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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19화 (519/1,064)

519화

“여전히 순조로운 모양입니다.”

당연한 일이다. 구심점이 될 이들은 죄다 죽어나갔고, 기껏해야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영주들이 마지막 항전을 벌이는 수준인데, 그 정도를 밀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헌데…….”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도 있나?”

“조금, 과격하게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패잔병들을 숨겨 줬다는 이유로, 작은 도시 하나를 완전히 뒤집어 엎었다고 합니다.”

“그리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수색을 한다는 명목으로 약탈을 했다는군요.”

“…….”

그건 확실히, 조금 과하다. 말이 약탈이지. 한 번 고삐가 풀렸다면 단순히 민가를 터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크게 일이 터진 것은 그 하나지만, 그 외 자잘한 것들은 수도 없을 정도라는군요. 덕분에 바크렌의 민심이 흉흉하다고 합니다.”

“민란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이 말이냐?”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살라스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건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만약 정말로 그의 말처럼 바크렌의 민심이 흉흉하고, 그 흉흉한 민심이 결국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질 터. 하지만.

“알아서 하겠지.”

“예.”

민란이 일어나든 말든, 이쪽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곤란을 겪어도 유게르 티브리악이 겪을 것이니.

‘실망스럽긴하군.’

이번 일은 유게르 티브리악 한 사람이 아니라, 티브리악이라는 유력 가문이 전력으로 미는 사안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최대한 잡음이 안 나도록 일을 진행해야 할 터. 그런데 이 꼴이라니.

“당장은 상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바크렌 쪽에 대해서는 계속 눈을 떼지 마라.”

“예.”

만에 하나 일이 터진다고 한들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준비를 해두어 나쁠 것은 없다.

* * *

“장군. 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제국군의 압제를 견디다 못한 바크렌의 민중이 봉기했다. 마른 들에 떨어진 불씨가 몸집을 불려가듯, 산발적으로 시작된 민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크렌 전역을 뒤흔들 정도로 커졌다.

“한심한 놈 같으니.”

듣자 하니 유게르 티브리악은 강경 일변도로 진압을 이어갔다고 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모든 반발을 찍어 눌렀다. 힘이 받쳐준다는 전제 하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을 시에는 지금처럼 크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

“원군 요청은 아직인가.”

“예.”

어떻게든 손을 벌리지 않고 수습 해보려는 모양이지만, 살라스의 보고에 따르면 바크렌에서 일어난 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유게르 티브리악이 성공적으로 난을 진압한다 한들 그 뒷감당을 해야 할 테니 조정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는 않을 터.

“헌데 장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음?”

“바크렌의 백성들은 베이고르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을 바로 얼마 전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불만이 쌓였다 해도 이렇게 난을 일으키다니요.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건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뭔가…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입니다.”

“…….”

군터는 살라스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확실히 그의 말처럼, 바크렌의 백성들이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들고 일어나는 것이 무모해 보이기는 했다. 그들이 모두 머저리가 아니라면 이런 식의 행동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저질렀다면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으리라.

유게르 티브리악의 압제가 죽음을 각오하게 할 만큼 지독했거나, 누군가에 의해 선동이 되었거나.

“베이고르의 잔당이 백성들을 움직였다고 보느냐.”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는 이들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할 겁니다.”

맞다. 제국에 투항하기를 거부하고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잔당들은 쓸 수 있는 수는 무엇이든 다 쓰려고 할 터.

“수완이 좋군.”

“덕분에 피가 강물처럼 흐르게 되겠지요.”

살라스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의 서늘한 눈은 제국군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나갈 바크렌의 백성들을 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부상병들은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닷새 전에 보급품이 당도했으며, 매일 거듭한 조직 훈련으로 새로운 편제에도 완전히 익숙해졌습니다.”

내일 당장 출정해도 문제 없다는 뜻이다.

“장군. 유게르 티브리악에게서 원군 요청이 온다면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원군 요청이 온다면 파병을 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원군의 규모라든지, 파병의 시기 같은 것은 파헨델의 사령관인 그의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 뒷감당이 문제기는 하지만, 어쨌든 적극적으로 개입할지 소극적으로 관망에 가까운 자세를 취할지는 그의 마음에 달린 일.

“네 생각은 어떠냐.”

“미리 마음을 정해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두고 바크렌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티브리악이 어찌 나오는지를 보고서 판단하라는 뜻이다.

“소극적이군.”

“말씀 드렸다시피,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이런 지저분한 판에 발을 담글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원 요청이 오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인다면 공을 더 많이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겠지만,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들도 더 커질 터. 게다가 공이라고 해도 민병들을 학살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 말 그대로 ‘지저분한 판’이다.

“바크렌의 상황을 더 면밀히 살펴라.”

“예.”

군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라스는 군터의 침묵이 긍정에 더 가까운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령관의 집무실을 나선 살라스는 즉시 자신의 휘하 장교들을 불러모았다.

“바크렌으로 병사들을 더 보낸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최대한 소상히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주동자들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주동자라 하시면?”

