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제레이스 가문의 연회.
자이드라 멕시스는 제레이스 가문의 초대장을 가장 빨리 받은 이들 중 하나였다. 현 정계에서 그는 그야말로 태풍의 눈과 같은 존재인데다, 시기의 특수성을 제하더라도 그는 타라냐드의 총독이었다. 급으로 따진다면 제레이스의 당주와 동급이니, 귀빈 대접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그가 연회의 중심에 서 있지 않고 몇 안 되는 이들과 담소만 주고 받는 지금과 같은 상황은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연회가 아주 훌륭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공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요.”
“하하.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자이드라 멕시스가 껄걸 웃었다. 다이시리 제레이스도 조용히 마주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상대를 탐색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속을 알 수가 없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과할 정도로 잘 웃는 호인이다. 허나 그게 그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아버님을 보는 것 같군.’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작고한 부친을 떠올렸다. 매일 적잖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가 부친의 속내를 알 수 있었던 건 오직 부친이 스스로 털어놓을 때뿐이었다.
그는 자이드라 멕시스를 보며 그때의 그 답답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저 가면 안에 어떤 얼굴이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넌 지금 무엇을 보고 있지?’
그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젊은, 아니 어린 나이에 타라냐드의 총독에 올라 타라냐드를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들어버린 걸물. 부친도, 황자도 종종 그 이름을 이야기 했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사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에게 있어 지긋지긋한 이름이었다. 그보다 조금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나이 대라고 할 수 있는 이였기에 그는 늘 자이드라 멕시스와 비교 되었다. 같은 북부 귀족에, 같은 총독 가문의 혈통, 비슷한 나이.
열등감에 시달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으나,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자이드라 멕시스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했다.
‘그는 총독이고, 나는 아니지.’
총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총독 가문의 후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젊은 나이에 총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의 부친이었던 전대 총독이 일찍 죽어서다. 물론 그렇게 총독이 된 뒤에 보인 역량은 부정할 수 없지만, 다이시리 제레이스는 그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
그가 타라냐드의 총독이 될 일은 없다. 데이븐랏지의 총독이 될 일 또한 없다. 그에게는 그의 위치가 있고, 그 위치에서 역량을 발휘하면 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이드라 멕시스가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결국 네가 이곳에 온 것도 전하의 앞에 무릎 꿇기 위함이지. 너와 네 일족을 지키기 위해서.’
이 연회는 제레이스의, 자신의 연회다. 황자가 제레이스 가문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배려를 해준 것이다. 제레이스 가문이 황자의 외척이며, 동시에 가장 큰 후원자이기 때문에.
‘너와 네 가문은 결코 오르지 못할 위치지.’
그는 여유로웠다.
여우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은 조금 답답한 일이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여우가 무슨 꾀를 부리든 여우는 여우이고, 대국(大局)은 대국. 이미 바크렌은 손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고, 타라냐드는 이쪽의 손을 잡았다.
“공께서는 타라냐드의 총독이 아닙니까. 마음만 먹으신다면 이 정도 자리 쯤은 얼마든지 마련하실 수 있을 터인데.”
“타라냐드는 궁벽한 땅이지요. 이 정도의 성대한 연회는 꿈도 못 꿉니다. 게다가, 연회의 격이라는 것은 주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객들이 만들어주는 것이지요. 내가 아무리 성대하게 연회를 준비한다 한들, 이곳에 계신 분들처럼 귀한 분들이 자리를 빛내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도 그렇군요.”
자이드라 멕시스의 주변에는 제레이스. 자하브. 캄브라이. 카리아. 티브리악 등, 주변 최고 권력가의 당주들이 한 데 모여 있었다. 감히 그 누구도 그들의 여유로운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하다 못해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도 없었다.
“바크렌에 보내셨던 장군에 대해 들었습니다. 평민 출신이라지요? 이름이 분명…델라모리였던가요?”
“하하. 그런 것까지 들으셨습니까? 예. 맞습니다. 평민 출신이지요.”
“평민에게 일군을, 그것도 그런 중요한 일을 일임하시다니. 배포가 대단하십니다.”
“배포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일을 잘 하는 자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하께서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평민, 그것도 저 초원 출신을 위장의 자리에 앉히셨지요. 사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제가 전하를 택한 이유 중 하나였지요.”
“호오. 그렇습니까?”
귀족 중에서도 가장 위에 위치한 이들이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다이시리 제레이스만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 마디를 더했다.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군요.”
자이드라 멕시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가 다이시리 제레이스를 보았다. 지금까지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선이 마주친 적이야 당연히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흥미롭다 말한 것은 다이시리 제레이스였지만, 눈에 흥미의 빛이 돈 것은 자이드라 멕시스 쪽이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귀족보다는 평민의 수가 월등히 많지요. 고귀한 핏줄만 하겠습니까마는, 평민들 중에서도 어찌 인물이 없겠습니까. 넓은 안목과 아량으로 그들을 품을 수 있다면, 대업을 이루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헌데…….”
