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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28화 (528/1,064)

528화

“바테세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은 물론, 에인클 장군이 끌고 갔던 병사들까지 모두 전멸이오. 군터라고 했던가? 만만찮은 놈이 끼어들었소. 놈이 바테세에 닿을 때까지 놈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지. 이 또한 장군의 말처럼 우리가 방심했기 때문일까?”

“…그런 면도 있겠고, 적의 은밀함이 우리의 예상을 넘어섰기 때문이기도 하오.”

“허면 이제 어쩌겠소? 티브리악 놈도 밀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파헨델의 군대까지 합류했소. 병력의 수는 여전히 우리가 우위지만…….”

수는 앞서나, 질에서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회전을 벌인다면 열에 아홉은 이쪽의 패배일 것이다. 그것도 이쪽을 매우 후하게 쳤을 경우에.

“이렇게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왔구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오.”

“장군. 솔직해집시다. 난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소. 저 밖에 있는 병사들 대다수 역시 마찬가지일 거요. 그러니 괜한 거짓으로 위로할 필요 없소이다.”

“…….”

로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바라보던 사내, 카베르는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안타깝군. 에인클 장군이 그대의 말을 따랐더라면 조금은 나았을 것을.”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소.”

“맞는 말이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장군. 이제 어찌 할 생각이오?”

“적은 한껏 기세가 올랐을 거요. 시간 끌 것 없이 밀고 들어오겠지. 우리는 일단 물러나서 농성을 준비할 거요.”

“죽을 준비 말이오?”

“…아마도 그렇겠지.”

죽음을 말하며 이토록 담담해질 줄은 몰랐다. 하긴, 어디 수 천. 아니, 수 만 명을 이끌면서 ‘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알았던가? 인생이라는 것이 본디 기괴망측하여 종종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그러고 보면 군터 녀석도 그렇지.’

어렸을 적부터 봐왔다. 대단한 녀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진짜 장군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자신과는 다른, 제국의 유력한 황자에게 서임을 받은 ‘진짜’ 장군이 아닌가.

‘내 목을 가지러 오고 있는 것이냐.’

섭섭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각자의 위치, 각자의 사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뿐.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고, 그 하나하나에 성을 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렇다면 장군. 얌전히 저 제국 놈들에게 목을 내밀 생각은 아니시겠지?”

“그야 물론. 어째서 그런 것을 물어보시오?”

“장군이 제대로 각오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소.”

“각오?”

“그렇소. 각오.”

카베르가 옅게 짓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우리가 쓰러지고 나면, 아니 어쩌면 그러기도 전에 제국 놈들은 이 땅과 이 땅의 백성들을 유린할 거요. 내 한 목숨 잃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고, 아쉽지도 않소. 허나 저 제국 놈들이 우리가 죽은 후, 이 땅에서 온갖 짓을 벌일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소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거창하게…….”

“장군.”

카베르의 굳은 눈빛을 보고, 로크도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 * *

결집한 반란군은 서쪽으로 움직였다. 기세가 오른 아군을 피하겠다는 뜻이 훤히 읽혔다.

“이대로 놈들이 계속 물러난다면, 아마 닐스오르에서 멈출 것이오. 농성을 하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소.”

더 물러난다면 닐스오르보다 수비에 용이한 도시가 없지 않지만, 그곳은 너무 멀다. 거기에 닿기 전에 아군에게 덜미를 잡히리라. 적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테니, 결국 저들이 서쪽으로 물러나 농성을 하려 한다면 그들이 향할 곳은 닐스오르였다.

“서두를 필요는 없소. 어차피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니까.”

“놈들이 흩어진다면?”

“그렇다면 더 좋지.”

“무슨 의미요?”

“놈들을 상대해보지 않았소 장군. 놈들이 제대로 된 군대, 제대로 된 군인 같더이까? 아니. 아니지. 놈들은 그저 분노에 찬 민초일 뿐이오. 그런 놈들이 한 데 뭉칠 수 있는 것은 놈들이 가진 제국에 대한 복수라는 하나의 목표 때문이지. 놈들을 지휘하는 소수의 역도들이 그것을 끝없이 상기시키면서 전의를 유지하는 것이고.”

“흩어진다면, 더는 그러지 못할 거란 거군.”

유게르 티브리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정신을 차리고 잠잠해지거나, 기껏해야 도적질이나 하겠지. 흩어진 놈들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소. 노려야 할 것은 놈들의 머리. 한 놈이 죽었으니 이제 두 놈 남았군. 카베르라는 놈과, 로크라는 놈이오.”

“…….”

파헨델을 나서기 전. 군터는 바크렌에 와서 로크의 이름을 듣게 되면 어떤 기분이 될까 생각해보았었다. 그때 생각하기로는, 무언가 어떤 식으로든 감정의 흔들림이 있을 것 같았다. 오래 전이라고는 하지만, 한때 유일하게 친구라고 생각했던 녀석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입에서 로크의 이름을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그 어떤 감정도,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의외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시간이 흘러 과거의 기억이, 교분이 빛바랜 것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왠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로크.’

로크. 로크. 로크. 로크.

