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장군! 승리입니다!”
잔뜩 들뜬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이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쉴 대로 쉰 목이 갈라지고 터져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다치고 지친 몸 어디에서 저런 기운이 솟아나는 것일까. 로크는 그것이 의아했다. 전투에 직접 뛰어들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지휘만 한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녹초가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나이를 먹은 게지.’
젊었을 적에는 그 역시 저랬던 것 같았다. 저들처럼 용맹하게 싸웠고, 전투가 끝난 후에는 남은 힘을 짜내어 함성을 내지르기도 했었다.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다소 미화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억 속에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은 그랬다. 팔 한 쪽을 잃고 군인을 그만두기 전에는.
“장군. 우리가 이겼습니다!”
활짝 웃기라도 하라는 것일까.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이 기쁨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는, 로크는 웃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기기는 했지만 대충 보기에도 피해가 상당했다. 정말 이기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 한 곳에서만 벌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긴 곳도, 진 곳도 있겠지.’
이제 며칠 안에 속속들이 소식이 당도할 것이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거라는 것.
‘수천, 수만이 내 한 마디로 죽어나가는군.’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으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숨이 막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로크는 자신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숨이 막히는 것을 넘어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두려움일 것이다.
‘차라리 나가서 싸우다 죽는다면,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저 많은 이들이 싸운 이유. 죽은 이유. 그것은 어쩌면 거짓된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거짓은 로크 자신이 심어준 것일 터. 그렇다면 자신은 이 무수한 이들을 속이고, 죽음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게 장군의 일인가.’
문득 떠올랐다. 못 본지 오래 된, 자신 이상으로 무수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친구의 얼굴이.
‘군터.’
기억하는 모습은 젊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 하지만 지금의 그는 기억 속에 남은 것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못 알아볼 정도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친구는 제국의 흑포장군도, 한 전투에서 백 명을 베어 넘기며 죽은 자들을 일으킨다는 사악한 악귀도 아니었으니까.
들려오는 소문은 하나같이 흉흉하고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옛 친구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우스운 말이지만, 이것이 진정 그의 마음이었다. 다시 보게 된다면 분명 반갑겠지만, 둘 중 하나는 나머지 하나의 죽음을 봐야 할 테니까.
‘오지 마라.’
되도록 녀석의 기억 속에 안 좋은 모습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을 기억하는, 어쩌면 세상에 남은 단 한 사람일 수 있기에.
* * *
유게르 티브리악의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전령이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표현한 것은,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자가 그저 그런 잔챙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터 장군을 뵙습니다. 티브리악을 섬기고 있는 토린 몰비드라 합니다.”
귀족이었다. 또한 유게르 티브리악이 아니라 ‘티브리악’을 섬기고 있다고 했다.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들어본 적은 있었다. 귀족 가문이면서도 또 다른 귀족가를 섬기는 이들. 어찌 보면 자존심도 없다 할 수 있고, 실제로 다른 유력가문들에게서 그런 은근한 비웃음을 듣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귀족이었다. 또한 대개의 경우, 강대한 귀족 가문의 측근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기에 그들의 권세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뒤에서 비웃음을 살지언정 앞에서는 충분한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지?”
먼저 존대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군터는 아무렇지 않게 아랫사람을 대하듯 말을 놓았다. 그에 토린 몰비드는 순간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유게르 티브리악 장군의 전언입니다. 이미 들으신 바가 있겠지요.”
그 말대로다. 군터는 토린 몰비드가 오기 전에 아드리안의 서신을 받았다. 그 서신에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것도 쓰여 있었다.
“티브리악의 뜻인가?”
“유게르 티브리악 장군은 티브리악의 정당한 후계자입니다. 그의 뜻이 곧 티브리악의 뜻이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굳이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를 못 느끼겠군.”
“어째서입니까?”
“내가 왜 유게르 티브리악을 도와야 하지?”
“돕는 게 아니라…….”
바크렌의 반란군은 파헨델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히 진압이 가능하다. 그쪽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어. 만약 유게르 티브리악이 실패한다면, 그때는 내게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기는 셈이지. 단지 그뿐이다.”
오만하다.
단번에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토린 몰비드는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맡은 임무도 임무지만, 이곳에 온 뒤부터 이상하게 위축되는 몸과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전에 봤던 때와는 전혀 다르군.’
사실 그는 군터를 보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일전에 테리브란의 조정에서도, 연회장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군터와 지금의 군터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큰 몸을 넉넉하게 기댈 수 있는 가죽 깔린 의자에 앉은 그는 한 마리 맹수 같았다. 아니, 맹수조차 부족하다. 그 이상으로 흉험한 무언가. 껍데기는 사람이었으나, 전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분위기와 기세.
