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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21화 (521/1,064)

521화

장군께 아룁니다.

소관이 닷새 간 본 바, 바크렌의 전황은 밖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너덧 번씩 전령들이 당도하고, 떠납니다. 군중의 분위기는 무겁고, 이따금씩 유게르 티브리악의 고성이 들려오곤 합니다.

…중략…

현재로서는 서부 전선이 말썽인 듯합니다. 대규모 반란군이 도시 여덟 곳을 점거하고 세를 불리고 있다더군요. 일찍이 3천 군세가 그들을 토벌하려다 도리어 패퇴한 이후로 그들의 기세가 꽤나 올라간 듯합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들에게 전력을 집중시키고 싶어 하지만, 북쪽 야만…아니. 초원인들이 남하하여 약탈을 해대는 탓에 그러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여…….

“반란군의 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모양이다.”

군터가 그리 말하며 살라스에게 서신을 넘겼다.

“그렇습니까?”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살라스의 표정은 찌푸려졌다 풀렸다를 반복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그래. 재미있게 됐어.”

유게르 티브리악의 무능함이 놀라운 수준이지만, 그가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제국의 군대가 변변찮은 반란군 따위에 애를 먹을 수는 없다.

“말이 반란이지, 실은 민란이 아닙니까. 대체 어떻게 해야 일이 이렇게 꼬일 수 있는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그 말대로다. 이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다.

‘베이고르의 잔당인가.’

반란군은 제법 체계적으로 싸우고 있다. 구심점이 없다면 그럴 수 없을 테니, 그 중심은 당연히 베이고르의 인사일 터. 허나 그렇다 해도 의문이 다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만 한 자가 떠오르지 않는데.’

이름 있는 자들은 이전의 전쟁에서 다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물론 능력이 있다 해서 다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알아보라고 해야겠군.’

군터는 테리브란으로 사람을 보내어 야스메티에게 이쪽의 상황을, 바크렌의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전장의 상황을 살피는 데는 도움을 받을 수 없겠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데는 테리브란이 이곳보다 더 나을 터였다.

“2차 파병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파병은 당초 계획대로 유지한다.”

서두르지 않는다. 바크렌의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발목이 붙잡혔다고는 하지만 유게르 티브리악 휘하의 군대는 아직 건재하고, 반란군이 위세를 부린다지만 서쪽 일부 지역에 한정된 규모일 뿐.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빠르게 세를 불리겠지만…….’

그렇다 한들 곤란해지는 것은 유게르 티브리악이지, 자신이 아니다.

군터는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반란군이 몸집을 불려봐야, 그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몰고 북진한다면 그들을 어렵지 않게 쓸어버릴 자신이.

베이고르의 대군을 상대하여 왕의 목을 취했었다. 그런 그이니, 무너진 나라의 찌꺼기 몇몇과 잡병들 따위가 눈에 차겠는가.

위기의식이나 긴장감 따위는 조금도 없다. 단지 궁금할 뿐이었다. 바크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그 배후에 가려진 것들이.

* * *

“대장님.”

“음?”

눈을 감고 있던 사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꾀죄죄한 몰골의 수하가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들었던 건가.’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깜빡 잠들었던 모양이다. 아직 해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별로 오래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몸에 전과 달리 힘이 돌았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몸 좀 챙기십시오.”

수하의 걱정스런 말에 그는 픽 웃었다.

“걱정은 고맙지만, 그런 말은 이렇게 늘어져 있는 내가 아니라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해야지.”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알고 있네. 나는 괜찮아. 그냥 조금 피곤했을 뿐이야. 요 며칠 동안 신경 쓸 일이 많았지 않나.”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눈 밑이 숯을 잔뜩 묻힌 것처럼 거뭇한데 어찌 그 말을 믿을까.

“이러다가 쓰러지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 날 너무 얕보지 말게. 내가 이래봬도 왕년에는…….”

“예, 예. 압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말씀을 되풀이하시기 전에, 거울이라도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실없는 소리는 이쯤 하세. 무슨 일인가?”

“제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

그의 얼굴에 머물던 옅은 웃음기가 사라졌다.

“일전의 그 자던가?”

“예.”

“끄응.”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서, 몸 곳곳에서 올라오는 통증들을 침음에 흘려보냈다.

“가지.”

너덜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떨어질 듯 삐걱대는 문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해 보였다.

“저 문 좀 손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하러?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물 것도 아니잖나.”

“그렇긴 합니다만…….”

저 걸레짝이 된 문은 마지막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발악하던 제국군 장교의 흔적이었다. 듣자 하니 돈을 주고 관직을 샀다던데, 그 때문인지 죽는 순간까지 그 몰골이 참으로 추했다. 제대로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눈물콧물 다 쏟으며 목숨을 구걸하던 꼴이란.

“다시 뵙습니다 장군.”