녀석과는 좋은 기억뿐이다. 초원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그는 외톨이였다. 어린 나이에도 강한 마음을 품었었지만, 낯선 땅에서의 지독한 고독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마음이 시들어가고 있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줬던 이가 바로 로크였다. 녀석이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음으로써 비로소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

“왜 그러시오?”

유게르 티브리악이 물었다.

군터는 답하지 않고 입 꼬리를 쓸었다.

한때, 녀석을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가 들리곤 했다. 그 기억을 떠올려 손을 가져다 대보았지만, 임 꼬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십 년 전의 청년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변하고 또 변했다.

‘너 또한 그렇겠지.’

당연히 그럴 것을 알면서도, 군터는 로크가 변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모습 그대로이기를 바랐다.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그랬으면 했다.

“장군!”

반란군이 서쪽으로 물러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급한 얼굴을 한 전령들이 앞 다투어 도착했다. ‘급보입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반란군 놈들이…놈들이 닥치는 대로 벌판과 산 등에 불을 놓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시작이었다.

“아뢰옵니다! 놈들이 거치는 마을마다 우물에 독을 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에도…….”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연달아 당도하는 전령들의 보고를 들으며 군터는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이, 이런!”

그것은 유게르 티브리악 역시 마찬가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보고들에 그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이를 갈았다.

“이놈들이 죽을 때가 다 되어 난장을 피는구나!”

반란군의 의도는 명확하다. 이 땅을 황폐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제국이 승리하고 이 땅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하도록.

“곧 죽을 놈들이 이 이상 날뛰도록 할 수는 없소! 서둘러 놈들을 추격합시다! 놈들이 참담한 짓을 저지르며 시일을 지체하고 있으니 우리가 서두른다면 놈들이 닐스오르에 당도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행동은, 바크렌의 총독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있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들이 저렇게 바크렌 서부를 황폐화시킨다면 장차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재물이 들어갈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서두릅시다!”

군터는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 바크렌이 황폐화 되든 말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유게르 티브리악의 말처럼 적이 닐스오르에 닿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다면 그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성벽에 의지하는 적과 싸우는 것보다는 야지에서 맞붙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

* * *

“장군. 제국군이 닷새거리까지 따라붙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카베르가 입매를 비틀었다.

“생각대로 움직이는군.”

“모든 것이 장군의 계획대로입니다. 허나…괜찮겠습니까?”

“걱정 되느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괜찮다. 성공할 것이다. 지금쯤 티브리악 놈의 눈이 아주 제대로 뒤집혔을 테니까.”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그런 놈들을 아니까. 놈은 이미 이 땅이 제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 게다. 그러니 놈은 우리가 제 놈의 재산을 상하게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겠지. 봐라. 실제로도 놈이 입에 거품을 물고 따라오고 있지 않으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실은 다른 게 불안한 것이 아니냐.”

“옛?”

카베르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수하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눈앞의 수하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 잃었다고는 하지만, 진정 다 잃은 것은 아니니까.’잃을 게 없다고 떠들어대지만, 사실 그들 모두에게는 남은 게 있다. 목숨. 그리고 마음.

그 누가 죽음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죽음을 겪은 적이 없기에, 죽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입을 놀린다면 그것은 허세에 불과할 터.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흔들릴 수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카베르는 수하를 책망하고 싶지 않았다.

“로크 장군이 함께 했다면…조금 더.”

카베르는 로크의 이름이 나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마라. 우리와는 다른 선택을 했고, 결국 갈라졌으니 우리는 우리의 일만 생각하면 된다.”

로크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를 말리려 했다. 차라리 닐스오르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자 했다.

‘마음이 물러.’

딱 떼어놓고 보면 꽤나 괜찮은 사내다. 지휘관으로서 믿고 따를만한 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독심이 부족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제국에, 티브리악 놈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불같은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카베르의 방식은 남은 자들의 고난을 낳을 거라 했다. 나름대로는 설득을 하려고 꺼낸 말이었겠지만, 그의 말은 카베르의 반감만 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자가 뭘 또 다시 그리 많이 가졌단 말인가.’

이것저것 다 생각하고 따지면서 싸울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 한들 그래서는 안 되고.

“준비해라.”

“옛.”

* * *

이름 모를 야산.

제국군은 거친 길을 헤치며 추격을 이어갔다.

“이 산만 지나면 완만한 땅이 나온다. 모두 힘을 내라!”

이런 산길에 들어서기 전에 어지간하면 병사들에게 휴식을 줄 법도 하건만, 유게르 티브리악은 아랑곳 않고 야간 행군을 명했다. 어제 아침에 또 다시 세 개의 마을이 완전히 전소 됐다는 보고를 들은 것 때문인 듯했다.

“…드디어 왔군.”

카베르는 무성하게 자란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제국군을 내려다보았다.

“좋아. 이제…….”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려던 순간.

“……!”

그는 불현듯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매복해 있는 지점의 뒤편의 위쪽. 길게 튀어나와 있는 바위.

그곳에, 웬 사내가 있었다. 커다란 말에 타고, 이쪽을 내려보고 있는.

“…….”

그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내는 틀림없이 언제인지 모를 전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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