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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14화 (514/1,064)

514화

“아. 혹시 내 소개가 필요하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행이군. 이쪽 분들은?”

빌리치 아조프와 비스칼 구르얏트가 살짝 당황한 와중에도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빌리치 아조프라 합니다.”

“비스칼 구르얏트입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들의 이름을 들어본 것인지, 가문을 들어본 것인지는 모르지만 꽤나 살가운 태도로 그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뜻밖이군요. 각하를 찾는 이들이 많을 터인데 말입니다.“

빌리치 아조프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몇몇 이들을 슬쩍 곁눈질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날 보고자 하는 이들은 많소. 그들을 일일이 다 보려면 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거요. 내가 만나는 건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싶은 자지. 여기 있는 군터 장군 같은 사람 말이오.”

그의 시선이 군터에게 향했다.

“평소에 최대한 귀를 열어놓고 사는 편이라오. 타라냐드에 박혀 살지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장군의 이야기가 들려오더군.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지.”

“그렇습니까.”

“내가 장군을 당황스럽게 했소?”

“조금 놀라기는 했습니다.”

정확히는 놀랐다기보다 뜻밖이었다.

“소장이 궁금하셨다면 따로 찾으셨어도 될 터인데, 이렇게 보란 듯이 다가오셨으니 말입니다.”

단순히 만나고 싶어서 왔다, 라는 말은 결코 이유가 될 수 없다. 군터는 눈으로써 자이드라 멕시스에게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다.

시선에 담긴 뜻을 읽었을까? 자이드라 멕시스가 싱긋 웃었다.

“장군이 바로 내 앞에 있는데 만나보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직설적이군.”

“돌려 말하는 성격은 못 되어서 말입니다.”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언사였으나 자이드라 멕시스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 진해졌다.

“사람들은 내게서 많은 것을 보지. 영리한 통치자, 교활한 기회주의자, 잔혹한 권력자, 등등.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자이드라 멕시스일 뿐이야. 내 진짜 모습은 오직 나만이 안다오.”

“…….”

“신경쓰기도 귀찮을 지경이야. 어지간해야 말이지. 그래서 난 그들이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놔둔다오. 장군. 내가 지금 장군을 찾은 것이 어떤 복잡한 계산 끝에 나온 행위라 보시는가?”

군터는 여전히 웃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작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그의 모습은 총독이라는 지위에 맞지 않게 가벼워 보였으나, 그럼에도 어쩐지 쉽게 대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음?”

“각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처음인데, 각하의 속내를 소장이 어찌 알겠습니까.”

자이드라 멕시스가 만족한 듯 웃었다.

“귀를 열어두고 있다는 것.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지. 장군은 무공을 제하고서라도 꽤나 괜찮은 사람이로군.”

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크게 소란이 일었다. 군터가 들어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원신의 총아이자 카라누르의 정당한 황권 계승자이신 자콥 엘 트라소프 전하께서 납십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입구 쪽을 슬쩍 보고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나중에 다시 봅시다. 장군과는 아직 나누지 못한 말들이 많이 있소.”

“그러시지요.”

황자가 연회장에 입장한 뒤로는 모든 것이 황자 위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물론, 권력자들은 전부 황자 주변으로 모여들어 장식품처럼 서 있었다. 연회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시리 제레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황자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서 황자를 호종 하듯 따라다녔다.

“전하. 소장은 이만 물러가고자 합니다.”

군터가 황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러자 황자는 피식 웃었다.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연회는 훌륭합니다. 다만.”

“농이다. 그대가 이런 자리를 안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외숙이 아쉬워하겠군. 꽤나 공들여서 준비했을 터인데 말이야.”

황자의 시선을 받은 다이시리 제레이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군터 장군이 초대에 응하여 준 것만으로도 신의 면을 세워준 셈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그렇게 군터는 이제 막 연회가 시작되려는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황자에게 예를 표하고 물러나는 그에게 무수한 시선이 꽂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터는 처음 연회장에 들어설 때와 같이 담담히 걸었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그의 앞길은 뻥 뚫려 있었다.

* * *

“으음.”

야스메티는 신음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냈다. 찌푸리고 있는 것인지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를, 괴상한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

“네 말대로 한 것이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설마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와버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하여간 장군의 색 하나는 아주 제대로 보여주셨군요.”

“그럴지도.”

“하지만 아쉽군요. 제레이스 가문에서 그렇게나 열심히 준비한 연회라면 정말 대단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연회는 오늘 막 시작됐다. 앞으로 못해도 열흘 정도는 이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그들과는 상관 없게 된 일이지만.

“정 궁금하다면 갔다 와도 괜찮다. 내 대리인 자격을 내어주지.”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이 가봐야 뭐하겠습니까.”

야스메티가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는 군터가 한 이야기를 속으로 곱씹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그에게 다가와, 군터의 말에 따르면 ‘친한 척’을 했다는.

“자이드라 멕시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째서지.”

“그는 영리한 자입니다. 그것도 보통 영리한 것이 아니지요. 게다가 배짱도 두둑합니다. 그런 자를 헤아리려고 할 때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함정?”

“멋대로 그를 헤아리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영리한 자의 속은 복잡해서, 함부로 들여다보려 했다가는 휘말릴 수가 있습니다. 제 발로 미로에 들어가 갇히는 꼴이지요. 그러니 영리한 자를 파악하려 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드러난 사실만을 놓고 보는 거지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완전한 사실만을 근거로 다가가는 겁니다.”