그나마 가장 멀쩡한 관사에서 그는 그를 찾아온 이를 만났다.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 갑옷을 갖춰 입은, 단단한 체구의 사내.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그런 웃음으로도 은은하게 풍기는 피 냄새는 숨길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장군이 아니오.”

“군대를 이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장군이시지요.”

“사람들이 날 대표로 세운 것뿐이오.”

“아무래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장군께서 이 군대를 이끈다는 거지요.”

“전혀 알아들은 것 같지 않군. 그보다, 무슨 일이오?”

“그 전에, 승전을 감축드립니다 장군. 사실 이 말을 먼저 드리려 했습니다.”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조금 전 수하에게 보였던 것과는 다른, 비릿한 조소였다.

“우습군. 그대는 제국인이 아니오? 제국인이면서 제국의 군대가 패한 것을 축하한다 말하다니.”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었습니까? 장군께서 일구신 승리에 우리의 원조가 한 몫 했음을 상기하시지요.”

“그대들이 조건 없이 우리를 지원한 건 아니잖소? 우리의 승리는 그대들도 바라던 바이고, 그를 위한 지원이었으니 우리는 승리한 것으로 그대들의 원조에 대한 값을 지불한 셈이지.”

“그렇기도 하군요. 허면, 갖고 온 물건을 다시 가져가도 되는 것입니까?”

“…….”

“장군. 장군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협력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 장군과 장군의 무리들에게 보이는 호의만큼, 아니 그 반이라도 보여주시지요. 그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정체조차 밝히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걸었소. 최소한의 신뢰조차 주지 못하는 의심스러운 자들에게 차릴 예의 따위는 없소. 그럴 여유가 없지.”

“신뢰? 그런 건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며, 장군은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아닙니까?”

“…이거 하나만 명심하시오. 당신들이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그대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소.”

“바라지 않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그저 장군과 장군의 무리가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 그뿐입니다.”

* * *

궤짝들은 족히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꾀죄죄한 몰골의 사람들이 그 궤짝들을 수레에서 꺼내고 옮겼다.

“창, 칼. 활과 화살. 이번에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다 가져왔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전보다 양도 더 늘었지요.”

“말은 구해줄 수 없는 거요?”

“하하. 욕심이 과하십니다. 전마 한 필에 얼마인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쇠도 그렇지만, 전마의 가격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올랐습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전마는 돈 주고도 못 구할 정도로 귀하다.

“어렵다는 건 알고 있소. 허나 적들을 상대하려면 기병이 필요하오. 이제 적들은 우리를 경시하지 않을 것이니, 먼젓번과 같은 행운은 바라기가 어렵소.”

“으음. 그렇다 한들, 어찌 불가한 것을 가능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이보시오. 나는 지금 다시 한 번 적이 대병을 이끌고 온다면 버티지 못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요. 그대들이 재미를 보는 것도 끝이라는 소리지.”

“…….”

“어렵더라도 부탁하리다. 그대들이 우리를 진정 필요로 한다면 무언가 해낼 수 있으리라 믿겠소.”

사내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얼마 후. 도시를 나서는 중에 그의 수하가 그에게 말했다.

“주제도 모르는 병신 놈이 시건방지기 짝이 없군요.”

“어떤 면에서?”

“저희의 도움 없이는 내일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불순한 태도라니요.”

“놈이 내게 굽실거려야 했다, 이 말인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제 놈들이 누구 덕에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자네는 앞으로도 저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말게.”

“예?”

“애초에 우리가 먼저 저들에게 손을 내밀었었네. 말하자면, 더 아쉬운 건 우리 쪽이라는 거지.”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이것은 거래야. 자네가 말한 그 병신도 아는 것을 자네는 모르는군.”

“…….”

“주제를 모른다고 했나. 아니야. 전혀 아니야. 자네가 말하는 그 병신은 무기도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무지렁이들을 데리고 제국군 3천을 패퇴시켰다. 열 개의 도시를 무너뜨렸고, 지금은 수만이 훌쩍 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

사실 군대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그냥 머릿수만 채운 백성들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그들을 ‘군대’라 칭했다. 그들의 어설픔과는 상관없이, 싸울 의지를 가진 자들이 한 데 모였기 때문이다.

“인정할 건 인정 해야지. 자네가 말한 그 병신은 우리가 해내지 못한 것을 해냈네. 내가 그를 ‘장군’이라 불렀던 것을 알고 있겠지? 놀려먹으려던 것이 아니야. 아부는 더더욱 아니지. 난 정말 그를 ‘장군’이라 생각하네. 싸울 수 있는 군대를 거느렸으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전과를 올렸으니까.”

처음 봤을 때는 깔보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봤을 때 그런 마음은 사라졌고, 이번에 또 다시 봤을 때는 그를 완전히 인정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그를 제대로 지원해준다면 그는 우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을 것이야.”

“허면…전마도?”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겠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가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뭔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좋게 말씀을 올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언제나 그랬듯, 판단은 윗분들께서 하실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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