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두 개의 깃발이 휘날린다.
하나는 제국기. 또 하나는 가문기다. 간단한 선과 그림으로 웅장함을 표현하는 제국기와 달리, 가문기는 한껏 멋을 내어 화려했다. 그런 화려함을 두고 누군가는 다분히 귀족적이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천박하다 할 것이다.
“대단하군.”
무관은 멀찍이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보며 감탄했다.
저곳에는 그가 거느린 병사들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의 병사들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서 적을 밀어붙이고 있는 우군이었다.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유명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근자에 들어 그 이름이 가장 많이 회자되는 사내였으니까 말이다. 세레온 우슈무르의 뒤를 이은 야만족 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귀를 닫고 있어도 들릴 지경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것들뿐이었다. 어느 것은 대단했고, 또 어느 것은 터무니없었다.
그렇다. 과장됐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것은 인정해도, 소문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그의 무명 역시 어느 정도는 부풀려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병력을 더 투입한다.”
“예? 하오나.”
안다. 이제껏 적들을 막아서는 동안 입은 피해가 상당하니, 여기서 더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 제대로 한 손 보태지 않는다면 도저히 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았다.
“적들을 쓸어버리는 동안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냐?”
그리 반문한 무관은 투구 끈을 조이며 말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
* * *
중장기병이 정면에서 적을 들이받는다. 그들이 적진을 돌파한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지만, 그러지 못한다 해도 문제없다. 적들이 정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측면으로 돌아간 궁기병들이 적의 옆구리를 찌르니까.
“적이 옆에서도!”
“방패 들어!”
신경이 분산된 적은 이즈음에는 작게나마 혼란에 빠진다. 그러면 중장기병의 뒤에서 부지런히 달려온 보병이 활약할 무대가 만들어진다. 그들은 앞서 기병이 열어놓은 길을 넓히고, 적을 완전히 찢어놓는다.
“십인 일조! 뭉쳐라!”
열 명이, 백 명이 하나처럼 뭉쳐 움직인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사각을 가려주며, 적을 찌를 때 힘을 보탠다. 말은 쉽지만 자기 한 목숨 건사하는 데만 눈이 벌게지는 전장에서 그러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고된 훈련과 실전경험을 두루 거친 정병들만이 그럴 수 있다.
“밀어!”
그리고 군터의 병사들은 그 조건에 부합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용맹했고, 냉정했다. 전장에서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머리로도 몸으로도 완벽히 알고 있었다.
“중앙이 뚫리고 있지 않느냐! 병사들을 더 집중시켜라!”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장군! 적이 양 측면에서…….”
“화살을 맞을까 두려우냐!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만 신경 쓰다가는 바로 앞의 칼에 맞아 죽을 것이다! 어서 병사들을 중앙으로 밀집시켜!”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다만 그의 실책은, 양 측면에서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기병이 그저 견제의 역할만을 맡았을 거라 속단했다는 점이다.
그럴 만한 근거는 있었다. 우선 전투가 시작됐을 때부터 거리를 벌리며 주구장창 화살만 날려대고 있었던 데다, 멀리서 보기에도 정면에서 돌파해 오는 기병들과는 달리 무장이 상대적으로 부실해 보였던 것이다.
“병력을 돌리는군.”
“멍청한 녀석.”
적장의 판단은 파헨델군이 기다리던 것이었다. 정확히는, 기다리고 있던 반응 중 하나였다.
“장군께서 먼저 움직이실 거다. 틈을 놓쳐서는 안 돼.”
보통이었다면, 적장의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경기병이 돌파를 하는 것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비효율적인 방식이니까.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적의 신경이 정면에 집중되어 있고, 방비가 허술한 측면을 찌를 공격의 선봉은 다름 아닌 군터.
콰앙!
우측면. 지금까지 빙빙 돌며 화살만 쏴대던 기병들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지 않는 적의 옆구리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기병이 돌격해 오는 것을 보고 일부 병력이 방향을 돌렸지만, 그들이 세운 벽은 군터가 휘두른 창 한 자루에 단박에 균열이 갔다. 가시처럼 뻗은 긴 창을 잘라내고, 땅에 박아 세운 방패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군터는 그렇게 생긴 틈을 거칠게 헤집고 들어갔다. 그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수하들이 있기에 그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서걱!
쉼 없이 창을 휘둘렀다. 잘린 목이, 몸뚱이가 연신 허공에 떠올랐다. 짙은 안개처럼 혈무(血霧)가 시야를 가리지만, 군터의 눈은 미리 봐둔 적장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질기군.’
바테세에서 상대한 적들과는 전혀 달랐다. 바테세에서 싸웠던 적이 다 시든 풀잎이라면 이들은 억센 잡초였다. 아무리 베어내고 베어내도 밀리지 않았다. 죽음으로 그의 발걸음을 붙잡겠다는 듯 생사를 내던지고 덤벼들었다. 그런 적을 베어가며, 군터는 순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교의 사술에 현혹되어 이지를 상실했던,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체라는 말이 어울렸던 병사들.
