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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23화 (523/1,064)

523화

“서남부 수십 개의 촌락이 반란군에 가담했다 합니다.”

“이로써 바크렌 서부는 완전히 돌아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야음을 틈타 반란군의 영역으로 도망치는 놈들까지 생기고 있습니다.”보고가 이어질수록 유게르 티브리악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져갔다. 보고하는 이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점차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주름진 이마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북쪽 야만인 놈들은?”

“유인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치고 빠지는 시점이 아주 절묘합니다. 아무래도, 장군의 짐작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반란군 놈들과 공조하는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짐작했었으니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속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땅 전부가 자신을 적대하는 듯했다. 감정을 접어두고 냉정하게 보았을 때, 그 적의의 반 이상은 자신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

‘너무 급했다.’

기껏해야 소수의 잔당만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바크렌을 수복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며, 그를 위해 준비된 총독의 자리에 가서 앉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때문에 미리부터 들떠서, 이렇게 일을 그르쳐버린 것이다.

‘전란의 땅이라.’

알고 있었으나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범한 가장 큰 실책이었다.

십 수 년 간 전란이 끊이지 않던 땅. 그곳에서 격동의 세월을 맨몸으로 견디며 살아온 자들. 어찌하여 그런 자들을 밟히면 밟히는 대로 사는, 보통의 백성들도 여겼던가.

‘야만인 놈들은 차후다. 우선은 반란군 놈들부터 처리해야 해.’

현실을 직시하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시 반란군을 먼저 쳐 없애야 한다. 야만인들이 반란군 놈들과 공조하고 있다면, 반란군을 처리하고 나면 알아서 물러갈지도 모른다. 다소 낙관적인 전망이기는 하지만.

‘그놈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이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오만불손한 천부장 놈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확 불쾌해졌다. 원군으로 온 주제에 어찌나 몸을 빼는지. 그러면서도 온갖 능청은 다 떠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검에 손이 가려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지. 그런 놈의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판이니.’

그간 그는 그놈과 기 싸움을 벌였다. 어떻게든 힘든 전장으로 놈을 보내려던 그와, 어떻게든 몸을 사리려는 놈의 신경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도 없어졌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놈이 이긴 셈이다.

“아드리안을 불러와라.”수하들이 물러간 후. 유게르 티브리악은 아드리안을 불렀다.

“장군. 어인 일로 소관을 찾으셨는지.”

부르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껄렁한 인상의 천부장이 그의 막사로 들어섰다. 보자마자 내뱉는 첫 마디부터가 묘하게 사람의 속을 긁는 듯했다. 이미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일까. 할 수만 있다면 저 시건방진 두 눈을 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안 되지.’

이놈을 부른 것은 언쟁을 벌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네.”

“예. 그런 것 같더군요.”

저 말투.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듯한.

‘일부러 이런 놈을 보낸 건가? 내 속을 뒤집어놓으려고?’

부디 그런 게 아니기를 바랐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군터가 자신과 척을 지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뜻일 테니.

“터놓고 말하지. 이제 슬슬 일을 해줘야겠네.”

“무슨 말씀이신지? 소관과 파헨델의 병사들은 지금도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말장난을 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야.”

“…….”

“그간 얄팍한 셈을 해가며 자네와 자네의 병사들을 험지로 몰려 했던 것은, 내 사과하지.”

“으음.”아드리안은 유게르 티브리악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 당황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자가 어찌 하루 만에 이렇게 태도를 바꾼단 말인가.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누구나 꾸밀 수 있지만 마음을 달리 먹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유게르 티브리악이 보이는 모습을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가 완숙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래. 어찌 됐든 티브리악의 후계자. 아주 맹탕은 아니라는 말이지.’

아드리안이 유게르 티브리악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고 있을 때,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군터 장군이 자네를 이곳으로 보내며 뭐라 하던가? 나와 척을 지라고 하던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이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라고 했나? 원군 요청에 응했다는 명분만 챙기고?”

“같은 답을 연달아 드려야겠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군터 장군이 그리 말했다 해도 자네는 부인해야 하겠지. 나는 이해하네. 왜냐하면, 나라도 그랬을 것이거든. 나와는 상관도 없는 일에 피를 흘릴 이유가 없으니까.”

“…….”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일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내 경솔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민심이 돌아섰다고 한들, 잡스러운 반란군에게 제국의 정규 군대가 애를 먹는다는 것이?”

아마도 바크렌에 막 도착했을 당시였다면, 아드리안은 ‘당신의 한심한 지휘능력 때문 아니겠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지만 쭉 지켜 본 바, 유게르 티브리악은 처음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저 무능하기만 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따진다면,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느낌?