더 대화를 이어가려는 순간. 연회장의 입구 쪽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그들이 소란이 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적잖은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장신의 사내가 보였다.
“군터 장군이군.”
‘호오.’
자이드라 멕시스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 * *
“들어가십시오.”
하인들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문을 활짝 열었다. 덕분에 군터와 살라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연회장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연회장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아도, 최대한 억눌러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거친 기세는 군터의 존재감을 키웠다. 연회장 안에 들어서서도 그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 이유였다. 그가 가는 길 앞에 있던 이들이 알아서 찔끔하며 물러났기 때문이다.
“많군요. 테리브란에서 이름을 알 만한 이들은 전부 다 모인 것 같습니다.”
살라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똑바로 걸어라.”
“예?”
“몸을 옆으로 틀지 말라는 거다.”
“…….”
살라스는 군터를 수행하며 따라 걷고 있었는데, 걷는 자세가 조금 이상했다. 걷는 자세가 살짝 옆으로 틀어져 있었던 것이다.
“팔 하나를 잃은 것이 부끄럽더냐?”
“아닙니다.”
“자랑스러워 해라. 전장에서 팔을 잃을 수 있는 것은 전장에 나가 싸운 이들뿐이니까. 여기 있는 자들이 사지 멀쩡하고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건 이들이 안전한 곳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 들리겠습니다.”
“상관 없다. 들을 테면 들으라 해라.”
살라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옆으로 틀었던 몸을 바로 했다. 군터가 말한 대로 팔이 잘린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는 못했지만, 부끄러움은 확실하게 지웠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기세가 달라졌다. 살라스의 본질은 팔 한 쪽 잃었다고 실의에 빠진 불구자가 아니라 수만의 적 앞에서도 당당히 검을 뽑는 군인이요 무인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니 잘려나간 팔이 역전의 용사에게 어울리는 치장처럼 보였다.
“저 자는 누구지?”
“살라스였던가? 군터 장군의 부관이라던.”
나름대로 안 들리게 조용히 말한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군터의 귀에는 그 모든 것이 들렸다. 원하기만 한다면 멀지 않은 이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으니, 그들이 하는 말 정도야 듣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나는 이런 자리가 즐겁지 않다.”
“알고 있습니다.”
“어지간하면 거절하고 싶지만, 이번처럼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비춰야 할 때도 있지.”
“…….”
“앞으로는 네가 내 대리인 노릇을 해야겠다.”
“예?”
당황한 목소리다. 괜찮은 반응이다. 걸음을 멈추거나, 표정이 변하지 않고 목소리만 살짝 높아졌으니까.
“네가 할 일이 하나 더 는 것뿐이다.”
살라스는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고 끝날 일인가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서 더 물을 수는 없었다. 떨어져서 눈치만 보던 이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이들 때문이었다.
“군터 장군.”
이런 자리에서, 아니 이런 자리에서뿐만이 아니라 군터가 사적으로 만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그와 같이 이런 정치판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비교적 순수하게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이들.
“격조했구만.”
“바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래저래 눈치가 보여서 말이지.”
빌리치 아조프. 비스칼 구르얏트.
그들은 군터를 보고 다가왔다가 살라스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팔 한 쪽이 허전한 것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이런. 어찌 된 건가?”
“어려운 싸움이었네.”
군터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굳이 회색 산에서 있었던 일을 장황하게 떠들어댈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팔을 잘린 사연이라면 말을 해도 당사자가 직접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물론, 본인이 마음이 내킨다면.
“요정들의 칼이 매섭더군요. 이전에도 인간이 아닌 것들과 싸워본 적이 있지만, 그들은 정말 달랐습니다.”
군터가 슬쩍 살라스를 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드리워있던 그늘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오. 요정이라. 그렇게 대단하던가?”
“들어본 적이 있지. 몸놀림이 잽싼데다가 이상한 술법 같은 것을 자유자재로 쓴다던데.”
군터와 친분이 있는 그들이기에 당연히 살라스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가끔은 군터와 그들이 만나는 자리에 끼기도 했다. 귀족이지만 무골인 그들이기에, 뛰어난 군인이며 무인인 살라스를 좋지 않게 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또 무엇보다, 군터가 아끼는 측근 중의 측근이기도 하고.
“사이주 공은?”
“가문의 행사 아닌가. 이래저래 뛰어다니느라 정신 없겠지.”
군터와 두 장군이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주변의 시선이 더욱 몰렸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 하나 그들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들 셋 모두 정계와는 거리를 둔 터라, 그들과 면식이 있는 이들이 드물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세 장군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면식도 없던 이가 태연하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군터 장군이시군.”
군터가 고개를 돌렸다.
“무명은 익히 들었소. 대전에서도 한 번 봤었지만, 풍채가 아주 훌륭해. 과연 소문대로시군.”
자이드라 멕시스.
타라냐드의 총독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