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장군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그래. 수고했네.”야스메티는 무관에게서 서신을 전해 받고서 혹여 봉인이 뜯어지지는 않았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먼 길을 거쳐 왔음에도 봉인은 물론, 서신도 말끔했다. 조금 전 집무실을 나간 무관이 오는 내내 아기를 품는 어미처럼 서신을 조심스럽게 다루었으리라.
‘괜찮군. 이름을 기억해둬야겠어.’
능력 있는 자는 찾아보면 꽤나 나온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자는 의외로 찾기가 어렵다. 맡은 일에 이렇게 철저하게 공을 들이는 자라면 편지 배달보다는 조금 더 큰일을 맡겨도 될 터.
‘자아. 그럼 볼까.’
서신이 올 시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서신이 왔다는 것은, 예정에 없는 변수가 생겼다는 것. 그게 무엇일지 궁금하기는 해도 놀랍지는 않았다. 변수라는 것은 늘,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 그러니 변수라 하는 것 아니겠나.
‘음?’
그러나 서신을 펼쳐 내용을 읽었을 때, 야스메티는 살짝 놀랐다. 나름대로 발생할 수 있는 변수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을 해두었는데, 서신에 적힌 내용은 그의 여러 짐작들을 빗나가는 것이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오합지졸 반란군 하나를 제어하지 못했다고?’
다른 데서 들었으면 질 나쁜 농담이나, 유게르 티브리악을 깎아내리려는 모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신을 보낸 이는 장난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고, 그가 이런 식으로 유게르 티브리악을 깎아내릴 리도 없다. 그러니 사실이라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지?’
바크렌으로 간 군대는 정규군이다. 유게르 티브리악도 군사(軍事)를 모르는 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민란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유게르 티브리악이 고의로 패전을 한 경우.
‘그럴 리는 없지.’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고서 그 안에 들어가 눕는 꼴이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다. 적이 오합지졸이 아닌 경우. 제국의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전력일 경우.
‘이것도 말이 안 되는데.’
드러난 것만 놓고 보면 말이 안 된다. 군터 장군도 그것을 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다. 어찌 된 것인지 최대한 알아보라는 거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점령지를 강압적으로 병탄했다 했지.’
일반적인 반란이 아니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선 민란이다. 겁이 많은 백성들이 정복군에게 맞서 들고 일어설 정도라면, 그 ‘강압적’인 수준이 정도를 넘어섰다는 뜻일 터.
‘바크렌의 백성들이 반란세력의 손을 들었다고 가정하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수는 있지.’
하지만 부족하다. 그 정도로는 제국의 정규군을 당해내기 힘들다.
‘개입이 있는 거겠지.’
거의 확실하다. 문제는 그 개입이 안에서의 개입인지, 밖에서의 개입인지다. 밖에서의 개입이라면 쳐서 끊어내면 될 것이나, 안에서의 개입이라면…….
‘간만에 발품 좀 팔아야겠군.’
늦지 않게 확인을 해보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간 주인의 뜻에 따라 의식적으로 바깥 활동을 자제하던 야스메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주인이 알아볼 것을 명했고, 그간 신경 쓰던 제약은 사라졌다.
‘밑에서부터 훑는 것은 의미 없지.’
한다면 제대로 한다.
“제레이스 가문에 가봐야겠다. 준비하라.”
“예.”
문 밖을 지키던 병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야스메티는 다 읽은 서신을 곱게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 * *
수십 대의 수레가 파헨델로 들어섰다. 남쪽 성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력이 들어오는 수레들을 들추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임무에는 두 명의 백인대가 동원되었고, 그 중 하나가 보리스의 백인대였다.
“이쪽으로 가게.”
“예.”
무기를 실은 수레를 들여보내고, 보리스는 아직도 한참 남은 뒤쪽을 보았다.
“많기도 하군.”
“수 천 명의 병사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식량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함께 일을 보던 백부장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상당하겠지요.”
“그 이상이지.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훈련도 하지 않나. 식량은 식량대로 축내고, 훈련 도중에 무구가 상하면 그것도 교체해야 하지. 내 생각에 세상에서 군대처럼 생산성 없는 무리도 없을 것이야.”
“하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 필요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꾸준히 지원을 해주는 것 아니겠나.”
반박을 하기는 했지만, 보리스는 문득 하루건너 하루 꼴로 들어오는 이 수레들이 어느 정도의 값어치일까 생각해 보았다. 돈을 헤아리는 일에 소질도 없고, 경험도 없는 그로서는 답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생산성이 없다라.’
맞는 말이다. 병사들이 장사를 하나, 농사를 짓나. 그렇다고 가축을 기르기나. 손에 피를 묻히는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일도, 할 일도 없는 것이 군대고 병사들이다.
‘그럼에도.’
군대는, 군인은 가장 대접 받는다. 권력자들이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힘으로 움직이고, 통치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무부들의 시대로군.’
광활한 제국은 황자들에 의해 찢겼다. 그것을 다시 하나로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 것인가.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이고 절망일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없을 기회요 축복일 것이다.
‘아버님의, 나의 기회다.’
