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515화 (515/1,064)

515화

유게르 티브리악.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어쩌면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기억에 남아있는 이름은 아니다. 사실 티브리악이라는 가문 자체도 특별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제레이스에 버금가는 명문 귀족 가문이라는 정도? 그리고.

‘모레인의 가문이군.’

모레인 스스로 가문의 일원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방계 중의 방계라고 했었던가. 하여간 티브리악이라는 이름은 군터에게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속닥거린 건 여럿이겠지만, 전면에 나선 것은 티브리악이지. 이는 곧, 티브리악이 바크렌을 먹겠다는 뜻이야.”

“그건 너무 나간 것 아닌가?”

빌리치 아조프가 한 마디 끼어들었지만 비스칼 구르얏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확실해. 바크렌에 남은 잔당을 토벌하면서 그 공으로 바크렌을 먹겠다는 속셈이야.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가문의 재산까지 털어가면서 군대의 인선을 자기들 입맛대로 꾸린 게 아니겠나.”

“으음.”

빌리치 아조프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비스칼 구르얏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파헨델의 군대가 빠지고 생긴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곧 테리브란에서 군대가 출발한다. 그런데 그 군대의 인선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티브리악의 뜻대로 채워졌다고 했다. 아무리 티브리악이 전공을 세우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 해도 다른 권력자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 독단적인 인선이 가능할 리가 없다. 보통의 경우라면 말이다.

“어지간히도 쓴 모양이더군. 단순히 재물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이권들까지 적잖이 넘겼다는 모양이야. 그뿐만이 아니지.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에게까지 선을 댄 모양이더군.”

“그게 정말인가?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그쪽과는 연이 있거든. 이전에 장군께 용병술을 배운 적이 있는데, 장군께서 그때 나를 좋게 보셨지.”

“그렇다면…….”

“장군께서 직접 서신을 통해 알려주신 것이네. 이쪽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싶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울타마란 소레딜은 빈 말을 하지 않는다. 비스칼 구르얏트 역시 마찬가지.

“티브리악의 늙은 당주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보군.”

“승냥이 같은 늙은이야. 노욕에 눈이 먼 게지.”

“마냥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닌가. 전하의 밑에 엎드린 자들은 셀 수 없지만, 그들 중 순수하게 제국과 전하를 위해 충정을 바치는 이가 얼마나 되겠나.”

“그렇다 한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와서는 안 되지! 그것도 한때 총독 가문이었으며, 또 다시 그 자리에 서겠다는 자들이 말이야!”

비스칼 구르얏트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티브리악의 행사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라면 피해자일 수 있는 군터는 아무런 화도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미동도 하지 않았어도 그의 머리, 이성은 이 상황에 대해 판단했다. 그것은 불쾌함이었다. 그러나 느끼는 불쾌함이 아니라 기억하는 불쾌함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불쾌함을 기억해냈다. 이럴 때는 불쾌해야 한다. 지금 그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비스칼 구르얏트처럼.

“군터. 자네는 화도 나지 않는가? 저 늙은 승냥이가 자네의 공을 다 가로채려 하고 있단 말이네.”

비스칼 구르얏트의 시선에, 군터는 천천히 입을 뗐다.

“화는 모르겠고, 불쾌하긴 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으음.”

“당장 티브리악 가문을 쳐들어가서 자네가 말하는 그 늙은 승냥이의 멱살이라도 잡을까?”

당연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비스칼 구르얏트 역시 군터가 뭘 어떻게 하기를 바라고 말을 꺼낸 건 아닐 터였다. 그저 자기 분에 못 이겨서 감정의 호응을 바란 것뿐이지.

그렇기에 군터의 서늘한 반응은 그를 진정시켰다. 여기서 이러니저러니 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의미 없는 감정 소모일 뿐.

“…….”

군터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비스칼 구르얏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황자 전하께 충성하는가?”

“물론이지.”

빌리치 아조프가 즉답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제레이스와 함께 하지 않는가?”

비스칼 구르얏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몰라서 묻나? 전하의 외척이랍시고 같잖은 위세를 부려대는 놈들과 어찌 나란히 설 수 있겠나.”

단순히 제레이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황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력의 구심이 제레이스인 만큼, 그들 무리 전체를 싸잡아서 하는 말일 것이다. 황자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는 이들. 비스칼 구르얏트의 찡그린 얼굴에서는 그들에 대한 혐오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 치들은 부패하고 타락했어. 고귀한 혈통이라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 아니, 그 놈들은 더하지. 놈들이 전하를 지지하는 것은 혼란스런 제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저 제 놈들 배만 부르면 그만인 게지. 놈들에게는 대의가 없어. 알겠나? 대의 말이야.”

‘대의라…….’

제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제국을 다시 강성하게 만든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택한 주인을, 7황자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한다.

그리 말하는 비스칼 구르얏트에게서는 강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신념일지도 모른다. 말은 안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빌리치 아조프 역시 마찬가지.

‘명예욕인가?’

군터는 이들이 말하는 대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처럼 평생 제국인이었던 게 아니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들처럼 ‘고귀한 피’를 가지지 않아서일까.

‘나와는 다르군.’

빌리치 아조프, 비스칼 구르얏트.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훌륭한 군인이고, 무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길은 자신의 길과 다르다.

‘나와는 달라.’

