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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18화 (518/1,064)

518화

괴물. 아니, 반드레온 모렌스를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자리에서 직접 보았던 이들이라면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활약이었다. 그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도 제법 괜찮았고.

결론적으로, 보리스는 백부장이 되기에 충분한 공을 세웠다. 보리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부하들과 마주하는 자리에서, 그는 당당하게 부하들을 내려다보았다. 간혹 보이는 의심 섞인 눈이 불쾌했지만, 곧 저 불신을 지워주리라 다짐했다.

“나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겠지.”

이제 이 파헨델에 보리스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없다.

“부친의 덕으로 쉽게 올라온 애송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을 것을 안다.”

속내를 들킨 몇몇이 표정관리에 힘썼다. 보리스는 괜히 눈을 피하는 이들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로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시간이 알게 해줄 것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 너희는 너희가 할 일을 해라. 난 상관으로서 너희를 다스리고, 너희는 휘하로서 복종한다. 그 단순한 관계만 충실히 지킨다면 우리가 서로 불편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충성을 바랄 수는 없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말 몇 마디로 휙휙 바뀔 수 있는 것이던가. 물론 그런 신묘한 말재주를 지닌 이들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보리스 자신은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봐야지. 자네의 능력을 보여. 그들이 자네를 인정하면, 자연스럽게 충성하게 될 거야.”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보리스는 자밀과 술자리를 가졌다.

전쟁은 끝났고, 당분간 군이 움직일 일은 없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긴장이 풀려서일까. 요즘 그는 일과가 끝난 후에는 매일 같이 이런 간단한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네는 어때?”

“자네와 다르지 않아. 아직 서먹서먹하지.”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다. 여러 전투를 치르며 병력이 상했고, 재편이 이루어졌다.

“보충병들이 들어오겠지?”

“글쎄. 병사들을 무슨 물건처럼 계속 찍어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더군다나 바크렌의 적이 사라졌고, 서쪽에 주둔시켜야 할 군대도 있으니…당분간은 보충병이 없지 않을까 싶네. 어쩌면 계속 없을 수도 있고.”

“흐음. 파헨델의 중요성이 떨어졌다는 건가?”

“내 생각에는 그래.”

베이고르가 무너지면서 파헨델이 방비해야 할 적이 사라졌다. 당분간은 베이고르의 잔당들을 신경 써야 하니 역할이 있긴 하겠으나, 잔당들이 다 사라지고 바크렌이 안정되면 파헨델은 할 일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파헨델 주둔군의 규모를 줄일지도 몰라.”

“음…….”

보리스가 침음을 흘렸다.

자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보리스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부친에게.

‘파헨델의 병력이 줄어든다면, 그건 곧 아버지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파헨델의 병사들이 군터의 사병은 아니다. 그건 군터뿐 아니라 그 어떤 장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그들이 거느리는 병사들은 모두 제국의 병사이며, 7황자의 병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휘하는 병력의 규모는 장군으로서 군부에 가지는 영향력을 상징한다. 즉, 지휘하는 병사의 수가 준다는 건 그의 영향력이 그만큼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겠군.”

“또 표정관가 안 됐나?”

“그런 것도 있고. 내가 눈썰미가 뛰어난 것도 있고.”

가벼운 농담에 보리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내가 말한 대로 일이 흘러간다 한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어째서?”

“자네의 부친은 대단하신 분이야. 내 생각에, 전하께서 휘두르실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검을 고르라면 그건 군터 장군일 걸세. 앞으로 더 큰 전쟁이 벌어진다면,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장군을 기용하실 걸세.”

“흐음.”

“단언컨대, 장군께서는 할 일 없는 곳에서 자리만 지키고 계실 분이 아니야. 이 점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분명히 나와 같은 생각이시겠지.”

“달콤한 말이군. 아버님께 들려드리고 싶을 정도야.”

“내가 장군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야. 덕분에 백부장에 오르지 않았나.”

보리스와 마찬가지로 자밀 역시 백부장이 되었다. 여러 전투에서 쌓은 공을 인정받은 것인데, 그런 것치고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입가에 걸린 웃음은 왠지 씁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이번 전쟁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네. 하지만 그것이 이 정도의 공인가 묻는다면, 솔직히 모르겠어. 선친과 가문의 후광으로 오른 자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

“사실 나는 자네에게 이러니 저러니 충고 할 처지가 못 되는 셈이야.”

“벌써 취했나 보군.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니까.”

“무슨 말인가.”

“그래. 자네 말처럼 이런저런 후광이 작용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 한들 뭐 어쩔 텐가.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어쩔 수 없는 건 그냥 받아들이라는 거네. 후광으로 오른 자리라고 해도 능력을 보여서 부끄럽지 않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부족하다 한들, 그게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닌가 이 말이야.”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래. 그러니 마셔. 쓸 데 없는 생각은 머리에서 지우고, 앞으로의 일들만 생각하자고.”

“하하. 자네가 나보고 머리가 좋니 어쩌니 하지만, 이럴 때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 내 생각엔 자네가 나보다 더 나은 것 같아.”

“뭐야. 정말로 벌써 취한 건가?”

“하하. 아니. 아니야. 이제 시작인데 취하긴 누가 취했다는 건가.”

무거운 주제가 지나간 후에는 크고 작은 웃음소리만이 흘렀다.

* * *

“좀 어떠십니까?”

“어떠냐니? 이 팔 말인가?”

할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솔직히 아직까지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해. 평생 달려있던 것이 떨어져나갔으니까 말이야.”

