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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31화 (531/1,064)

531화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스스로 그렇다 주장하거나, 그렇게 여겨지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충분한 고통을 맛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굴복할 만한 고통 앞에서, 사람은 얼마든지 무력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다.

군터는 카베르라는 이름의 적장을 생포하자마자 전장을 빠져나왔다. 빠르게 번지는 불길이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있는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거기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더더욱 어리석은 일이고.

들어갈 때처럼 나오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많은 수가 한 곳에 뭉칠 수 없는 환경에서, 그들과 마주치는 소수의 적들은 군터의 창을 견디지 못했다.

그 후에는 간단했다. 적들은 불길 속에서 죽거나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고, 군터의 병사들은 불길이 미치지 않는 바깥에서 기다리다가 그렇게 튀어나오는 적들을 상대했다.

불을 피해 뛰쳐나오는 이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고통과 공포에 질린 이들이었고, 그런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그래. 마치 광인과도 같아 보였던, 죽음이 두렵지 않다 외쳤던 이들은 그렇게 도망자가 되어 있었다. 살이 타오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의지는 고통 앞에서 꺾인다. 강철이 고열 속에서 형체를 잃듯, 강철 같은 의지도 그러하다.

“이제…끝내라…….”

두려워하지 말라며, 티브리악의 목을 따자며 외치던 이 사내도 마찬가지. 모진 고문 속에서 그는 굴복했다. 기술자의 말로는 꽤나 버틴 모양이었지만, 과정이 어떠했든 결국 꺾인 것은 마찬가지.

군터는 그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하나는 그 로크가 자신이 아는 로크가 맞는지. 또 하나는 로크의 행방.

두 가지 모두 그리 대단한 질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카베르에게 핑계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묻는 내용이 대단한 것이 아닌 만큼, 이것을 말해준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즉, 자신의 토설이 아군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는 생각. 혹은 합리화.

그래서인지 그는 한 번 고문을 겪은 뒤로는 고분고분 묻는 것에 대답했다. 군터가 알고 있던 로크의 신체적 특징이라든지, 성격 같은 것에 관한 사소한 질문들. 그것을 통해 군터는 ‘그’ 로크가 자신이 알던 로크가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행방에 관한 것. 그 역시 별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카베르가 이끄는 반란군과의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에, 이미 대다수의 반란군이 한 곳에 집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고 제국군이 움직일 즈음에는 이미 집결이 거의 완료되었을 것이고, 그때가 되면 로크는 제국과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을 테니 그의 행방은 알기 싫어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멀리 보이는 성벽 위에 서 있을 테니까.

“볼 일은 다 봤다. 넘겨라.”

“예.”

반 폐인이 된 카베르는 유게르 티브리악에게로 넘겨졌다. 몸 곳곳에 가벼운 화상을 입은 그는 지금 분노로 치를 떨고 있었다. 치료 때문에 직접 자리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이 자는 그에게 있어 아주 좋은 선물이 될 터였다.

군터의 예상대로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의 선물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혀를 뽑고 몸에 꼬챙이를 수십 개나 박아 넣었다던가.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아직 죽지 않은 카베르를 불에 태우기까지 했다. 그의 화가 어느 정도까지 차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포로들을 모두 살마드로 데려가 태워 죽이겠다더군요.”

유게르 티브리악의 가혹함은 포로로 잡은 반란군들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공포로써 이 땅을 다스리기로 마음 먹은 듯했다. 물론 이전에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그 정도가 미진했다. 어중간한 두려움은 반발을 부른다. 그런 면에서는 고통과도 같다. 아예 고개를 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공포는 그 어떤 반발심조차 억제하는 법.

물론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리 현명한 통치 수단이 아닐 수도 있으나, 유게르 티브리악에게는 현재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는 이미 이 땅에 대한 통제력을 꽤나 상실한 상태고, 따라서 당장 효율적이기만 하다면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감수하리라.

“못 볼꼴을 보여드렸소 장군.”

유게르 티브리악의 얼굴은 꽤나 초췌했다. 부상도 부상이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고초가 상당한 듯했다.

“군사를 다루다 보면 온갖 일을 다 겪는 법이지. 괘념치 마시오.”

괘념치 말라고 하나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유게르 티브리악 본인은 물론이고, 군터도 알고 있다. 그는, 티브리악은 군터에게 또 하나의 빚을 졌다. 결코 가볍지 않은.

“갈수록 장군에게 시세를 지기만 하는구려.”

“…….”

“그대에게 진 빚을 하찮게 여긴다면 내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겠지. 이 빚은 언제고 반드시 갚으리다.”

“좋을 대로. 그런데,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을 논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리 해야지.”

몰골은 초췌해졌을지라도, 두 눈은 아직 힘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번에 크게 당하기 전보다 더 형형하게 빛났다. 그의 목을 노리던 적들. 그들의 눈에 서려 있던 독기가 이제는 그의 눈에도 떠올라 있었다. 군터는 그것이 그럭저럭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나는 오만했었소. 이 땅이 이미 내 손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어. 저 땅, 저 백성, 모두가 나의 것이라 여겼지.”

그래서 바크렌의 땅이, 사람이 상하는 것을 자신의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그의 움직임을 다소 소극적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장군이 보았다시피, 이렇게 오만의 대가를 치렀지.”

“그래서, 지금부터는 달라지겠다 이 말인가.”

