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유게르 티브리악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반란군이 저리 난장을 피우는 것이 악에 받친 발악임을 확신하면서도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의심도 잊지 않았다.
‘이게 만약 함정이라면?’
이런 무도한 짓거리가 그를 화나게 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 그렇다면 적들이 그것을 유도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나를 격동시켜 유인하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오.”
“그럴 수도 있겠군.”
군터는 선선히 수긍했다. 그러자 말을 꺼낸 유게르 티브리악이 도리어 무안해졌다.
‘짐작하고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의심을 해본다면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어렵지 않은 의심을 필요한 때에 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런 면에서, 그는 군터가 담담하게 반응하는 것이 조금 의외였다.
‘그러고 보면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 아닌가.’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자신이 군터라는 사내를 조금 낮추어 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오.”
“일단 확실한 건 아니오. 의심일 뿐이지. 허나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분명해.”
그가 택한 것은 정석적인 대처였다. 정찰에 보다 힘쓰는 것. 사실 그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적의 추격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길목이 좁은 산지라.”
매복하기에 적절한 장소. 거기다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오는 소식.
“이틀거리 정도 떨어진 평야에서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었을 때. 며칠 전이었다면 불같이 화를 내었을 유게르 티브리악은 화를 내기는커녕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토록 쫓던 놈들이 드디어 꼬리를 드러낸 셈이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상황이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빨리 쫓아오라고 일부러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유게르 티브리악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거나 대단한 군재를 익힌 인물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인정했다. 비단 군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그는 특별히 뛰어난 재주는 없었다. 단 하나만 제외하고.
‘의심스럽다.’
그는 의심이 많았다. 선천적으로도 그랬고, 후천적으로도 그렇게 길러졌다. 권력을 쥐려면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그 누구라도 의심해야 한다고 배웠다. ‘누구’든, ‘무엇’이든 다 의심하라고. 그래야만 크게 실수하거나 잃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 그의 경험이, 기질이 속삭이고 있다. 이건 의심스럽다고. 함정일 확률이 높다고.
“어떻게 생각하시오?”
“뭐가 말인가.”
“난 이게 놈들의 함정일 거라고 생각하오. 그래서 말인데…이용할 수 있을 것 같소만.”
“우회하라는 말인가?”
“세인(世人)들이 말하기를, 장군의 병사들은 산지를 평지처럼 오갈 수 있다더군. 심지어 기병까지도 말이야. 그 소문이 사실이오?”
“한 가지 말해두지 장군. 난 말을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유념하도록 하지. 그래서 말인데, 우회해 주시오. 적의 매복지로 예상되는 곳을 뒤에서 잡는 거지.”
“시선을 돌릴 방도는?”
“내가 놈들에게 이를 갈 듯이, 놈들 역시 그러하지. 내가 모습을 보이면 놈들의 시선은 집중 되고, 머릿속은 비게 될 거요.”
유게르 티브리악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군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
군터는 적장임이 분명해 보이는 자를 말 위에 앉아 내려다보았다. 당장 달려가 목을 베지 않은 것은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린 것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적장이 로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저 자는 로크가 아니었다.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렀다지만,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포진을 끝냈습니다.”
수하 장교가 다가와 말했다.
군터의 수하들이 아무리 날래다고 한들 그와 같을 수는 없다. 군터가 일찌감치 산을 올라 적들을 살피는 동안 그의 수하들은 기를 쓰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이제는 적을 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공격 명령뿐이었다. 그가 명을 내리면 그의 병사들은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아래쪽의 유게르 티브리악도 보조를 맞출 것이다.
“…….”
확인할 것은 다 확인했다. 미련 없이 명령을 내리려던 그때.
‘음?’
군터가 코끝을 찡그렸다. 익숙한 냄새가 그의 코를 간질였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절대 좋게 느껴질 수가 없는 냄새.
‘기름?’
틀림없다. 군터는 후각에 집중했다. 이 산에 스며든 모든 냄새가 그의 코에 흘러들어왔다.
“……!”
그러던 와중이었다. 멀찍이서 뒤통수만 보이던 적장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그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감이 좋은 녀석이군.’
활을 들까 하는 마음도 잠깐 들었지만 관두었다. 화살을 쏘아 맞출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기름이라.’
화공을 가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방향이 너무 제각각이다.
‘설마.’
문득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 누군가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말할 테지만, 이제껏 저들의 행적은 평범에서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정말 저지르려 할 수도 있다.
“퇴각신호를 보내라.”
“옛?”
수하 장교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눈을 크게 뜬 그 자신도 반사적으로 반문하고서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군터는 그런 수하를 책망하지 않았다.
“함정이다.”
그저 짤막하게 답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적장을 응시했다.
* * *
뿌우우우우-
길게 울리는 뿔 나팔 소리.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울리는 그 소리에 유게르 티브리악은 의아해 하기에 앞서 인상부터 찌푸렸다. 이것은 퇴각하라는 신호이며, 그 말인즉 일이 틀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틀어졌다고? 어째서?’
