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그들은 계속 공격을 이어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가 빠졌다. 그냥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재차’ 주장하고 있다. 한 번 안 된다고 말을 했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이다.
“…….”
로크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분을 삭이던 그는 끝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있습니다.”
로크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수하조차도 ‘그들’과 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자신? 아니. 자만이다. 한 번의 승리가 그들을 취하게 한 것이다. 제국이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세 번을 이겼으나 동시에 세 번을 패했으며, 무수한 병사들을 잃었다. 그렇게 거둔 승리를 승리라 할 수 있는가? 여기서 더 밀고 들어갈 만한 여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여기서는 일단 멈춰서 군대를 정비하고, 전면전에서 승리를 거둔 사실을 널리 알려서 아직 망설이고 있는 백성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런 연후에?’
그래. 그런 연후에…무엇을 하지? 아니. 그 후에 무엇이 있는가. 더 본격적으로 군대를 투입할 것이 분명한 제국을 상대로?
‘내 생각대로 한다고 해도…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패배의식에 찌든 것이 아니다. 이게 현실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달라지지 않는 현실. 그리고 미래.
‘어쩌면.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일지도.’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복수심이다. 그 열기가 그들을 눈 멀게 했다고 여겼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면, 당장 끓는 원한이라도 풀어내자는 것일지도.
‘백성들을 더 끌어 모으고 군세를 불린다면, 그들 역시 사지로 내모는 꼴이 아닌가.’
마음이 바뀌었다.
‘이대로 간다.’
옳고 그르고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러고 싶지 않을 뿐. 그리도 욕하던,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취급하는 권력자들의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집결할 것을 명한다면 그들이 따를 것 같은가?”
“저희 모두는 장군을 따릅니다. 장군께서 명하신다면 응당…….”
“진심을 말하게.”
“…따르지 않겠습니까?”
애초부터 그를 진정 ‘대장’으로 여기는 이는 많지 않았다. 한 번의 승리 후에 이름을 날린 후에 그를 찾아온 이들에게 있어 그는 어디까지나 ‘대표’일 뿐이었다. 어느 정도 존중은 해주지만, 복종은 하지 않는다.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따라 줄지는 의문이지만, 로크는 일단 승리한 두 명의 대장과 패했지만 목숨을 건진 한 명의 대장에게 집결할 것을 ‘요청’했다.
* * *
“장군. 유게르 티브리악 장군과 합류하지 않으십니까?”
군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짤막하게 답했다.
“합류하지 않는다.”
“예? 어째서?”
“적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게 되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런 움직임은 너무 평범하다. 적이 예상하고 있을 테니, 이쪽의 존재를 금방 들키게 될 터. 시간은 시간대로 날리면서 적을 상대하는 것 또한 어려워질 것이다.
“허면…이대로 갑니까?”
“군기도 군율도 없는 반란군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할렌이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말끝을 흐렸다.
“정찰대를 두 배로 풀어라.”
파헨델을 나서면서부터 군터는 군대를 운용함에 있어 은밀함과 신속함을 가장 중시했다. 정찰대 겸 선발대를 다수 보내어 적의 눈이 있는지를 철저히 살피는 한편, 일부러 포장된 길을 멀찍이 벗어나 험지를 통해 이동했다.
“적의 배후를 친다.”
파헨델을 나서기 전. 군터는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전할 것을 밝히면서 전선을 유지하거나, 뒤로 물러줄 것을 요구했다. 적이 전선에 발이 묶이면 자신이 적의 뒤를 잡겠다는 것이었는데, 군터는 유게르 티브리악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답도 기다리지 않고서 빠르게 군을 움직인 것이고.
“장군께 아룁니다!”
한창 이름 없는 산을 타며 이동하던 중. 미리 지정한 접선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령이 현 전황과 유게르 티브리악의 전언을 전했다.
“적이 군대를 나누어 일제히 쳐들어왔고, 여섯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아군은 포토른, 헤치스, 벨타비브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제카, 바테세, 볼타나이아에서 패하였습니다. 모두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한 치열한 전투였고…….”
파헨델에서 군사를 이끌고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런 대전투가 있었다니. 그보다 적이 군사를, 그것도 여섯으로 나누어 일제히 밀고 들어왔다는 것이 꽤 놀라웠다.
‘적절한 판단이다.’
적은 수가 많다고 하나 이곳저곳에서 모인 잡졸들. 일반적인 군대와는 달리 크게 뭉친다고 해서 전투의 효율이 늘어나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차라리 이쪽이 대응하기 어렵도록 군을 나누어 움직여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그나저나 절묘하군.’
세 곳의 승리. 세 곳의 패배. 누가 짜 맞추기라도 한 것 같은 비율이 아닌가. 그야말로 박빙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적이 공세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나 충격적인 결과다. 양측이 정말로 우열을 점칠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는 것이니까.
“유게르 티브리악 장군께서는 군터 장군께서 바테세로 향해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바테세라.’
패배한 세 곳의 전장 중 가장 남쪽이다.
‘그곳에 녀석이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전장이니 피할 이유는 없을 터.