그런 자가 이 바크렌에서 졸장으로 보일 만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본인 스스로가 말했듯, 초기의 실책이 크게 작용했다.

바크렌의 백성들은 특별했다. 악에 받쳤다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바크렌의 백성들은 짧다면 짧은 십 수 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여럿 겪었다. 고향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재물을 잃은 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들은 시달릴 만큼 시달렸으며,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것을 간과했다.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이들을 몰아붙였고, 바크렌의 백성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반란군들이 제국군에 맞서 기세를 올리는 것을 보면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베이고르의 잔당들이 몸을 담고 있는 것을 최대한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다.

“반란군 놈들을 지원하는 세력이 있다.”유게르 티브리악은 바로 그 점을 꼬집었다.

“지원이라 하심은?”

“놈들의 무장은 아군 못지않은 수준이다. 놈들이 어찌 그리 무장했겠나?”

“그렇다면, 서쪽의…….”

“가장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고 보네. 그가 이쪽에 개입하려면 타라냐드를 넘어야 하지만, 자이드라 멕시스 공이 전하께 귀의하지 않았나.”

자이드라 멕시스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땅을 지나는 불순한 무리를 그냥 보내주지 않을 터. 차라리 그가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는 자신의 후계자를 테리브란으로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른 마음을 먹었을 리 없다.

“나는 그보다는 내부의 적을 의심하고 있네.”

“내부의 적?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가문은 북부의 손꼽히는 명문가네. 몇 번이나 총독을 배출한 역사가 있고, 당대에 이르러서도 그 성세가 줄지 않았지.”

아드리안은 잠자코 들었다. 설마하니 자기 가문의 자랑이나 하려는 것은 아닐 테니까.

“사람이든 집단이든, 너무 잘나다 보면 이런저런 시샘을 받기 마련이야. 특히 이 권력이라는 것이, 양은 적은데 가지려는 이들은 많다 보니 필연적으로 다툼이 끊이지를 않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알 것 같습니다. 헌데…….”

* * *

유력 가문, 혹은 가문들에서 은밀히 바크렌의 반란군을 지원한 것 같다.

야스메티의 서신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증좌라도 있는 것입니까?”살라스가 물었다.

“아니. 아직까지는 심증일 뿐이라는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믿기지가 않습니다.”사실이라면 이것은 이적 행위다. 반란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 그런 위험부담을 감당했단 말인가? 가진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잃을 것도 많은 ‘귀족’들이?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심증을 가지고 파 보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꼬리를 잡는다 한들, 잡히는 것은 꼬리일 뿐. 몸통이 되지는 않을 거다.”

힘 있는 자들의 행사라는 것이 그런 식이다. 책임 질 일이 생겨도 그들은 책임지지 않는다. 언제든 잘라버릴 수 있는 꼬리가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을 대신 떠안는다.

“그렇다 해도 전하께서 용납하실 리 있겠습니까?”

“용납하지 않으면?”

“설마…….”

그들의 악의는 황자가 아니라 티브리악을 향한 것이다. 물론 확실한 증좌만 잡는다면 이런저런 명분을 들어 그들을 처벌할 수도 있겠지만, 황자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동안 쌓은 역량. 그것은 황좌에 가까이 다가간 황자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설령 테리브란의 황자가 형제들과의 경쟁에서 패하여 죽는다 해도 그를 따르는 권력자들은 그 세는 다소 꺾일지언정 대부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도, 황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소위 ‘명가’라 불리는 이들의 존재감이고, 저력이다. 설령 황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그들을 징치할 수는 없다. 그들의 지지야말로 그의 가장 큰 기반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군터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계의 판이 돌아가는 것을 멀찍이 떨어져서나마 계속 보고 있자니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허면, 손을 쓸 방도가 없는 것입니까?”

“손을 써야 할 이유가 있느냐.”

“개입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티브리악이 실패한다면 바크렌의 총독 자리가 달라지겠지만, 그뿐이다.”

“…….”

그 감정 없는 목소리에, 살라스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문득 시선을 돌리던 중에 붉은 전포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군.’

그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군터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상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다.

‘장군의 자리에 서면 달리 봐야 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나는 어찌하여 장군께 옛 모습만을 찾고 있는가.’

그리 생각하며, 납득하려 노력했다.

“하온데 장군. 티브리악이 과연 돌아가는 지금 상황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글쎄. 모른다 해도 곧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들이 장군께 손을 내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들이 손을 내민다면, 장군께서는 잡으시겠습니까?”

“…글쎄.”

군터는 말을 아꼈다. 아직 그도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은 듯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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