만에 하나 적이 매복해있지 않았다고 해도 퇴각을 할 이유는 없다. 그랬다면 우회한 아군과 합류하여 적의 흔적을 쫓으면 그만. 그러나 여기서 퇴각 신호를 보낸다는 것은, 적이 존재하되 이쪽이 손을 쓰기 힘든 상황이라는 의미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의 존재를 알고, 함정을 역이용 할 생각까지 했건만 어찌 여기서 일이 틀어질 수가 있겠는가.
‘무례하지만 머리가 없는 자는 아니다.’
그는 군터가 실수했을 경우를 떠올려보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따라야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저쪽의 오판이었다면 추후에 따져 물으면 될 일. 유게르 티브리악은 짧게나마 고심했지만 생각이 끝난 뒤에는 행동을 늦추지 않았다.
“퇴각하라! 적의 습격에 대비하면서 진형을 유지하며 물러난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까지도 어리둥절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적의 습격에 대비하라고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적이어서 그런지 발걸음을 돌리는 그들에게서는 별 다른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와아아아아!
산중을 울리는 거친 함성과, 그에 맞추어 일어나는 시뻘건 불길을 마주했을 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심지어 그런 그들을 다그쳐야 할 유게르 티브리악조차도.
* * *
‘이런 제기랄! 눈치 챈 건가?’
적이 갑작스레 방향을 돌렸을 때, 카베르는 이를 악 물었다. ‘어떻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후의 적이 신호를 보냈으리라는 것은 차치하고,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저들을 이대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뒤쪽의 놈들은 무시한다.’
적이 고지를 점하고는 있지만, 저쪽에서 이곳까지는 경사가 가파르기에 빠르게 여기까지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아주 조금이지만 시간은 있다.
“신호를 보내!”
풀이, 특히 마른 풀이 불에 잘 탄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풀 중에서도 유난히 불에 잘 타는 풀이 있다. 불씨 하나만 떨어져도 불길이 순식간에 전염병처럼 번져버리는, 그래서 이름마저도 염초(炎草)인.
찾기가 쉽지 않은 녀석이지만, 그것들을 최대한 구해서 산 곳곳에 깔아두었다. 적이 깊숙이 발을 디딘 순간, 모조리 불태워버리기 위해서.
“불을 붙여!”
적이 완전히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에게, 그들에게 다음은 없었으니까.
화르륵!
불이 치솟는다. 어두컴컴하던 산중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 불!”
“적이다!”
적들의 당황이 느껴진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다. 본래대로라면 저 다섯 배는 되어야 했다. 저 짐승 같은 놈들은 완전히 불길에 갇혀서, 불의 산으로 변한 사지에서 천천히 죽어가야 했다.
‘티브리악. 그놈만이라도 어떻게든…….’
오늘 밤, 이곳에서 죽을 것을 다짐했었다. 생명으로서 갖을 수밖에 없는 일말의 두려움마저 짓뭉개고서,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자! 우리는 모두 여기서 죽는다!”
병사들의 망설임이, 두려움이 느껴진다. 역시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했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허나 오늘 내가 죽더라도, 죽기 전에 반드시 저 티브리악 놈의 목은 치고 죽을 것이다! 그것만이 가족, 친구…내가 잃은, 내가 지키지 못했던 이들을 위한 속죄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마찬가지로 제국군에 원망을 가슴에 담고 있다.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은 분노다. 카베르의 일갈은 두려움에 약간 사그라졌던, 그들의 뜨거운 감정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티브리악이 저기에 있다!”
그는 누구보다 크게 외치고, 누구보다 먼저 뛰쳐나갔다. 함께 하고 있음을 보임으로서, 병사들의 마음속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망설임마저 지웠다.
“티브리악 놈이 저기에 있다!”
“제국 놈들을 쓸어버려!”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화살을 쏘고,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당황해 하고 있는 제국군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런 그들의 기세는 빠르게 번지고 있는 불길보다 작지 않았다.
“장군! 불길이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래쪽의 아군이 위태롭습니다!”
“…….”
다급한 목소리에도 군터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래는 그야말로 불지옥이었다. 아직까지는 불만 번지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앞뒤조차 분간하지 못하게 될 터. 저곳에 들어가는 건 그야말로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행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아군이 말려들었다고 해봐야 일부에 불과하다. 전체적인 비율로 보자면 3분의 1정도? 불길의 영향권에 들어간 3분의 1이 다 죽는다고 해도 3분의 2가 남는다. 차라리 저들을 버리고 적들까지 섬멸한다면…그리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 혼란 속에 발을 들일 필요는 없다. 불길이 미치지 않는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혹 빠져나오는 적들을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다만.
“유게르 티브리악이 저 안에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래. 그게 문제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저 불구덩이 속에 있다는 것.
“그는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도움이 되는 자입니다.”
“그건 네가 티브리악이기에 하는 말인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모레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기회에 그에게, 티브리악에게 더 큰 빚을 지우시라는 말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장군.”
“…….”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