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말은 구구절절 길었지만, 결국 요는 마지막에 어렵게 뱉은 한 마디였다.
“…하여, 장군께서는 파헨델의 원군을 청하셨습니다.”
“알겠다. 일단 물러가 쉬고 있도록.”
“옛.”
유게르 티브리악의 사절이 물러가고, 군터는 수하들을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군.”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안 좋을 것이고, 점점 더 안 좋아지겠지요.”
만약의 만약이 얼마나 일어나든, 진압군이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그의 군대를 갈다시피 해서라도 저항하는 자들을 말살시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야 남는 게 없다. 이끌어야 할 군대도, 다스려야 할 백성들도 크게 잃게 되겠지. 공은커녕, 어쩌면 질책만 떨어질지도 모른다. 약속 받은 총독 자리도 당연히 날아갈 것이고.
“너무 자신만만했지요. 무엇보다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을 밀어낸 것이 가장 큰 실수입니다.”
울타마란 소레딜은 베이고르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1등 공신이다. 전쟁이 막 끝난 후 바크렌에 대한 그의 지배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티브리악은 그런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는지, 그로 하여금 바크렌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게 했다. 물론 강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갖가지 선물로 성의를 보이는, 협상에 가까웠다.
“자신들의 손으로 무덤을 판 격이지요.”
할렌을 비롯한 모두가 티브리악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들은 욕심에 눈이 멀었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유야 어쨌건, 자신들의 공을 앗아간 티브리악이 이렇게 험한 꼴을 보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어쨌거나, 정식으로 요청이 들어왔으니 원군을 보내기는 해야 한다.”
“시늉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드리안의 말이었다. 그는 할렌과 함께 티브리악에 대해 가장 크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던 만큼, 그렇게 힘들게 세운 공을 집어삼키려는 티브리악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소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군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간 드러내놓고 표현은 안 했어도 속으로는 아드리안과 비슷한 마음이었던 이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요는, 유게르 티브리악을 위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원한을 샀군.’
전공의 상실은 군터가 자초한 것이었다. 그의 휘하 무장들도 머리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상관인 그를 원망할 수 없기에, 그들은 원망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군터의, 자신들의 공을 가로챈 티브리악이 그 대상이었다.
사실 그런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알기로, 금기를 범한 것에 대해 가장 크게 처벌을 주장한 이들이 티브리악이었다. 그것을 구실 삼아 황자와 거래를 하여 바크렌을 얻어 냈으니, 그런 강경한 주장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겠지만……. 어쨌거나 군터가 그들을 곱게 보지 못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좋다.”
살라스의 조언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을 내렸었다. 상술했듯이, 군터 역시 티브리악에게 진 빚이 있으니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해도, 그들을 위해 피를 흘릴 마음은 없었다.
“누가 나서겠나.”
“소관에게 맡겨주시지요.”
아드리안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만 보아도 의욕이 넘쳐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그가 적을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감정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칼을 들이 밀거나 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군. 소관은 장군의 수하이며 파헨델 소속이니, 유게르 티브리악의 명령을 따를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그렇다면 맡겨주십시오. 적당히 생색만 내다가 돌아오겠습니다.”
말은 시원시원하게 잘 한다만, 과연 맡겨도 되는 것일까. 수하들 중에서 호전적인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아드리안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일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군터가 잠시 답을 미루고 있는 사이, 살라스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아드리안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거칠기는 하지만, 분별은 확실하게 하니까 말입니다.”
“역시 살라스님께서는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하하.”
살라스까지 그리 말하니, 군터는 아드리안에게 일을 맡기기로 했다.
“출발은 사흘 후다.”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대놓고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반감을 살 수 있으니, 적당히 하는 게 좋다.”
“알겠습니다. 허면 병력은 어느 정도를…….”
“천은 적고, 이천은 많다.”
“천오백 정도면 적당하겠군요.”
아드리안은 어리석지 않다. 그가 마냥 거칠기만 했다면 천부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를 수도, 수하들의 신망을 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바크렌으로 가서 어떻게 할 텐가.”
“상황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만, 최대한 이런저런 핑계로 교전을 피하겠습니다. 남의 싸움에서 귀한 병사들을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승냥이들이 짖어대는 것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 말 한 마디로 아드리안은 군터의 신뢰를 샀다.
사흘 후. 천오백의 병사가 관문을 나섰다.
“속도가 너무 느린 것 아닙니까?”
“어쩔 수 없소. 지난 전쟁에서 그리 고생을 한 탓에 한동안 좀 풀어줬더니 이놈들이 몸이 다 퍼져버려서 말이오. 이 상태에서 무리를 했다가는 적과 싸우기도 전에 몸이 다 상하고 말거요.”
