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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17화 (517/1,064)

517화

연회가 끝났다. 그 말인즉, 권력자들의 줄다리기가 끝났다는 뜻이다.

연회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대전에서 회의가 열렸다.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이 얻은 바크렌에 관한 여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후자에 관한 논의는 논의랄 것도 없이 싱겁게 끝났다. 누군가 한 명이 ‘이러는 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을 하면 다른 이들이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건 마치 싸구려 연극 같았다. 너무 뻔했다. 연극보다 나은 점이라면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밖에서 벌어지는 실제이기 때문에 조금 더 생동감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

군터는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지루한 것을 계속 눈에 담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는 조금 더 현명해지기로 했다.

“이보게. 자네 마음은 이해하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대놓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의 옆자리에 서 있던 비스칼 구르얏트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나와 상관 없는 것 때문에 지치는 것도 미련한 짓이지.”

“그렇기는 하지만, 저기 좀 보게. 자네를 보면서 헛기침 하고 있는 작자들 말이야.”

그래도 군터는 눈을 뜨지 않았다. 뭐, 확실히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대놓고 그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황자도 뭐라 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이 먼저 나서서 쓴 소리를 할까?

“하여간 대단해. 정말 대단해. 봤나? 전하께서도 웃으시는군.”

눈을 감고 있는데 보긴 뭘 본단 말인가. 하지만 황자가 웃었다라. 짐작했지만, 역시 황자도 그의 불손함을 지적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크흠! 그렇기 때문에…바크렌으로 출병할 군대는 유게르 티브리악 공이 맡는 것이 좋아 보이옵니다.”

“그대로 시행하라.”

어쩐지 목이 매는 것 같은 늙은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자가 건조하게 답했다. 들었던 대로, 티브리악 가문의 유게르라는 녀석이 바크렌으로 가게 되는 것 같았다.

“군터 장군.”

“예.”

황자의 부름에 군터는 눈을 떴다.

“바크렌에 지금 파헨델에 군대가 주둔 중이지?”

“예. 일부 주둔 중입니다.”

“임지로 돌아가라. 그리고 주둔 중인 군대를 복귀시켜. 들은 대로, 지금 이 순간부터 바크렌의 일은 새로이 출병할 유게르 티브리악의 군대가 맡을 것이다. 자네의 군대가 빠진 동안에는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이 조금 더 힘을 써줄 것이고.”

“예.”

그 뒤로도 몇 가지가 더 나오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요하기는 하지만, 죄다 뻔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제국 서부를 손에 쥔 27황자와 일전을 치르게 될 확률이 크니 그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

“군터 장군.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려던 군터를 근위대 병사가 붙잡았다. 군터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대전에서 황자와 마주했다.

“꽤나 지루해 보이더군.”

“의미 없다고 느끼기는 했습니다.”

황자가 피식 웃었다.

“파헨델로 돌아가라.”

“예.”

맡은 일을 마쳤으니 다시 임지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 군터는 덤덤히 수긍했다. 하지만 황자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없던 것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의 활약은 꽤나 인상 깊었다. 군사를 조련시키는 데도 재주가 있더군.”

“…….”

“하던 대로 해라. 군사를 조련시켜. 곧 진짜 전쟁이 벌어지면, 그때 너와 네 군대를 요긴하게 쓸 것이다.”

“전쟁이라면, 언제쯤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글쎄. 내가 먼저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클네과 타라냐드가 내 손에 들어왔으니, 이대로 판세가 굳어지면 불리한 것은 그 놈이거든. 놈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테고.”

연이은 전란으로 황폐화 되었다지만, 그래도 1개 주인 바크렌을 포함하면 7황자의 손에 있는 주는 총 6개. 거기에 2황자의 세력이었던 오젠과 판니른 같은 주에 대한 복속 작업도 꾸준하게 진행 중이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유리해지는 것은 7황자였다.

“아마도, 오래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나운 놈이 조급함까지 가지게 되면 무모해지는 법이거든.”

* * *

파헨델로 돌아가기 전. 군터는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테리브란에 있는 동안 의식적으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가족들은 그가 임지로 돌아가는 것을 전보다 더 크게 아쉬워했는데, 특히 실비아가 눈에 띄게 침울해 했다.

“…….”

군터는 입을 꾹 다문 실비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이 느껴졌다. 혈육의 동요는 그의 굳은 마음에도 아주 미세하게나마 흔들림을 주었다. 군터는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침울해하는 실비아를 한동안 계속 눈에 담았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곧 다시 보게 될 거다. 그때는 우리 네 식구가 다 같이 모이겠군.”

보리스는 지금 파헨델에 있다. 휴가를 나오는 기간을 맞추면 함께 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거라. 어머니 말도 잘 듣고.”

“네…….”

실비아의 눈이 기어이 붉어졌다. 군터는 그것이 의아했다.

‘좋은 아비는 아니었을 텐데.’

특별히 못해준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히 잘해준 것 또한 없다. 함께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같이 있는 동안에도 살갑게 대해준 적이 없었다.

때때로 전쟁에 나가 몇 개월씩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아비를 어색해하던 실비아를 떠올려 보면, 역시 그리 좋은 아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런 아비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눈을 붉힌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예전의 기억을 기준으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잘 있거라.”