언젠가 부친의 뒤를 잇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물려받기보다는 스스로 이루고 싶었다. 쉽지 않겠지만, 분명 그것은 그저 가만히 앉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리라.
‘한 번의 전쟁으로 백부장이 되었다.’
여기서 한 계단을 더 오르면 천부장이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올라간다면…….
가슴이 뛰었다. 전장에서 겪은 전투들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짜릿했다. 지나고 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가라고 해도 그는 기꺼이 달려갈 수 있었다. 죽음이 땅바닥의 돌처럼 흔하게 널려 있던 곳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크게 성장했음을 스스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자각은, 계급장이 바뀌던 때보다 그를 더 들뜨게 만들었다.
“이제 끝이군. 어때? 간단하게 목이라도 축일 텐가?”
“아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보리스는 동료 백부장의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근면한 것은 좋지만, 부하들도 신경 써야하지 않겠나.”
“예?”
“병사들은 상관의 눈치를 보기 마련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고삐를 강하게 당기기만 하면 말이 지치지 않겠나. 가끔씩은 풀어줄 때도 있어야지. 물론, 병사들만이 아니라 자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세.”
“…….”
“이제 누구도 자네를 보고 장군의 후광에 매달렸다고 말하지 않아. 조금쯤은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 어떤가.”
속내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러나 떠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에서 호의가 느껴졌다. “…좋습니다.”보리스는 그날 그의 막사로 가 간만에 술잔을 기울였다. 상관인 그가 자리를 가지니, 휘하의 병사들도 덩달아 긴장을 풀고 간단한 회식을 즐겼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장 살라스의 귀에 들어갔다.
“그래. 알아들은 모양이군.”
살라스가 보고를 듣고 옅게 웃었다. 그러자 그의 부관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 장군께서 지시하신 일인지요.”
“아니. 장군께서 그럴 분이 아니시라는 건 자네도 알지 않나.”
“헌데 어찌하여.”
“오지랖을 부렸느냐, 이 말인가?”
“아닙니다. 소관이 어찌 감히. 다만, 장군께서 일전에 보리스 공자에 대해서는 방관하라 말씀하셨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 너무 바쁘게만 달리는 이에게 잠시 숨 좀 돌리라 한 마디 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군터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살라스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직접 겪으면서 익히는 것도 좋지만,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면 미리 아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공을 세우고도 풀어짐 없이 스스로에게 철저하니, 과연 장군의 핏줄인가.’
이전에는 겉으로 냉철하게 보여도 속에는 급한 성정을 숨기고 있었다. 보리스를 갓난아이였을 적부터 봐왔던 살라스였기에 그것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고 보리스가 그 성정 때문에 다칠 일이 생길까 우려했었다.
‘장군께서는 그마저도 배움이 되리라 생각하시는 듯하지만…….’
허나 그의 생각에, 그건 필요 이상으로 혹독한 방식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이렇게 약간 마음을 쓰는 것 정도는 괜찮으리라.
“원군 편성 준비는?”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장군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그날 바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탐문결과는? 뭐 들어온 것이 있는가?”바크렌에 가 있는 아드리안도 정기적으로 그가 알아낸 소식들을 전해 오고 있지만, 파헨델에서도 자체적으로 병사들을 보내 그쪽의 일에 대해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상대해야 할 적에 대해서도, 유게르 티브리악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식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짐작했던 대로 초기에 민란이 발발한 이유는 유게르 티브리악의 강압적인 행보 때문이 확실해 보입니다. 여러 차례 유지들이 그를 찾아가 탄원까지 하였으나 묵살했다는군요.
“어째서?”
“점령지의 유지고 백성들이 아닙니까.”
“그런 건가.”유게르 티브리악과 티브리악 가문에 선을 댄 이들이 있다. 그들이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따르는 게 아닌 이상, 그들에게도 대가를 지불해야 할 터.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 대가를 바크렌에서 찾으려 했으리라. 많은 것을 쥔 유지, 그 자체로 재산이 될 수 있는 백성들. 어쩌면 그의 눈에는 그 모든 이들이 다 ‘재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거칠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그것들을 나누어준다. 특별하지 않은 정복자의 방식이나, 그게 조금 과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기가 좋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고 보면, 바크렌의 백성들은 연이은 전쟁에 오래도록 신음했었지.’
모든 인간에게는 참을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그 선에 닿기 전까지는 두려움이나 다른 이유로 어떻게든 참아내지만,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조금만 더 세심하게 아래를 살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러지 않았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하옵고.”
“음? 뭔가 더 있나?”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 반란군을 이끄는 지도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지도자라. 그래. 있겠지.”사람이 모이면 그들을 이끄는 대표가 생기는 법이다. 민란군이라 하여 다르겠는가.
“어떤 자인가?”
“이름도, 나이도 모릅니다. 다만 얼핏 들려오는 말로는 외팔이라더군요.”
“외…팔이?”살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늘였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헐렁한 한 쪽 팔에 향했다.
“예. 말씀드렸듯이,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는 해도…그거 참. 공교롭군.”
묘한 기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