그들의 세상은 제국이지만, 자신의 세상은 제국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 자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은 제국을 위해, 황자를 위해 싸운다고 하지만, 그는 아니다.

“자네는 어떤가?”

빌리치 아조프가 물었다.

“무슨 말이지?”

“자네는 무엇을 위해 전하를 섬기는가?”

그들이 처음 친분을 맺은 후로 사석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질문은 군터에게 있어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초원에서 태어난 그는 제국군에 몸을 담았다가, 반군에 속했다가, 다시 제국군으로 소속을 바꿨다. 어찌 보면 충의 없는 자라고 여길 수도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물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러면서 혹 군터가 기분 상해 하는지를 조심스레 살폈다.

하지만 군터는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빌리치 아조프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속을 떠보려는 것 같았다. 화제가 나온 김에 묻는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혹 이번에서 제레이스의 연회에서 보였던 행동이 영향을 미친 것일까? 알 수 없지만, 진지하게 답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빌리치 아조프가, 비스칼 구르얏트가 사뭇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다.

‘함께 하기를 바라는 건가.’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색을 드러냈다. 이전에도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을 성토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지금 그의 ‘답’을 바라는 것이다.

“자네들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네. 그러니 솔직하게 말하지. 허나 내 대답이 자네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몰라.”

“괜찮네.”

두 사람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군터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입을 뗐다.

“나는 전하께 빚이 있지. 전하께서는 갈 곳 없는 이 몸을 받아주시고, 중용해주셨네. 말하자면 빚이 있는 셈이지.”

“…그래서?”

“난 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어. 저 북쪽의 초원에서 태어났지. 그러다 환란을 피해 어린 나이에 제국으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따를 만한 이를 만났고, 그를 따라 제국에 반기를 들었지.”

“자네의 과거는 다 알고 있네. 굳이 다시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자네들의 마음 속에 자리한 제국과 내 마음 속의 제국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이야. 난…제국의 부흥이니 뭐니 하는 것은 잘 모르겠네. 내가 따르는 것은 제국이 아니라 전하야. 전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그 은혜를 갚고자 하네. 내가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은 단지 그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어.”

“…그래. 이해하네. 자네와 우리는 같지 않지. 살아온 길이 다른데 어찌 온전히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자네가 전하를 위해 싸운다는 것만은 우리와 다르지 않지. 사욕에 몰두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그렇지 않나?”

“자네들이 본 내가 있을 것이 아닌가. 알아서들 판단하게.”

군터는 말을 아꼈다. 그러자 빌리치 아조프와 비스칼 구르얏트는 그가 마음이 상한 것이라 짐작했다. 방금 빌리치 아조프로부터 시작된 문답은 얼핏 추궁을 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이런. 혹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겠네. 나는 단지 자네의 진의를 알고 싶었다네. 이번에 제레이스의 연회에서 자네가 보인 행동은…여러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거든. 어찌 보면 제레이스에게 대놓고 무안을 준 셈이 되지 않았나. 그들을 후원하신 전하께도 말이야.”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네. 난 단지, 그런 판에 끼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뿐이야. 되도록 그런 문제는 신경을 끄고 싶네. 내게 있어서는, 연회장보다 차라리 전장이 편하네.”

“하하. 연회장보다는 전장이 편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할 걸세.”

“전장에서는 피아식별이 분명하지. 하지만 정치판이라는 곳은 그렇지가 않아.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어.”

“음. 자네의 말대로네. 어제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눠놓고 오늘은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그런 꼴을 보고 있으면 정말 여러 생각이 든다네.”

군터의 속내를 알게 된 두 사람은 다시 웃음기를 찾았다. 군터가 짐작한 대로, 그들이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그의 속을 떠보려 했던 것은 전날 군터가 제레이스의 연회장에서 저지른 일 때문이었다.

제레이스 가문에서 공을 들여 준비한 연회를, 황자에게 인사만 하고 바로 돌아가버린 것은 제레이스에 대한 무례로 비칠 수도 있지만 나아가 제레이스를 은근히 밀어준 황자에 대한 불경으로까지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신의 색을 보이는 행동치고는 너무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여 그들은 군터가 혹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지 걱정했었다. 하지만 서로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니 그것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 독특하단 말이야. 세상이 넓다지만, 장담컨대 자네와 같은 자는 또 찾아보기 힘들 것이네.”

‘별나지. 참으로 별나.’

인간인 이상 욕심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니 분명 군터에게도 욕심은 있을 것인데, 빌리치 아조프는 군터가 가지고 있는 욕심이 무엇일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군터는 투명했다. 타고난 군인이 있다면 바로 그 같은 사람을 이르는 것일 터.

“그나저나 연회가 끝나고 나면 자네도 곧 임지로 돌아가게 되겠군.”

“그렇겠지.”

“티브리악이 바크렌의 잔당을 소탕한다고는 하지만, 자네도 파헨델에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야겠지?”

“아마도.”

“그러나 바크렌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고 나면, 그때도 자네가 파헨델에서 썩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거야 전하의 의중에 달린 일이겠지.”

“물론 그렇겠지만, 더 중요한 일전이 기다리고 있으니 전하께서 자네를 파헨델에 계속 두실 리가 없네.”

“더 중요한 일전이라. 서쪽의 적을 말하나.”

“그래. 사나운 호랑이가 독이 잔뜩 올라 있을 것이니, 분명히 크게 일전을 벌여야 할 때가 올 것이야.”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