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
글쎄. 솔직히 모르겠다. 모레인이 티브리악이라는 이름을 버렸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다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아무리 부인한들 그의 피가 티브리악의 피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는 그의 충성심과는 별개다.
“장군께서는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빚을 지우기로 마음먹으시고 이곳에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더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어찌 망설이시는지요.”
“저 불길을 보고도 그 이유를 묻느냐.”
“적과 맞서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유게르 티브리악, 그 하나만 구해서 빠져나온다면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네게 맡기마.”
“…제게 말씀이십니까? 허면 장군께서는.”
“난 적장을 잡겠다.”
모레인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으나 그대로 명을 받아들였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가 티브리악의 핏줄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의 말처럼 유게르 티브리악을 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적과의 교전을 최대한 피함과 동시에 저 혼란스러운 불구덩이 속에서 그를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건 모레인이 알아서 할 일.
“무리라고 생각되면 지체 없이 물러나라. 티브리악에게 빚을 지우는 것은 좋지만, 거기에 목을 맬 생각은 없으니.”
“깊이 유념하겠습니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일은 모레인에게 맡기고, 군터는 그의 친위 병력을 이끌고 적장을 쫓았다.
“장군. 괜찮겠습니까?”
군터의 친위대는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따라온 이들이다. 실력은 의심할 필요도 없고, 그 충성심은 그의 명령이라면 죽을 자리라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 정도.
그러나 그런 그들이 보기에도 시뻘건 불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말머리를 향한다는 것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 듯했다. 거부감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약간의 우려가 엿보였다.
“걱정할 것 없다. 손쉬운 일이니.”
“예? 그 무슨 말씀이신지.”
손쉬운 일이라니. 그럴 리가.
하지만 군터는 진심이었다. 그가 보기에, 금방 저 안에 뛰어든 적장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불에 신경 쓰지 마라. 다를 것은 없다. 내 뒤만 따라오도록.”
전장에서 환경을 따지는 것이 우습다. 주변에 불이 있거나, 살기 넘치는 적이 있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오히려 위협적이기는 후자가 더 위협적이다. 어떻게든 이쪽의 목을 따려고 달려드는 적들보다는 그저 바람 따라 넘실거리기만 하는 불쪽이 더 낫지 않은가.
거기다가 아직은 불길이 그 기세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전이다. 기민하게 움직인다면 검은 연기가 온 산을 뒤덮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가자.”
군터가 그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불길 속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 * *
‘미친놈들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로군.’
화도 나지 않는다. 그저 어이가 없을 뿐.
손해를 감수하고 벌이는 전략은 흔하다. 그러나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식으로 달려드는 싸움에 대해서는 듣도 보도 못했다. 매복해 있는 산에 불을 질러? 그것도 이런 식으로?‘이건 그냥 같이 죽자는 거다.’
독한 녀석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나 이 정도의 독심이라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알면서도 당하다니. 이건 내가 방심한 탓인가?’
방심. 방심은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안일했던 탓이다. 그래. 안일했다.
‘이제 와 후회하면 무엇한단 말인가.’
유게르 티브리악은 허망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횃불에 의지하여 보아야 했던 산속이 지금은 대낮처럼 환했다. 횃불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밝은 빛이 산을 가득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 안되겠습니다! 길이…….”
빠르게 몸집을 불리고 있는 불길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꿨다. 마치 그들이 가는 길을 알고서 움직여 막아서는 듯한 그 변화무쌍함이 야속하기만 했다.
“헉…헉…….”
병사들은 사방을 둘러싼 열기, 아니 화기 속에서 빠르게 지쳐갔다. 중간 중간에 적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적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은 처음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삶에 대한 의지마저도 조금씩 잃어갔다. 지금도 마찬가지.
벌써 몇 번째일까. ‘이번에야말로’를 속으로 수십 번 되뇌며 길을 찾았지만 결국 보이는 것은 도저히 넘어갈 엄두도 나지 않는 불의 장벽이다. 병사들은 물론, 그들을 지휘하고 독려하는 장교들조차 머릿속에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없는 힘을 짜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움직여라! 시간이 갈수록 불길은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가 살 수 있다면, 이 불구덩이를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건 지금뿐이다!”
본래 그는 이렇게 격정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없었다. 장교들을 통해 명령을 하달할 뿐, 병사들에게 직접 목소리를 내는 일도 드물었다.
그런 만큼 그의 외침은 효과가 있었다. 생기를 잃어가던 병사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됐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다.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낸 것뿐이니,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된다면 그때는…….
‘아니. 그런 일은 없다. 난 죽지 않아. 이런 곳에서 끝날까보냐!’
이렇게까지 몰린 것만 해도 더 없는 치욕이다. 헌데 여기서 목숨까지 잃는다고? 장차 티브리악의 당주가 되고 바크렌의 총독이 될 몸이? 세상에 농담도 그런 질 나쁜 농담이 있겠는가.
“저기! 저기 티브리악 놈이 있다!”