야스메티가 말을 이었다. 원래도 검은 눈 밑이 더 거뭇한 것으로 보아 어젯밤에도 꽤나 무리를 한 것 같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총기로 빛났다.

“물론 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나 유효한 것입니다. 시급을 다투는 상황에서는 위험을 무릅써야겠지요. 허나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이드라 멕시스가 장군을 상대로 장난을 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차분하게 기다리십시오. 그가 장군께 용건이 있다면 어련히 알아서 스스로 밝힐 것입니다.”

정론이다.

그리 생가한 군터는 야스메티의 조언을 십분 받아들였다. 그는 자이드라 멕시스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서 멀찍이 미뤘다. 그리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간 어쩔 수 없이 소원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 스스로를 위함이기도 했다.

“아버지.”

그는 실비아와 함께 도시 밖으로 나와 있었다. 호위로 붙은 병사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고, 그와 실비아는 단 둘이 너른 평지에서 말을 몰았다.

“음?”

한참을 달리다가 막 속도를 줄인 참이었다. 말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활짝 웃던 실비아였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싹 지우고 있었다.

“저도 혼인을 하게 되나요?”

“…그렇겠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군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인이야 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실비아는 벨리사를 닮아 꽤나 예쁜 편이었다. 아비로서의 시선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말이다. 널리 미색으로 이름을 떨칠 정도는 아니어도, 예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됐다.

거기에 귀족은 아니라지만 어쨌든 장군가의 여식이니 배경도 부족하지 않다. 그녀가 혼인을 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게 아니라…….”

그러나 군터는 이어진 실비아의 말에, 그가 말을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필요에 의해 혼인을 하게 되느냐는 말이었어요. 그…정략혼이라는 거요.”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저도 이제 알 건 아는 나이니까요. 이리저리 들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

“당연한 거라고들 하더라고요. 누리는 것에 대한 책무라고. 그래서 저도 그렇게 되는 걸까, 궁금해져서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지만, 군터는 실비아의 목소리에서 거부감과 바람을 읽었다. 당연하다. 담담한 척을 할 수는 있어도, 어찌 진정 담담할 수 있겠나.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없다.

“글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비아의 말대로다. 가문이라고 할 만한 곳에서 태어난 이들은 가문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 특히 여인들의 경우, 그들이 하는 ‘혼인’은 곧 ‘정략혼’이다. 심지어 상대의 얼굴도 못 본 상태로 혼인을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혼인과 정략혼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다. 두 개가 같은데 왜 굳이 두 가지말을 쓰겠는가.

“네 생각은 어떠냐?”

“예?”

“정략혼이라는 것을 하고 싶으냐?”

“…….”

군터와 실비아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더 자라야 하는 어린 숙녀는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군터는 실비아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아니요.”

“그럼 됐다.”

“……?”

“네가 바라지 않는다면 시키지 않겠다.”

“하지만, 그게 여인이 가져야 할 책무라고…….”

“아비는 네게 그런 책무를 지게 할 정도로 궁핍하지 않다. 궁핍하다 해도 네게 그 짐을 넘길 생각도 없고.”

머뭇거리는 듯하던 실비아가 이내 활짝 웃었다.

“…….”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군터가 고개를 돌렸다.

아주 조금. 바람이 상쾌해진 것 같았다.

* * *

군터는 그의 빌리치 아조프와 비스칼 구르얏트 두 사람과 자리를 가졌다.

“연회는 아직도 한창 진행 중이라네. 덕분에 사이주 공도 몸을 빼기가 어렵다더군.”

빌리치 아조프가 말했다.

“연회가 끝나면 곧장 대전 회의가 열리겠지. 전후 처리를 논하는 자리겠지만…실상 논의는 연회장에서 다 끝나고, 대전에서는 결정만 내려질 것이야.”

“그렇군.”

군터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비스칼 구르얏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담담한데? 아쉽지 않은가? 자네가 다 이뤄놓은 것을 엄한 놈이 채가는 꼴이 될 것이 뻔한데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습군. 우스워. 자네, 그 금기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고 있나? 한다 하는 가문들에서는 적어도 한 명씩은 사령술사를 두고 있네. 왜인지 아나?”

“글쎄.”

“정적을 제거하는 가장 손쉽고 효율적인 방법이 뭐겠나? 암살 아닌가. 그런데 이 암살이라는 것 중에 가장 효율적인 것이 바로 사령술이야. 암살자보다도, 독보다도 더 효율적이지. 은밀히 저주 같은 것을 걸면 알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리거든. 아, 그렇다고 제국의 실력자들이 죄다 교사범이라는 것은 아니네. 그들 중 대다수는 그런 암수에 대응하기 위해 사령술사를 휘하에 두지. 물론 사령술사를 비호하는 것은 금기이기에 사령술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네. 그러나 공공연한 비밀이지.”

“…….”

“정적을 죽이기 위해,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 금기를 범하는 것들은 괜찮고, 전장에서 승리하기 위해 금기를 범하는 것은 안 된다? 우스운 일이지. 우스운 일이야.“

“그만하게.”

비스칼 구르얏트가 자기 일도 아닌데 자기 일보다 더 흥분하자 빌리치 아조프가 그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비스칼 구르얏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자네의 공을 어느 놈이 채가는지 알고 있는가?”

“아니.”

“유게르 티브리악. 레네프 티브리악의 장남.”

티브리악이라.

익숙한 성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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