고통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그들은 꽤나 까다로운 적이었다. 이제껏 그가 상대해 본 적들 중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지금.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란군이 그때의 그 살아있는 시체들과 비슷했다. 고통은 느끼지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움츠려들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 그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잃은 것들로 인한 원한. 그리고 제국에 대한 분노.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분노케 하였는가. 무엇이 이 허약한 자들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로 만들었는가.
아주 잠깐. 아주 살짝 궁금해졌다. 아니, 그것은 의문이 아닌 흥미였다. 군터에게는 그들이 엉성하게 휘두르는 창과 칼보다, 부릅뜬 그들의 두 눈이 더 신경 쓰였다.
물론. 그런 흥미를 느낀 것은 상술했듯 아주 잠깐뿐이었다.
‘일어나라.’
한 손으로 쥔 창을 쭉 찌르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허공의 무언가를 움켜잡듯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기운이 주먹 쥔 그의 손에서 퍼져 나갔다.
그어어어…….
시체들이 일어났다.
조금 전 함께 싸우던 동료가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제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 이들이라고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 시체들이!”
“사령술이다! 당황하지 마라! 저 자가 적장이다! 적포장군 군터다! 저 자의 목을 베면 우리가 승리한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지휘관의 노력은 가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군터는 시체들로 적의 공격을 받게 하고, 적이 시체들과 엉킨 사이 곧바로 다시 돌파를 이어갔다. 시체들은 사지가 잘려도, 몸이 꿰뚫려도 멈추지 않고 움직였으니 그들이야말로 최고의 활받이며 칼받이였다.
“막아! 저 놈의 목을…….”
끝까지 병사들을 독려하던 지휘관의 목이 창에 꿰뚫렸다. 군터는 쓰러지는 그에게 시선을 떼고 창을 뽑아 들었다.
‘괜찮군.’
굳이 목을 길게 빼고 돌아보지 않아도 전황이 어떤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 기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했던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적의 측면을 친 사이에 반대쪽에서도 틈을 비집고 들어왔고, 그로 인해 전면의 아군은 훨씬 약해진 적의 압박을 뚫고 밀어붙이는 중.
적장은 오판했다. 그는 가장 규모가 큰 중군이 주공(主攻)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 주공은 없다. 있다면 중군이 아니라 측면으로 돌아온 우군(右軍)이 주공이다.
적장의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일일 터였다. 설마하니 몇 겹이나 세운 방진을 힘으로 뚫어버리는 초인이 있다는 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지금쯤 적장은 이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있으리라.
와아아아-!
지금까지도 충분히 시끄러웠지만, 지금 터져 나온 함성은 그 이상이었다. 군터는 적의 군기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저 함성이 들려오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쉽게 알아차렸다.
‘해냈군.’
용맹하게 적진을 가로지른 수하 하나가 적장의 목을 베었음이라.
* * *
“오랜만이오 군터 장군. 테리브란의 연회에서 보고난 이후 처음이로군.”
“그렇구려.”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장군’으로 불린다 해도 위장인 군터에게 무위장인 유게르 티브리악이 평대한다는 것은 무례였다. 허나 군터도, 유게르 티브리악도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유게르 티브리악은 장군이 아니라 하더라도 ‘티브리악의 후계’라는 자리 하나만으로도 누구에게나 존중 받을 수 있는 자였다. 그나마 그가 스스로 상석에 앉지 앉고 마주보는 자리를 택했다는 것만 해도 그는 나름 군터에게 예를 차리고 있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기였소. 그대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험한 꼴을 보았을 수도 있소.”
볼 수도 있었던 게 아니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군터는 굳이 그런 사소한 점을 짚지는 않았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마지막 자존심을 꺾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앞으로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글쎄. 나중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흐음. 옳은 말이오. 바테세를 탈환하고 적도의 무리 하나를 잡아냈다고는 하나, 아직 둘이 더 남았소. 바크렌의 서부는 여전히 반란군 놈들의 수중에 놓여 있고.”
셋 중 하나를 잡았으나 나머지 둘은 건재하다. 그리고 그 둘은 얼마 전에 하나로 뭉쳤다. 군터가 유게르 티브리악과 만나기 위해 잠시 시일을 지체하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대가 이 땅에 온 것을 이제 적들도 알게 됐소. 경각심을 가지겠지. 이제부터 놈들은 한층 더 신중하게 움직일 거요.”
“달라지는 건 없소. 우리는 서진할 것이고, 적은 우리를 막아서겠지.”
직설적이다 못해 저돌적이기까지 한 말이었으나,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런 군터의 화법이 마음에 들었는지 픽 웃었다.
“시원시원하군. 좋소. 이 치욕적인 싸움을 하루라도 빨리 끝낼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선봉은 내게 맡겠소.”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하시오. 허나.”
“총독의 공에는 관심 없소.”
유게르 티브리악의 웃음이 진해졌다.“말이 잘 통하는군. 이런 사내인 줄 알았다면 진즉 이야기를 나눠볼 것을.”
군터는 그가 무언가 즐거운 착각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관 없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그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서진합시다. 이 땅에서 불온한 종자들이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철저히 짓밟아버리는 거요.”
“…….”
군터는 답하지 않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을 들어올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