제란인가 제라인가 하는 이름의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전에 보았던,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잘만 따라오는 병사들의 모습을 기억한 것이리라.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아드리안은 당당했다.
‘네놈이 그리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아쉬운 건 저쪽이지 이쪽이 아니다. 그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니 아드리안은 얼마든지 뻔뻔해질 수 있었다. 물론 바크렌에 가서, 유게르 티브리악에게 밉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파헨델의 천오백 병사의 지휘권은 자신에게 있으며, 여차하면 말머리를 돌려버리면 그만이니까.
물론 정말 그렇게 해버린다면 뒷감당이 문제가 되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거다. 아드리안은 군터에게 그 정도의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그만큼 나를 믿고 계시다는 뜻이지.’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보시오 아드리안 장군.”
“장군이라니? 큰일 날 소리 하시는군.”
“아드리안 공.”
“그런 거창한 칭호는 넣어두시오. 낯간지러워서 원.”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아드리안은 상대를 보았다. 슬쩍 일그러진 얼굴은 노기를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그나저나…정말 모르는 얼굴인데?’
저 답답해하는 얼굴은 꾸며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연기를 할 이유도 없다. 확실하다. 이 자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는 것이다.
‘참 나. 이건 뭐.’
맞은 놈이 화를 내는데, 때린 놈이 기억을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물론 이 자는 티브리악의 수하일 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잠깐만. 이거 혹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자는 물론이고, 티브리악 역시도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설마 그렇게까지 낯짝이 두꺼운 놈들일까 싶지만, 이놈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안은 이런 자들이 익숙했다. 과거에 꽤 보았던 탓이다.
‘아, 그래. 뼈대 있는 가문이다 이거지.’
공을 상실한 것은 금기를 범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주인 없는 것을 차지했을 뿐이다.
티브리악 가문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이기적인 것과는 다른,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믿는 자들만의 특징.
“말했지 않소. 병사들이 지쳤다고.”
“이보시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시구려.”
“…….”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더 이상 보채는 말은 없었다. 다만 입을 꾹 다문 채로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기는 했다.
‘제 주인에게 고자질이라도 할 모양이지.’
정답이었다.
바크렌에 들어서고 유게르 티브리악과 만나게 되었을 때. 아드리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에 실소를 머금었다.
“늦었군.”
“장군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이전의 전쟁으로 인해 병사들이 많이 다치고 지쳤습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나지 않았나.”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라면, 지금 장군께서 치르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엄하다!”
유게르 티브리악의 부관 정도로 보이는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드리안은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사내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유게르 티브리악의 답을 기다렸다.
“궁금하군.”
“…….”
“대체 뭘 믿고 있기에, 이리도 건방지게 구는 거지?”
“심기를 거슬렀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럴 마음은 없었습니다.”
“너무 성의 없는 거짓말이군.”
“…….”
아드리안은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청년이라기에는 다소 나이가 있어 보이고, 중년이라기에는 너무 젊다. 듣기로 그의 나이가 올해로 서른…….
‘서른 몇이라고 했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대충 넘겼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대면하고 있으니 문득 떠올랐다.
티브리악. 제국 북부의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이자, 제국 전체를 놓고 봐도 충분히 명문이라 할 수 있는 귀족 가문. 그리고 지금 앞에 있는 이 사내, 유게르 티브리악은 그런 가문의 후계자다. 지금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일이 모두 순조롭게 풀린다면 바크렌의 총독임 됨과 동시에 후계자가 아닌 당주가 되겠지.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진작 패해서 머리까지 잃어버린 떨거지들조차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파헨델에 손까지 벌렸다. 그 시점에서 이미 ‘순조롭게’는 물 건너 간 셈. 여기서 더 흔들린다면, 어쩌면 총독 자리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놈. 애송이야.’
애써 담담한 척 하지만, 아드리안의 눈에는 보였다.
짜증. 분노. 은연중 드러나는 감정은 그 정도지만, 그 뒤에는 틀림없이 불안이 숨어있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는군.’
지독할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가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인물. 바로 그가 섬기는 주인이다.
지금은 거의 포기했지만, 한때는 그의 무심함 너머를 엿보고자 꽤나 노력했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사람의 기색을 살피는 눈썰미가 늘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 우연찮게 빛을 보고 있다.
‘이쪽의 도움이 필요한 거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 혹은 조금 아쉬운 정도가 아니다. 상당히, 어쩌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거다.
‘그렇군.’
상황이 좋지 않은 거다. 바깥에 알려진 것보다 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