살라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잘려나간 팔에 남은 좌절과 분노를 최대한 털어낸다고 털어냈지만, 그럼에도 아직 남은 것들이 그를 괴롭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되도록 빨리 받아들여야 해. 언제까지 혼자 우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예전부터 항상 생각했지만, 살라스님께서도 보통은 아니십니다.”

할렌은 자신이 살라스의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았다.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외팔이가 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에 힘썼다. 어설픈 동정은 살라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터. 할렌은 오랜 동료이자 존경하는 군인인 그를 최대한 존중하고 싶었다.

‘어차피 전장에만 나서지 않을 뿐이다. 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군터는 여전히 살라스를 총애했다. 파헨델에 들어올 때 나란히 말을 몰고 들어온 것부터 해서, 아예 대놓고 살라스를 이인자로 밀어주는 모양새였다. 물론 이전에도 살라스는 천부장들 사이에서 은연중 우두머리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은연중’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그 역시 한 명의 천부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군터는 살라스에게 부사령관의 지위를 내렸다. 그간 공석이었던 자리였지만, 할렌은 처음부터 저 자리에 주인이 생긴다면 그건 살라스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게 올 자리가 아니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라스님 외에 그 누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 이상 전장에 나가 싸우기 힘든 몸이 되지 않았나. 그 때문에 장군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지.”

“은혜도 은혜지만, 그간의 공을 인정받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공이라고? 하하.”

건조한 웃음. 술이 들어가서일까. 살라스는 평소와 달리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이제 난 전장에 나갈 수 없네.”

“꼭 칼을 휘두를 수 있어야만 전장에 나가는 건 아니지요. 본래 지휘관들이 일선에서 피를 묻히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장군께서 이끄시는 군대에 그런 역할은 중요치 않아. 자네도 알지 않나.”

“…….”

“마음은 고맙네만, 굳이 그렇게 위로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되네. 상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난 내 처지를 받아들였어. 지금 이렇게 자네를 붙잡고 넋두리를 하는 것은…나잇값 못하는 사내의 투정이라네.”

“알고 계시니 다행이긴 합니다만.”

“오늘만이야. 오늘 다 털어낼 테니, 이후로 이런 모습을 보일 일은 없어.”

“좋습니다. 그렇다면 기왕에 털어내는 거, 바닥 끝까지 싹 다 털어내시죠. 한 잔 더 하시고.”

그날. 살라스와 할렌은 거나하게 취할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고, 끝내 수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들의 막사로 들어갔다.

* * *

“잠잠하군요. 정말 다 잔챙이들만 남은 모양입니다.”

할렌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유게르 티브리악이 군대를 이끌고 바크렌으로 들어간 지도 벌써 한 달 가량이 지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어떤 원조 요청도 오지 않고 있었다. 잔당 토벌이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어렵지 않다는, 순조롭다는 뜻이리라.

“글쎄. 꼭 그런 것은 아닐지도 몰라. 아니, 결론적으로는 같은 것인가.”

“무슨 뜻이지?”

할렌이 모레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게르 티브리악은…어리석은 자는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당히 강해. 그리고 그 이상으로 욕심이 많지. 잔당들의 토벌에 다소 어려움을 겪더라도, 이쪽에 손을 벌리려고 하지는 않을 테지.”

“공을 독차지하겠다 이거군.”

“총독의 지위를 약속 받았다고 해도, 대외적인 명분이 필요하니까. 되도록 뒷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공적이 필요하겠지. 또한, 장군께서 공을 세우는 것도 최대한 막아야 할 테고.”

“그렇다면, 티브리악은 장군의 적인가?”

“글쎄.”

모레인은 즉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은 이미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것을 곧바로 입 밖에 내지 않은 것은 사나운 눈을 한 할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됐다.’

미련은 없다. 어차피 쥐 죽은 듯 죽어 살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이리 될 운명이었다.

“자신의 몫을 줄이면서 남에게 득 될 일을 할 자들은 흔치 않지. 티브리악은 그저 선택을 한 것뿐.”

“흐음…가문의 일이라고 해서 편을 드는 건 아닌가?”

“후우.”

모레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군터는 없다. 상석에는 살라스가 앉아 있었고, 나머지는 할렌과 자신을 비롯한 천부장들.

오늘의 이 자리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마도 이것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티브리악에서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지금, 티브리악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자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겠지.

“사실, 이런 자리가 별로 내키지는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확실히 해둬야 하지 않겠나.”

살라스의 가라앉은 눈이 그를 향했다.

한 쪽 팔을 잃고, 무인으로서 사형선고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이전보다도 더 위압적이게 변했다. 큰 좌절을 겪으면서 그의 정신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일까. 모레인은 그의 시선이 꽤나 무겁다고 느꼈다.

“어느 쪽인가?”

“그걸 굳이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자네의 입으로 분명하게 말해주기를 바라네.”

살라스의 추궁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말 자신을 의심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님을 알았으니까. 살라스는 지금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분명히 밝히고, 몇몇 의심의 눈초리를 걷어낼 수 있는 기회를.

“이제껏 그들이 저를 가족으로 대하지 않았는데, 제가 그들을 가족으로 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전부터 티브리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알 겁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모레인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모레인 티브리악’이라 소개하지 않았다.

“그건 티브리악의 뜻이었지만, 제 뜻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까?”

“아니. 충분해. 그거면 됐네.”

그 말에 모레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다.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 버리지 못했던 걸까. 설마하니 미련이라도 남았던 걸까.

‘그럴 리가.’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이야기다. 티브리악은 티브리악의 길을 갈 것이고,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갈 테니.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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