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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24화 (524/1,064)

524화

“장군.”

“장군을 뵙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장군’이라 불렀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자그마한 승리 몇 번을 거두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 ‘장군’이라는 호칭은 그를 옥죄어왔다. 그들의 목소리, 바라보는 눈빛까지.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졌다.

하나같이 지친 얼굴들이지만, 그 눈에는 희망이 있다.

그래. 희망.

그들의 눈을 통해 보이는 그 밝은 빛이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게 했다.

‘희망이라니. 무엇에 대한 희망이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몇 번의 승리가 그들을 낙관주의자로 만들어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우리는 이길 수 없다.’

미래는 점칠 수 없다고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제국은 강대하며, 그들에 맞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죽음 밖에 없다.

그럼에도 맞선 것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삶에 미련도 없었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들고 일어섰다. 미련 없는 삶을 끝낸다면, 원하는 대로 한바탕 분노라도 해보자는 생각에서.

그러나 지금. 이들은 희망을 품고 있다. 터무니 없는 미래를 보고 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과 죄책감이 그를 좀먹었다.

“대장님.”

“음?”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발이 느려졌었는지, 저만큼 앞서 나간 부하의 모습이 보였다. 의아한 표정을 하고서,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혹 몸이 불편하기라도 하신 건지.”

“아니.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했네. 가지.”

성내에 마련해놓은 막사로 이동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번듯한 숙소에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었지만, 지금은 이 흉한 성 한복판에서 바람도 못 막는 막사를 치고 머물고 있었다.

“함께 하겠소?”

그의 막사에는 다른 이가 함께 있었다.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풍기는 기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빛이 범상치 않은 사내가.

“함께 한다면 제국 놈들을 다 쳐죽일 수 있소?”

“그건 불가능하오.”

“당신은 하지 않았소.”

“운이 좋았을 뿐. 게다가 내가 상대한 것은 진압군의 일부이고, 그마저도 가까스로 물러나게 한 것에 지나지 않소이다.”

“어찌 이리도 약한 소리를 하시오? 들은 것과는 다르군.”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줄 수도 있소. 다만 난 거짓말을 하기를 원치 않을 뿐이오. 거짓으로 속여서 동지를 늘린들 무슨 소용이겠소?”

“…….”

“제국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 그것을 모른다면 어리석은 자일 테지만, 그대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지 않소? 사실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그럼에도 그리 말하는 것은 알아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거나, 날 시험할 생각이었기 때문이겠지.”

“하하하하!”

사내는 호탕하게 웃었다.

“맞소. 그대의 말이 다 맞아.”

그리고 언제 웃었냐는 듯, 순식간에 낯빛을 굳혔다.

“난 제국 놈들에게 모든 것을 잃었소. 삶의 이유를 모두 잃었지. 그러니 난 죽을 자리를 찾고 있는 거요.”

“나 역시 마찬가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소.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

“당신이 우리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더 의미 있게 만들어주기를 바라지.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내 동지들은 그대의 뜻에 따르겠소.”

그렇게 또 한 무리가 ‘군대’에 합류했다.

아군이 늘었으니 기쁜 마음이 들어야 할 터인데,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의 가슴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의 볼 일도 다 본 셈이군요.”

수하가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움직여야겠어.”

“하온데 장군. 출전은 언제쯤입니까?”

“왜. 너무 늘쩡거리는 것 같은가?”

“그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우리의 군세가 적을 압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간을 끌 이유가 있을지.”

“머릿수만 많다고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장군께서는…….”

“내 몇 번이고 말했지만, 일전에는 여러모로 행운이 따라준 것일 뿐이야. 시민들의 용감한 협조와 적의 방심. 그리고 악에 받친 병사들의 분전 덕분이었지.”

“이번에는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르지. 먼젓번에는 제국군이 우리를 치기 위해 왔지만, 이번엔 반대로 우리가 치고 나가야 하니까. 백성들의 협력도 기대할 수 없고, 최악의 경우에 적이 성에 틀어박히기라도 하면 우리로서는 솔직히 답이 없어져.”

“그렇다면, 더 기다릴 요량이십니까? 적이 우리를 치러 올 때까지?”

“아니. 우리가 먼저 적을 친다.”

“예? 하지만 방금 전에는…….”

“그 모든 악조건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무엇입니까?”

“식량.”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농민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농민이 없으니 농토도 없고, 농토가 없으니 곡식의 수확도 없다. 이 땅에서 벌어진 끝없는 전쟁이, 수 없는 전투가 낳은 결과였다.