적들이다. 놈들은 어떻게 된 것이 이 불구덩이 속에서도 기운이 넘쳐흐르는지, 이쪽을 발견하기만 하면 눈 돌아간 개새끼처럼 달려들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응전하라! 죽고 싶어 안달이 안 놈들을 모조리 불구덩이 속에 처박아주어라!”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끄집어낸 삶에 대한 한 줄기 희망. 오직 그 한 가지만 붙들고 악으로 싸우는 제국군 병사들과, 불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티브리악’의 목을 찾아 헤매는 반란군 병사들.
“끄아아악!”
방패에 밀린 병사가 불길 속에 쓰러져 뒹굴었다. 쓰러진 그는 다시 일어설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삽시간에 달라붙은 불이 그의 이성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밀어붙여!”
밀어내려하고, 밀려나지 않으려 했다. 진형이고 뭐고 없었다. 불길이 심하지 않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양측의 병사들이 맞붙었다.
‘이것이 사선(死線)인가?’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를 근접 호위하는 병사 몇 명과 함께 적병들을 상대했다. 그를 지켜야 할 더 많은 병사들은 지금 여기저기 흩어져서 각자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는 총사령관인 그조차 칼을 들고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카앙!
묵직하다는 느낌은 아니다. 어렵지 않게 받아낼 수 있는 수준. 그러나 그 변변찮은 공격에도 유게르 티브리악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공격을 막아내고 곧바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그는 움츠려들었다.
“이익!”
칼을 휘두르는 대신, 힘을 주어 밀어냈다. 그 간단한 동작 한 번에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사방이 불타고 있는데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실전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직접 칼을 들고 적과 마주 싸우기는 처음이다. 고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고 자란 그가 어찌 이런 경험을 해보았겠는가.
스스로도 느끼는 추태에 그렇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곳은 그런 변명이 먹히는 곳이 아니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채앵!발악에 가까웠다.
오랜 세월 꾸준히 연마한 무공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몸에 익은 것이 있어 머리가 백지가 된 와중에도 칼은 절도 있게 움직였다.
촤악!얼굴에 피가 잔뜩 튀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저 눈앞의 적병을 베는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떨림은, 쓰러지는 적 뒤에서 나타난 또 다른 적. 무너지는 적병의 가슴을 뚫고 찔러오는 창을 눈에 담은 그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서걱!
시퍼런 창날이 흉갑을 찌르기 전에 창날 뒤의 창대가 싹둑 잘려나갔다. 창을 자른 검은 그대로 쓰러지는 적병의 목을, 그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적의 심장을 찔렀다.
“커흑!”
끊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그제야 유게르 티브리악은 자신이 다시 한 번 죽음의 문턱에 반쯤 들어섰다 나왔음을 깨달았다.
“너는…….”
자신을 구한 자. 낯익은 얼굴이었다. 군터의 휘하 무관으로서, 지휘관 회의에서 얼핏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이름이…….“모레인? 군터 장군 휘하의 무관이군.”
“그렇습니다 장군.”
모레인. 그는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모두가 살기 위해, 죽이기 위해 온갖 발버둥을 치는 이곳에서 그는 무척이나 차분해보였다. 그에겐 저 불길이, 저 불길 속에서도 같이 죽자고 덤벼드는 미친 놈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장군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허나, 보시다시피 길을 잡기가 쉽지 않아 많이는 데려갈 수 없습니다.”
“…….”
“스물 안쪽으로 추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가혹할 수도 있는 결정을 종용한다. 그러나 유게르 티브리악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코웃음 쳤다.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되어 보이는가?”
그 말에 모레인은 슬쩍 주변을 훑어 보고 답했다.
“열 명이 조금 넘는군요.”
“넉넉하군. 그렇지 않나?”
“…….”
연신 곁눈질로 주변의 상황을 살피던 모레인이 잠시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거지꼴로 변한 장군이 어서 가자는 듯 고갯짓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허면 이제부터는 소관이 모시겠습니다.”
* * *
호언했던 대로, 적장을 뒤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적지 않은 인원이었기에 보고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흔적도 남아 있었고, 거기에 군터의 초인적인 감각까지 더해진 탓이었다.
결국 오래지 않아 군터는 적장과 그가 이끄는 병사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너……!”
군터가 그를 보았을 때, 그도 군터를 보았다. 얼굴은 알아보지 못해도, 매복지에서 뛰쳐나오기 전에 멀찍이서 봤던 형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쳐라!”
전장에서 적과 마주쳤는데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적장, 카베르와 그의 병사들은 운이 좋지 않았다. 파헨델에서도 최정예인 군터의 친위대다. 거기에 그 선두에는 군터가 직접 창을 휘두르니, 아무리 기세가 올랐다 한들 카베르 휘하의 ‘잡병’들이 힘을 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채앵!
“커흑!”
첫 번째 공격은 어떻게든 받아냈지만, 두 번째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검과 함께 붕 떠서 나가떨어진 카베르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토했다.
“한 가지 묻지.”
“…미…친놈…….”
묻는다고? 이 지경까지 와서 대체 무엇을 묻는다는 것인가. 또, 무슨 대답을 기대한단 말인가.
설마 마지막 순간을 미친놈의 손에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던 카베르는 자신의 상황도 잊고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로크. 어디에 있나?”
“말해줄 것 같으냐?”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면 침이라도 뱉을 것 같은 표정. 군터는 살기등등한 카베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될 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