 로크 역시 그들과 함께 죽을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반쯤은 휩쓸리다시피 한 일반 백성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들은 죽을 필요가 없다.

‘지금의 행보를 보면, 유게르 티브리악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다른 이를 설득하면 된다. 죄 없는 백성들에 대한 탄압을 그치고, 여기에 모인 자신들과 싸우라고 외치면 된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겠지만, 지금 제국군이라는 마차를 이끄는 말은 하나가 아닌 둘.

‘군터.’

다시 속이 답답해졌다. 설마 이 처참한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게 유게르 티브리악이 아니라 군터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로크는 그런 생각이, 의심이 들 때마다 그러지 않을 것이라 애써 믿고 있었다. 자신이 알았던, 과거 군터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지금쯤이면 오고 있겠지.’

병사들의 결집은 거의 끝났다. 싸울 수 있는 자들. 싸우고자 하는 자들은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일전만이 남았다. 적들도 그것을 알고 있을 터.

로크는 그가 신임하는 수하 한 명을 은밀히 불렀다. 처음 제국에 맞서 일어났던 때부터 그와 함께 한 사내였다.

“서신 한 장을 전해야겠다.”

“서신…말입니까? 누구에게?”

로크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 * *

“장군.”

“…….”

“어떤 자가 장군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오는 자가 있다고 해서 다 알리지는 않는다. 그것을 부관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알렸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은 경우라는 말일 터.

“로크의 목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로크?”

관심 없다는 듯 부관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던 군터였다. 그런 그가 ‘로크’라는 이름에 반응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로크라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그 목을 주겠다는 말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누구기에 그런 소리를 하면서 그를 찾는가.

“들여보내라.”

“예.’

수상한 자를 장군의 막사 안에 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군터 자신도, 그를 따르는 부관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몸수색도 철저히 할뿐더러, 설령 일을 벌이려 한다 해도 군터가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다소 도전적인 눈을 하고서 막사에 들어섰던 사내는, 군터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숨결을 느끼자마자 목석처럼 굳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군터의 눈을 마주보지도 못했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간 것은 그가 막사에 들어섬과 거의 동시였다.

“로크의 목을 주겠다고?”

“…그것은, 그대를 만나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했소.”

“그럴 거라 생각했다. 허면 용무는?”

“서신을 전하러 왔소.”

“누구의 서신이지?”

“로크 장군.”

“…….”

군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군터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뭘 그리 떨고 있지? 가져왔다면 보여라. 내게 전하기 위해 가져온 서신이 아닌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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