“바테세로 가겠다. 그곳의 지휘관에게 전해 내가 가기 전에 놈들의 시선을 끌도록 하라.”
“반드시 그리 전하겠습니다.”
전령을 보내고, 군터는 군사들에게 짧은 휴식을 부여했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말이 지치는 것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기병은 그의 창과 같으니, 말이 지쳐 기병이 제 힘을 못 내게 되면 창의 창날이 꺾이는 것과 같다.
“들어라.”
산중에 마련한 야영지에서, 군터는 휘하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바크렌의 지도를 펼쳤다.
“바테세는 이곳이다.”
도시가 아니다. 자그마한 성이다. 그러나 바크렌 남부의 주요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일종의 보급 거점이라 할 수 있었다. 성이 자리한 곳을 중심으로 한 일정 거리를 제외하고는 험한 산지가 대부분이라 교통이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바크렌 남부의 동서를 잇는 거점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름 요충지라면 요충지지만 수비가 용이한 지역은 아니다. 성의 규모가 크지 않기에 주둔할 수 있는 병사의 규모가 작은 탓이다.
“성을 공략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관건은 성을 점령하고 난 후.”
담담하게 이어지는 군터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곧 전장으로 나가 생사를 걸고 싸우게 될 그들의 눈은 잔속의 물처럼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곳의 아군이 제대로 일을 해준다면 우리는 적의 뒤를 잡게 되겠지. 바테세가 함락된 것을 적이 알지 못하게, 혹은 알기 전에 놈들을 쳐야 한다.”
“미리 추격대를 편성해두어야겠군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허면?”
“미리 병사를 바테세 동쪽으로 보낸다.”
“그러면 시일을 지체하게 될 겁니다.”
“밤낮으로 이동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면 병사들이…….”
“전투를 치르고서 도망치는 적들 역시 지치기는 마찬가지다. 말이 있다면 놓칠 일은 없겠지.”
가혹한 명령. 하지만 거부감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군터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설령 그 명령이 더할 수 없이 무모하거나, 가혹한 것이라 할지라도.
게다가 지금 이 명령은 힘들기는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일리도 있었다. 먼 길을 쉼 없이 이동한 병사들과 전투를 치르고서 도주하는 병사들, 어느 쪽이 더 지쳐있을지는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을 것이니.
“오늘 밤은 푹 쉬어라. 내일부터는 속도를 낼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는 속도를 내지 않고 설렁설렁 왔다는 것인가. 몇몇 지휘관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부터는 상당히 힘겨운 시간이 이어질 것이다.
* * *
군터가 이끄는 군대는 곧장 바테세로 진격했다. 험한 산을 내려온 군대는 지친 기색 없이 움직였다. 산을 내려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나절 동안 휴식을 주었던 것이 주효했다.
와아아아아-!
바테세의 적군이 반응할 즈음, 군터가 이끄는 군대는 엉성하게 수리한 성문을 뚜렷하게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
“어, 어디서 나온 적이야!”
“화살을 쏴!”
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엉성하게 쏴대는 화살은 파헨델의 군대를 조금도 멈추지 못했다.
‘엉망이군.’
군터는 힘없이 날아오는 화살을 창으로 쳐내면서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적은 더 형편없었다. 대체 이런 적에게 어떻게 질 수가 있는 것인가 싶어, 유게르 티브리악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의 복구도 형편없고……. 전투가 끝난 뒤. 게다가 후방이라 긴장이 풀리기라도 했던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이리도 허술할 수는 없다.
콰앙!
엉성한 성문은 군터가 창 한 번 휘두르니 그대로 뚫렸다. 애초에 제대로 된 성문도 아닌, 큼직한 나무 판 여러 개를 난잡하게 붙여놓은 것에 불과했다.
“성문이 열렸다!”
적들의 저항은 크지 않았다. 성문이 뚫리고, 군터와 기병들이 성내로 진입해서 날뛰기 시작하자 적 병사들은 반대편 성문을 열고 도망쳤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이 물러서지 말라고 악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등을 돌린 병사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거니와, 그들이 목소리를 제대로 내기도 전에 군터의 화살이 그들의 벌린 입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도망쳐!”
성에 남은 군사는 파헨델의 군사에 비하면 수적으로 비할 수 없이 소수였지만, 단지 그 때문에 그들의 기세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성문이 박살났을 때. 뚫린 성문으로 커다란 말을 탄 적이 들어왔을 때.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그들을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영문 모를 흔들림은 두려움을 불렀다. 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싸웠을 때 그들이 품고 있었던 독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무모함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으으으!”
그래서 그들은 도망쳤다. 지극히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훈련도 받지 않은 채, 군율을 습득하고 군기를 세우지 않은 채 불타는 감정 하나만을 가지고 전장에 뛰어들었던 이들은 그 감정이 꺾이자 놀랍도록 무력해졌다.
“왔군.”
성을 빠져나온 그들을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맞이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반대쪽에 숨어있던 병사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전원이 기병이었기에, 정신없이 달려 도망친 적들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뒤에서는 성을 그대로 돌파한 추격대가 따라붙고, 앞에서는 미리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막아서니 성을 탈출한 적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도 예외 없이 차가운 땅 위에 쓰러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