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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12화 (512/1,064)

512화

“옆구리와 하복부에 난 창상을 제외한 나머지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회복속도로 보아, 대략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다 나을 것 같습니다.”

“음.”

허리를 통째로 감싸다시피 한 붕대가 갑갑하여 슬쩍 몸을 움직이니 의사가 즉각 만류했다.

“그리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옆구리와 하복부의 창상은 제법 깊습니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 최대한…….”

“괜찮다. 이보다 더 심할 때도 말을 타고 이동하곤 했으니.”

“그렇지만…….”

“고생했다. 이만 물러가게.”

사실 의사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군터는 자신의 몸이 얼마나 튼튼한지 알고 있었다. 특별히 독이나 술법에 당한 것도 아니니 이 정도의 부상은 시간만 지나면 알아서 낫는다.

그럼에도 의사를 불렀던 것은, 벨리사가 그러기를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왜 의사의 말을 무시하시는 거에요.”

“내 몸은 내가 잘 아오. 이 정도 상처쯤은 며칠만 지나면 씻은 듯 나을 거요. 당신도 알지 않소?”

“당신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아요. 언제까지 젊었을 때처럼 몸이 버텨줄지 모른다고요.”

벨리사의 말은 상식적이다. 이제 군터도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다 성장하고 난 다음에는 세월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것이 당연하고, 특히 전장을 전전하는 거친 삶을 사는 그 같은 경우는 세월의 무게를 더 무겁게 맞기 마련이니.

하지만 군터는 벨리사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나이라.

언제부턴가 그것을 잊고 살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자식들을 보면서 이따금씩 세월이 흐름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스스로 쇠락해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의 육신은 점점 더 강해졌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젊었을 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이는 먹었지만, 내 몸은 늙지 않았으니.”

“…….”

벨리사가 조용해졌다. 군터는 옷을 다 입고서도 벨리사가 한 마디도 하지 않자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조금 멍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군터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몸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당신은, 그대로군요.”

“……?”

“처음에 만났던 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흉터는 늘었지만 주름은 늘지 않았죠.”

“…….”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세월마저도 당신만은 피해갔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군터는 표정 없는 벨리사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마음일지 알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가.’

벨리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옅지 않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가리지 못한 주름들, 거친 피부.

모두 ‘예전’의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것들이 바로 그녀가 말한 ‘세월’이었다.

“실비는?”

“궁중 예법을 배우고 있어요.”

군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리사는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듯했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를 모르니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가씨. 여기서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실비아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하고 있었다. 실비아에게는 사뭇 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군터가 가까이 다가가자 당황한 얼굴로 물러섰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방해할 생각은 없다. 잠깐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 가려던 것뿐.”

“아, 예…….”

기운을 갈무리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약간의 기세는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그것마저도 상당한 압박이었다.

“아버지.”

“좀 어떠냐.”

“지루해요. 이거 안 하면 안 되나요?”

가르쳐주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실비아는 뚱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며 그에게 매달렸다. 이제는 몸도 거의 여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음에도 하는 짓은 아이였다. 물론 나이는 여전히 아이에 가깝긴 하지만.

“필요한 것이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

사실 이 예법 교육은 벨리사가 강하게 밀어붙여서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시작하는 것도 많이 늦은 것이라던가. 본래 그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장군가 안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기 시작한 벨리사였다.

하여간 벨리사가 강하게 주장했고, 군터는 그녀의 뜻을 최대한 존중해주었다. 기왕에 배우는 것이라면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고, 덕분에 실비아는 매일 지금처럼 궁중 예법을 익혀야 했다.

필요하다지만, 당사자에게는 별로 즐거운 시간이 아닐 것이다. 특히 실비아처럼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살아온, 여느 남자아이 못지 않게 활동적인 여자 아이라면 말이다.

“비키랑 도시 밖으로 나가보고 싶어요.”

비키는 실비아가 어렸을 때부터 타고 논 하얀 말이었다. 체구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갈기가 멋지게 나 있는, 실비아의 가장 오래 된 친구였다. 실비아는 어렸을 적부터 종종 그 하얀 말을 타고 제 오빠를 따라 밖을 돌아다니곤 했다.

“너도 이제 마냥 어리지는 않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다는 걸 알 나이지.”

실비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마지막 탈출구로 아버지를 붙들어봤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했다.

“…….”

군터는 표정이 어두워진 실비아를 물끄러미 보았다.

많이 컸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는 작게만 보이는 이 어린 숙녀가 속상해하는 것을 보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달라.’

약간. 아주 약간이지만 돌덩이 같았던 마음이 흔들렸다. 그것은 군터에게 상당히 크게 다가왔다. 마치 메마르고 갈라진, 죽은 땅에서 작은 싹 하나가 피어 오른 것 같았다.