“바로 그렇소. 다 가질 수 없다면 절반이라도 갖겠소. 저 서쪽 놈들을 내 통치의 제물로 삼아버릴 셈이오.”

“좋을 대로 하시오. 기대되는군.”

아직 몸이 편치 않은 유게르 티브리악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뒤. 군터는 모레인을 불러 독대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겸양을 떠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그 어떤 고집도 부리지 않고 모레인의 인솔에 충실히 따라준 덕분이었다.

“그가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당연한 일이다.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좋은 감정을 품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까.”

“네 이름을 그저 모레인으로 알고 있더군.”

“제 몸에 티브리악의 피가 흐른다 한들,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미미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나?”

“…….”

“네 마음을 짐작하고 있다. 전부터 그랬지. 솔직해질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장군.”

모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군터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랑거리라고는 묽디 묽은 핏줄 하나밖에 없는 작자의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 자에게 아들이 없던 탓에 천한 피를 이은 제가 대를 이을 수 있었지요.”

모레인은 감정이 흔들리는지 차분함을 가장하면서도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군터는 그의 인생역정을 들으면서도 전혀 감흥이 없었다.

모레인에게는 미안하지만, 흔하디 흔한 이야기였다. 높이 올라가고자 하지만 핏줄의 한계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자들. 현실에 꺾여 분을 삭여야만 하는 자들의 인생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대부분 이런 식일 것이다.

“장군의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결국 제게는 티브리악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고, 저버릴 수도 없는 사실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것을 버릴 수 없다면, 차라리 그것을 발판 삼아 올라가보려 합니다. 장군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말입니다.”

꿈이었을까. 한이었을까. 그 말을 하는 모레인의 눈에는 야심 대신 어떤 다른 것이 차 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한 번 해보고자 하는 듯했다.

허황된 말은 아니다. 핏줄은 강한 무기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바크렌을 손에 넣고 총독이 된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해질 터. 물론 지금도 그에게 줄을 대고 있는 자들이 셀 수 없이 많겠지만, 요직에는 믿을 수 있는 자를 쓰려할 터. 그 ‘믿을 수 있는’의 조건 중에 핏줄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하물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핏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내가 허락한다면, 넌 날 위해 무엇을 하겠느냐.”

허락이라는 것이 그냥 떠나도 좋다는 허락은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기본에, 그가 유게르 티브리악의 밑에서 높이 올라가기 위해 이런저런 도움도 줘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 키워준다면, 모레인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가. 군터는 담담히 그것을 물었다.

“장군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그런 이들은 지금도 적지 않다.”

살라스가 그렇고, 할렌이 그렇다. 그 외에도 그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이들이 두 손으로 세어도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거기에 하나가 더해진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알고 있습니다. 허나 틀림없이 장군께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

거느리고 있던 수하라고 해서 별다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군터는 그저 이성적으로, 계산적으로 따져보았다.

모레인은 괜찮은 군인으로서도, 사내로서도 괜찮은 자다. 신중하며, 사람들을 이끄는 통솔력도 상당하니 분명히 인재라 할 만한 이일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기회다 싶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과감함. 신중함과 과감함을 동시에 갖췄으니, 이런 자는 어느 정도 운만 따른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

‘내가 그 운이 되어준다면.’

나쁠 것은 없다. 그가 본 모레인은 신의 없는 자가 아니며, 어리석은 짓을 할 자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가 소관을 탐하도록 해주십시오.”

“띄워달라는 거군.”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지금 분노로 눈이 뒤집혔다. 그가 바라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겠나?”

“비정할 수 없는 자가 군인일 수 있겠습니까.”

“네가 티브리악이라는 것은 언제쯤 밝힐 셈이냐.”

“소관이 직접 밝히지 않아도 결국 언젠가는 밝혀질 일입니다.”

“좋아. 뜻대로 해라.”

“장군의 은혜.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 * *

유게르 티브리악은 자신보다 군터가 전투에, 전쟁에 있어 낫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실 그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자존심과 명분 때문에 물러서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존심을 굽혔다. 명분조차 잊었다. 그는 철저히 실리를 쫓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기에 군터의 뜻을 따랐다. 그가 행하는 전쟁을 보조하는 정도에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군터에게 자신의 바람을 알렸다. 또한 자신의 깃발이 군터의 깃발보다 더 높게 휘날리기를 바랐다. 표면적으로는 전쟁을 지휘하는 자가 자신으로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군터는 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여기서 반란군들을 상대로 조금 활약한다 한들 크게 득이 될 것은 없다. 또한, 유게르 티브리악이 원하는 전쟁은 잔혹한 것인 만큼 별로 영광스럽지는 않을 터였다. 전쟁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다는 것은 오명까지도 자신이 뒤집어쓰겠다는 뜻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서쪽 땅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반란군과 다를 바가 없다.

군터는 모레인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모레인은 유게르 티브리악이 바라는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적이라고 생각해라.”

전장에서 만나는 적. 그들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아아…….”

절규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알고 지내던 자들의 식어가는 몸뚱이. 불타오르는 집. 살아가던 터전.

모두 잃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목숨마저 사그라지기 전. 멍한 눈으로 불꽃을 바라보던 사내는 흩날리는 제국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언젠가, 너희들이 저지른 것들을 모두 돌려받을 것이다.”

저주라고 하기엔 너무나 힘 없고, 허망한 한 마디. 그러나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뱉을 수 있는 악의의 전부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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