실비아의 눈에서 끝내 한 방울 떨어져 내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고, 군터는 몸을 돌렸다. 살라스와 몇몇 병사들이 이미 그의 자택 앞에서 말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장군.”

“가자.”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봐야 할 사람은 가족들이 아니라, 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황자였다. 요식행위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나름 황자의 배려다. 전장에서 세운 대공은 없었던 것이 되었고, 돌아온 것은 기껏해야 별 느낌도 들지 않는 포상금이 전부. 그런 상황이니 임지로 돌아간다고 해서 특별한 환송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곧 부르지.”

“전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황자의 배웅은 특별하다. 그의 총애가 여전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순수한 의도만은 아닙니다. 사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들의 마음은 결코 한 가지로만 움직이는 법이 없지요.’

황자의 총애는 날개도 되지만, 동시에 족쇄도 된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황자의 총애를 받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게 될 테니까. 이 역시 황자의 의도일 것이라 야스메티는 단언했다.

‘상관 없다.’

주고 받는다. 받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치르리라.

그날. 군터는 그의 수하들과 함께 테리브란의 북문을 나섰다.

* * *

테리브란을 떠난 군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헨델에 도착했다. 일행 전원이 능숙한 기병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한 팔을 잃은 살라스가 있었기에 사실 일정을 느슨하게 잡을 생각도 했던 군터였다.

그런데 살라스는 한 팔로도 제법 능숙하게 말을 탔다. 꽤나 노력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보니 그간 얼마나 악착같이 땀을 흘렸을지 알 것 같았다.

뿌우우우우-!

파헨델의 성문이 보일 무렵.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장군!”

할렌이 가장 먼저 말을 몰고 달려오다가 뛰어내리듯이 그의 앞에 내려섰다.

“내가 없는 동안 일을 본다고 수고가 많았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 장군께서 고초를 겪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을 설치느라 고생하기는 했습니다만.”

“아부가 늘었군.”

“아부라니요. 진정입니다.”

“좋은 꼴을 보지는 않았지만, 나쁜 꼴을 보지도 않았다.”

사실이다. 황자가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어준 덕에 금기를 범한 일로 군터에게 안 좋은 소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또한 비록 공적은 빼앗겼다지만 위로금조로 어느 정도 포상을 받기도 했고.

“군대는?”

“바크렌에 있는 군대는 지금 돌아오고 있습니다. 빠르면 닷새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군터는 곧장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밀렸던 보고들을 받고, 파헨델의 상황을 들었다.

“물자는 충분합니다. 다만 의사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전에 보냈던 것으로는 부족한가?”

“거동하기 힘들 정도의 중상자들이 아직도 사백 가량입니다.”

“전령을 보내라. 의사들을 있는 대로 보내라고 전해.”

“예.”

전쟁은 끝났지만 전후 처리는 이제 시작이나 다름 없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역시 아직까지도 산발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그거야 테리브란에서 출발한 군대가 알아서 할 일. 군터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부상으로 신음하는 그의 병사들이었다.

“포상금을 풀어라.”

“전부 말입니까?”

군터는 이번에 테리브란에서 받은 포상금을 풀었다. 병사들의 머릿수가 있는 만큼,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을 정도는 됐다.

“병사들이 장군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값싼 칭송이로군.”

“병사들은 똑똑하지 않지만, 그래도 장군과 같은 분이 또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할렌의 말은 아부가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파헨델의 병사들은 이제 군터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그의 용맹은 그들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공을 홀로 독식하지도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받은 것 전부를 휘하 병사들에게 베풀기도 했다. 이런 상관에게 충성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사실 장군께서 사령술을 쓰신 일로 잠깐 안 좋은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만,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분위기입니다.”

시체들이 살아 움직였네 어쩌네 하는 건 대다수의 병사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그 자리에서 실제로 경험한 병사들의 경우에도, 그 시체들이 자신들을 위해 싸워주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가진 사령술에 대한 거부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섭섭잖게 포상까지 해주니, 그들이 군터를 칭송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빈 자리가 꽤 생긴 걸로 안다.”

“예. 그렇습니다.”

어렵지 않은 전쟁이라도 피를 흘리지 않을 수는 없다. 병사들도 적잖이 죽어나갔지만, 장교들 역시 꽤나 죽어나갔다.

“빈 자리는 채워야겠지.”

파헨델의 군대에 대한 전권은 군터에게 있다. 그런 만큼 천부장까지는 그의 재량으로 임명이 가능하다.

“명단을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할렌은 그리 말한 다음날에 명단을 작성해서 가지고 왔다. 형식적으로 명단을 쭉 훑어보던 군터의 눈이 명단의 한 지점에 이르러 멈췄다.

“할렌.”

“예.”

“이 명단에 네 사심은 들어있지 않은 것이겠지?”

“장군. 저를 모르십니까?”

사심은 없다는 뜻이다.

“병사들이 어찌 생각하겠나.”

“병사들의 눈이 무서워 있어야 할 이름을 뺀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심이 담기는 꼴이 아닙니까.”

“…그래. 네 말이 옳다.”

군터가 명단을 내려놓았다.

“이대로 진행해라.”

“예.”

열 일곱의 십부장이 백부장으로 진급했다.

보리스가 그 중 하나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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