“…내일.”

“네?”

“오늘 수업을 잘 들으면, 내일은 허락하마.”

“아버지도 같이요?”

“그래.”

어두워졌던 실비아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리고 군터는 다시 한 번 울렁임을 느꼈다.

* * *

아마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 같다. 자신의 감정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우습지만, 군터는 그마저도 소중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 한 줄기를 발견한 것 같았으니까.

‘가족.’

그것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 인간의 마음에 가장 크게 닿을 수 있는, 아니 닿는 것이 당연한 존재일 것이다.

‘보리스. 실비아.’

본래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벨리사였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피를 이어받은 두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 속에 더 크게 자리잡은 모양이었다.

“장군.”

“음?”

모페이브가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뭔가 하고 보니 초대장이었다.

“제레이스 가문에서 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말이지.”

“이런 시기이니만큼 더 존재감을 내보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야 한다고 보나?”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말을 아끼는 모페이브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이제 흰 머리가 심심찮게 보이는, 중년의 나이를 지나고 있는 그는 누가 봐도 숙련된 집사였다. 그 누구도 모페이브에게서 사교도의 전적을 짐작 할 수는 없을 듯했다.

“연구는 어찌 되어가나?”

“순조롭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합니다만, 방향은 잡은 것 같습니다. 호닝거 공은 물론이고, 다른 분들의 지식도 상당하더군요.”

“그 쪽에서는 되려 자네를 칭찬하더군.”

“제 면을 세워주시려는 것이겠지요.”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자네에게 진심으로 감탄한 것 같았다.”

호닝거는 듣기 좋은 소리를 많이 했다. 그 모든 것이 뻔한 치사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제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한 건 아닙니다. 단지 이전에 연구하던 것과 일부 겹치는 면이 있어서 접근이 조금 수월했을 뿐이지요.”

“이전에 연구하던 것……. 그 고렘인가 하는 것 말인가.”

“예. 기를 응용한 인공적인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이번에 시작한 연구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여럿 보였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할 말이 조금 생겼던 것뿐, 제 역량은 호닝거 공은 물론이고 그분과 함께하는 분들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자신 있는 얼굴이군.”

군터의 말에 모페이브가 희미하게 웃었다.

“장군을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지요. 게다가, 살라스 공의 일이 아닙니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볼 생각입니다.”

직접 업무가 겹치거나 하는 부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함께 군터를 섬겨온 그들이었다. 모페이브와 살라스는 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교분이 있었으니, 살라스의 일에 모페이브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이번 연구는 모페이브에게도 꽤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번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다면, 그가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쪽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야스메티를 불러주게.”

“예.”

얼마 지나지 않아 야스메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군터는 그에게 제레이스 가문의 초대장을 보여주었다.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예. 장군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지요?”

군터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연회는 평범한 연회가 아니다. 제레이스 가문 단독으로 벌이는 일도 아니었다.

“전하께서 외가에 힘을 실어주려는 겁니다.”

황자가 참석한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당연히 참석한다. 거기에 요 근래 정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자이드라 멕시스까지 참석한다. 야스메티의 말처럼, 황자가 외가인 제레이스 가문에 대놓고 힘을 실어주려는 것이다.

“어울려줘야겠지.”

“내키지 않으신다면 적당히 얼굴만 비추시고 나오셔도 됩니다. 허나.”

“그러지 않는 게 좋다는 거겠지?”

“적잖은 이들이 몰려들 겁니다. 흔치 않은 기회이지요. 더구나 지금은 시기도 좋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있었던 장군의 활약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비록 근자에 안 좋은 소문이 조금 돌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장군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을 겁니다.”

야스메티가 눈을 빛냈다.

“그러니 기회이지요. 이번 기회에 장군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십시오.”

“그건 좀 끌리는군.”

“더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제레이스에 전해라. 참석하겠노라고.”

“예.”

궁에서 열어도 되는 연회를 제레이스에게 양보했다. 황자의 그런 배려에 제레이스 가문은 최대한 부응하려 했다. 그들 가문의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화려하게 준비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수레가 제레이스 저택을 드나들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미리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간에서는 이번 연회가 전에 없던 규모가 될 것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돌았다.

“그럴 만도 하지요. 어찌 보면 본격적인 승전연도 겸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야스메티의 말에 군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온데 장군. 이번 연회는 누구와 함께 가실 생각이신지.”

“살라스와 가겠다.”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들었다는 듯, 야스메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당연히 군터가 베리사를 대동할 줄 알았던 것이다.

“오래 있지 않을 것이다. 얼굴만 비추고 나올 것인데 굳이 벨리사를 데려갈 이유가 없지.”

당황하는 야스메티에게, 군터는 못 박듯 다시 한 번 말했다.

“살라스와 함께 갈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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