일부 백성들을 뒤로 돌려 농사를 짓게 해도 그들의 생산력만으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싸우고자 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몰려들고 군세는 점점 거대해지는데, 그 군대를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제국은, 7황의 군대는 얼마든지 남쪽의 영토에서 물자를 조달해올 수 있다. 그들은 배를 주리지 않을 것이며, 지치지도 않을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쪽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군요. 그래서 적을 쳐, 그들의 물자를 빼앗아야 하는 겁니까?”

“그것 외에 달리 생각나는 것은 없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했듯, 수비와 공격은 전혀 다르니까. 아마도 큰 희생을 치러야겠지만, 그럼에도 갈 수밖에 없다.

“그 망할 놈이 어찌 나올지 궁금하군요. 쓴 맛을 단단히 보았으니 겁에 질려서 웅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수하가 말한 ‘망할 놈’이란 유게르 티브리악을 의미했다. 이마저도 많이 순화한 것이었다. 이곳에는 그를 찢어 죽이고 싶어하는 이들이 수두룩했고, 눈 앞의 수하는 그런 이들 중에서도 유독 더 큰 원한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도 이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는 않을 것이네. 전력을 집중하겠지.”

“하지만, 초원인들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의 수하는 이제 야만인이라는 멸칭 대신 초원인이라는 표현이 입에 붙은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예전에야 어쨌든 지금은 저 강대한 적에 맞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동지가 아닌가. 지금의 형세가 유지될 수 있는 데는 초원인들의 공이 크다. 물론 그들도 조건 없는 선의가 아니라 나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만.

“어리석은 자는 아니야. 지금쯤이면 그 자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을 터. 선택을 내리지 않겠나. 초원 쪽이든, 우리 쪽이든.”

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그의 선택을 바든 것은 이쪽이 될 터.

“그렇다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걱정되는 것은 그 티브리악 놈이 아니라, 그 뒤입니다.”

“뒤?”

“티브리악 놈이 무너지면 제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럴 리 없다. 기껏 수복한 바크렌을 다시 상실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사실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티브리악 놈을 쓰러뜨리고 나면 그 다음은 누굴까요?”

“글쎄.”

두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한 명의 이름은 곧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지난 전쟁으로 다시 한 번 명성을 떨친 흑포장군은 고령으로, 곧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시점이었다. 7황자가 그런 그를 다시 기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물론 다른 이가 기용될 수도 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가까운 곳에 있는, 믿을 만한 검을 두고서 다른 검을 뽑아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군터. 아마도 그 자가 오겠지요?”

그의 수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그럴 수도 있지.”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아니기를 바랐다.

* * *

“일전에 말씀 드렸던 반란군의 수괴 말입니다.”

“음?”

살라스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본래 제국군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국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 경험이 있는 자인 것은 맞겠지.”

“예.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이름은 뭐라고 하던가?”

“으음. 분명 로크, 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진명인지 가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크?”

왠지 모르게 낯설게 들리지 않는 이름.

‘로크…로크라.’

살라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이유를 떠올리다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설마?’

아주 오래 전에 알던 이름이었다. 직접 아는 이름도 아니었으며, 그저 얼핏 이야기를 듣고 스치듯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봤던 사내의 이름은 ‘로크’였다. 또한 그는…….

‘외팔이가 되어 군문을 나왔다고 들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고민을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살라스가 그 이름에 지금처럼 동요하고, 고민하는 까닭은 그가 아는 ‘로크’라는 자가 그의 상관인 군터의 친우였기 때문이다.

‘물론 장군께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에 영향을 받으실 분은 아니지만.’

살라스는 그 당시, 군터가 로크라는 자를 가리켜 ‘나의 유일한 친우’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말이 인상 깊어 지금까지도 흐릿하게나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로크라는 이름은 그리 찾아보기 힘든 이름이 아니다. 동명의 이인이 당연히 있을 것이며, 그가 제국군에 들었다가 팔을 잃었을 수도 있다.

‘아니.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살라스는 얄팍해지려는 마음을 돌렸다.

‘판단은 내 몫이 아니야.’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상관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은 살라스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군터가 무슨 판단을 하건 상관 없다. 따르면 그뿐이니까.

마음을 먹은 살라스는 곧장 군터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가 들은 바를 그대로 전했다.

역시, ‘로크’라는 이름을 들은 군터는 반응을 보였다. 그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싶어, 살라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로크라고.”

“예. 그리 들었습니다.”

“외팔이에…로크.”

군터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반가움일까, 빛 바랜 그리움일까. 그도 아니면 당혹일까.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고저 없이 흘러나오는 조용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그 어떤 감정의 찌꺼기조차 묻어있지 않았다. 때문에 살라스는 군터가 무슨 생각일지, 어떤 마음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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