“아무리 민란이라고 해도, 결집하여 군대를 이뤘다면 우두머리가 있을 것 아닌가. 아마도 베이고르의 잔당들일 테지만, 확실히 해둬야 하지 않겠나.”

베이고르의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대부분 사망하거나 구금 되었다. 왕인 주앙 칼 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정계를 양분하던 두 명의 공작 역시 명을 달리했다. 그 밑의 고위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

‘대부분일 뿐이지. 눈치 빠른 자들은 진작 꼬리를 감췄으니.’

거물들을 다 처리했다지만, ‘대부분’이다. ‘전부’가 아닌 것이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눈에 불을 켰던 이유도 그 몇 안 되는 거물들을 해치우기 위해서였을 터.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처리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았다. 결과가 엉망이 되어서 그렇지.

‘유게르 티브리악. 오명을 뒤집어쓰겠군.’

차라리 잔당들이 일제히 봉기하였다고 하면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상대해야 할 것은 ‘적군’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바크렌에서 들고 일어난 것은 평범한 백성들. 그들도 굳이 따지자면 ‘적’이지만, 아무렇지 않게 쓸어버릴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본래 제국의 백성이었으며,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할 자들. 그들이 있기에 바크렌이 의미가 있다. 다스릴 백성 없는 땅이라면 가져봐야 무슨 소용인가.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다면…점점 더 크게 불이 붙겠지.’

민란의 무서움이다. 백성들이 주가 되기에 그 열기는 보다 쉽게 백성들에게 전염된다. 지금도 상당한 규모라고 하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 규모는 점차 겉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이런 판에는 아예 발을 딛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원군을 청한다면 어쩔 수 없이 보내기는 해야 한다. 애초 파헨델에 떨어진 명령이 유사시를 대비하고 바크렌의 진압군에 협조하라는 것이었으니까.

‘한심한 작자 같으니.’

티브리악의 차기 당주. 바크렌의 총독에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내.

온갖 화려함은 다 갖췄으면서, 바로 앞에 놓인 과실조차 집어먹지 못할 정도의 무능이라니. 살라스는 유게르 티브리악의 무능함에 혀를 찼다.

‘쉽지 않겠군.’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도록 한 작자가 갑자기 수완을 발휘해 민란을 조기 진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사태는 장기화가 될 것이고, 결국 그는 파헨델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을 터.

그런 살라스의 예측은 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열흘 뒤. 바크렌에 파견한 첩자들로부터 급보가 날아든 것이다.

“바크렌의 진압군 3천이 반란군과 교전하였으나, 패퇴하였습니다!”

“패퇴?”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3천이라면 유게르 티브리악이 끌고 간 진압군 병력의 3분지 1정도. 그 정도 병력이 움직였는데 패했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다. 피해 규모와 상관 없이, 전투에서 패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적의 기세를 올려줄 테니까.

“대체 어쩌다가? 반란군의 규모가 너무 컸던 건가?”

“두 배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작 그 정도에? 어처구니가 없군.”

병력이 두 배라고 하면 엄청나 보이지만, 반란군은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던 백성들이다. 군사 훈련을 받기는커녕, 제대로 된 무장도 하지 못한 잡졸 중의 잡졸. 그에 반해 진압군의 병사들은 일부 징집된 자들이 있을지라도 대부분은 정규군일 터. 헌데 패퇴라니? 이 정도면 농담이라고 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뭔가 이상한데.’

유게르 티브리악이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이 정도면 조금 생각을 달리 해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가 일부러 바크렌에서의 일을 망치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한심한 꼴을 보일 수는 없을 터.

“천부장 모레인을 불러와라.”

잠시 후. 살라스는 그의 집무실로 온 모레인에게 물었다.

“유게르 티브리악에 대해 알고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

“스스로 버렸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자네는 티브리악의 피를 잇지 않았나. 세간에 알려진 것 말고, 자네가 아는 것에 대해 들어보고 싶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모레인은 바크렌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한 듯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기에, 살라스는 숨김 없이 그가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진압군이 반란군과 교전을 벌였어. 그리고 패퇴했지. 자잘한 전투도 아닌, 3천 병력이 투입된 전투였는데도 말이야.”

“…….”

“솔직한 심정으로는, 일부러 일을 망치려고 작정한 게 아닌 이상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야. 말해보게. 유게르 티브리악은 머저리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티브리악이 가문을 망칠 자를 후계로 세울 만큼 어리석은 자들은 아닙니다. 유게르 티브리악은…재능 있는 자는 아닐지 모르나, 모자란 자 또한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바로는 그렇습니다.”

“지금 그의 행보를 보면 자네의 말이 우습게 들리는데.”

“저 역시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 유게르 티브리악은 쉬운 일을 그르치는 머저리가 아닙니다.”

살라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원군을 청할 것 같은가?”

“예. 그럴 겁니다. 3천 씩이나 되는 병사를 동원하고도 패했다면,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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