“…다른 관점에서도 봐 주시지요.”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절로 등이 축축해지고 혀가 경련을 일으켰다. 짧은 한 마디를 뱉기 위해 그는 심호흡을 몇 번씩이나 거듭해야 했다.
“유게르 티브리악 장군을 도우시는 게 아니라, 티브리악을 도우시는 겁니다. 티브리악은 결코 빚을 잊지 않으며, 친우를 대하는 데 있어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티브리악과 친우가 될 생각은 없다.”
이 얼마나 오만한 언사인가. 다른 이가 그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치거나 쓴맛을 보여줬겠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내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그런 오만함이 그에게는 더 없이 어울렸다.
“장군의 정치적 입장 때문입니까?”
“권신들의 권력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티브리악의 편에 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빚을 하나 지워놓는다고 생각하십시오. 장군께서 이번에 도움을 주신다면 티브리악은 장군께 빚을 질 것이며, 또한 호의를 가질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요. 지금도 손 꼽히는 명문이지만, 바크렌 안정화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는 티브리악의 위상이 한층 더 높이 올라갈 것입니다. 그런 가문이 장군께 호의를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장군께서 티브리악과 크게 갈리는 행보를 보이시지만 않는다면, 티브리악은 장군을 지원할 겁니다. 장군께서 원하시는 때, 원하시는 방법으로 말이지요.”
“…….”
그는 초조하게 답을 기다렸다. 물론 겉으로는 평온함을 연기했지만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애써 감춘 초조함이 기어이 고개를 들려 할 즈음, 기다리던 답이 돌아왔다.
“좋다.”
토린 몰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탁월하신 결정입니다. 저는 이제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 유게르 티브리악 장군에게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도록. 배웅은 하지 않겠다.”
“예.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토린 몰비드가 돌아가고, 군터는 살라스에게 눈길을 주었다.
“준비해라.”
“병력은 얼마 정도를 생각하십니까?”
“삼천.”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아드리안이 천오백을 거느리고 가 있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군대도 있으니, 병력이 부족하지는 않겠지.”
“예. 그렇다면…….”
“직접 가겠다. 너는 이곳에 남아 날 대신하거라.”
“…예.”
살라스마저 나가고, 군터는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티브리악의 제안은, 썩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토린 몰비드도 말했듯, 티브리악 정도의 가문에 빚을 지워놓는 것은 확실히 괜찮은 일이다. 말로는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긴다느니 어쩌느니 떠들어댔지만, 어차피 유게르 티브리악이 무너진다고 해도 그 뒤의 일을 자신에게 맡길지는 모르는 일이다. 자신을 견제하는 이들은 티브리악 외에도 여럿 있으며, 그들은 여전히 테리브란의 조정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
설령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 군터가 유게르 티브리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그런 복잡한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로크.’
옛 친구. 그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보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도 궁금했다.
‘만나고 싶다.’
강한 끌림은 아니다. 살갗을 가볍게 간질이는 것 같은, 그런 근질거림.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온통 어두컴컴한 세상에서는 티끌만한 불씨 하나가 태양처럼 강렬하게 느껴지는 법.
미동(微動)이라 할지라도, 얼마만의 떨림이란 말인가.
‘너는 나를 기억하겠지.’
바람 아닌 바람.
그 하나로, 군터의 마음은 움직였다.
* * *
여섯 곳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그 전투들에서 제국은 세 번 승리했고 세 번 패했다. 이는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결과였다. 때문에 그는 바크렌에 온 뒤 처음으로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성가신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머릿속에 크게 떠오른 ‘패배’라는 단어가 그를 각성하게 했다.
“적 병사들 중에는 백발의 노인도, 덜 자란 아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적이 그야말로 총력전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것을 아는 게지.”
그렇다고는 하나, 설마하니 이렇게 과감하게 치고 올 줄은 몰랐다. 아니, 이건 과감함도 아니다. 무모함이다. 이건 다 같이 죽자는 식이 아닌가.
‘지독한 놈들이군.’
이런 적은 상대해본 적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세가 꺾일 줄도 모르는 군대라니. 말만 들으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군대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뜩하기 그지없다.
‘그래. 내가 만든 괴물이군.’
자초한 결과다. 누굴 탓하겠는가.
“파헨델에서는?”
“군터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출발했다 합니다.”
그나마 안심이 되는 소식이다. 암담하기만 한 전황에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자고 덤벼드니, 어울려주는 수밖에.’
어차피 뒤가 없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가문의 숙원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가문도 가문이지만, 후계자의 자리도 위태로워질 터.
“이제부터는 총력전이다.”
각오를 다진 목소리가 서늘하게 흘러나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