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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10화 (510/1,064)

510화

자이드라 멕시스가 오고 있다는 소식은 곧 테리브란 전역에 퍼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렸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빨라서, 대전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오고 닷새가 지나지 않아 일반 시민들마저도 다 한 번 정도는 그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시민들만이 아니었다. 귀족들도 타라냐드의 총독에 대해 입 아프게 떠들어 대는 듯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이 일은 그들과도 크건 작건 연관이 되어 있을 터.

하지만 군터는 달랐다. 그는 자이드라 멕시스가 테리브란에 오건 말건 상관 없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라는 개인에게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기심 정도고, 그가 미칠 정치적 파급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어려울 것 같습니다.”

모페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군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불가능하다고 얘기하지는 않는군.”

“예?”

“먼저 찾았던 자들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단언을 했었지.”

“세상에는 제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성급하게 불가능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게 자네가 그 놈들보다 나은 이유겠지.”

“장군.”

“살라스는 일찍부터 나를 따랐던 녀석이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했지. 나 또한 녀석에게 그리 할 것이다.”

“부족하겠지만,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부탁하지.”

그리 말했지만 사실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뿐.

‘모든 것을 하겠다?’

모페이브가 물러가고, 군터는 그에게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살라스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온 건 사실이다. 당연히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리 생각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 그럴 마음인가? 라고 묻는다면.

‘가증스럽군.’

니클라스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살라스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뭐든 하겠다느니 어쩌니 할 수 있는 걸까.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머리에서 떠올리는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이…돌이라도 되어버린 것 같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그 모든 것에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니 군터는 자신의 모든 ‘감정’이 진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 이런 건가.’

황자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먹히지 말라고 했었지.’

그때도 알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황자가 어째서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협박까지 해가면서 자신을 압박했는지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

이상한 느낌이었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논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더부룩하던 속이 거짓말처럼 편안해졌다. 비유하자면 목에 닿은 것이 시퍼렇게 예기가 선 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둔탁한 목검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머리가 맑다. 이렇게까지 맑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 * *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테리브란의 성문이 일제히 열렸다. 굳은 표정의 병사들이 성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가 성문의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섰다.

“허허.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타라냐드의 총독 아니오.”

“그렇다 해도 너무 과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활짝 열린 성문으로 말을 탄 이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들 모두가 귀족이었고 관리였다. 내궁의 대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 비하면 급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유력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

그런 이들이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까지 나왔다. 불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황자가 직접 내린 지시인 만큼 이해를 못한다고 해도 항명을 할 수는 없었겠지만.

뿌우우―!

“끄응.”

몇몇 이들이 불편한 소리를 냈다. 손님맞이로 동원된 것이 불쾌해서가 아니라, 말 위에 앉아있는 게 익숙하지 않아 엉덩이가 아려온 탓이었다.

뿌우우우우―!

“직접 본 적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이야기만 많이 들었지요.”

“저 역시.”

자이드라 멕시스가 총독의 지위를 역임한지도 30년이 가깝다. 젊은 나이에 부친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되었고, 그 후로 약 30년 동안 타라냐드를 다스려왔다. 총독의 지위에 있는 이가 임지 밖으로 나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자이드라 멕시스는 특히 더 그랬다. 어쩔 수 없이 황도에 내려가야 할 때를 제외하면 그는 단 한 번도 타라냐드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인접한 주의 귀족들이라 해도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딱 한 번 본 적이 있소. 아주 오래 전이긴 하지만.”

“오?”

“언제 말입니까?”

나이 지긋한 귀족에게 시선이 몰렸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 듯 아련한 눈을 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보자…그래. 37년 전. 승천연(昇天宴)에서였지. 그때 그를 본 적이 있소. 북부 귀족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그를 보았었지.”

제국의 큰 행사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승천연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였다. 황제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데다, 제국의 국교인 여명 교단에서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제국 전역의 유력한 귀족과 관리들이 모여든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 풋풋한 청년이었던 자이드라 멕시스를 만났었다.

‘그래. 그랬지. 그때부터 뭔가 특별한 자라는 걸 느꼈었다.’

뿌우우우우―!

그로부터 37년이 지났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

둥! 둥!

깃발이 보인다. 멕시스 가문의 깃발이다. 수백 정도 되어 보이는 이들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 선두에서 말을 타고 오는 자. 평범한 체구의 중년인이지만, 어쩐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아…거기 계신 분들은 혹시 이 사람을 마중 나오신 겁니까? 이거이거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소이다.”

말에서 내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이드라 멕시스와 그를 마중 나온 귀족들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여유롭군.’

사람은 누구나 대접받는 것을 좋아한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심지어 노예라 할지라도 대접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는 없다. 다만.

모든 것은 정도라는 게 있는 법.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정도를 벗어난다면 순수하게 좋아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수백, 아니 수천 병을 앞에 밀어놓고 마시라 한다면 군침을 삼키기보다는 한숨부터 쉬지 않겠는가?

타라냐드의 총독. 소중한 동맹.

당연히 대접해야 하는 상대다. 하지만 이렇게 성문을 활짝 열고 병사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우르르 몰려나와야 할 정도냐고 묻는다면…그렇지는 않다. 이 도시에 있는 주인이, 타라냐드의 총독을 맞이하는 이가 황자이기에 그렇다.

명백하게 과하다. 그것을 당사자도 잘 알고 있을 터.

“테리브란에는 정말로 오랜만에 와보는군요.”

그러나 자이드라 멕시스의 모습에서 어색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귀족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서는 다시 말에 타고 성문을 지났다. 마중 나온 귀족들을 자연스레 뒤에 거느리면서 말이다.

‘제 집 안방이라도 온 것처럼 자연스럽군.’

능청스러운 연기는 정계에 발을 딛고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는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재주지만 자이드라 멕시스가 보이는 것은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정말로 아무런 걱정 없이, 자신이 오늘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굴고 있지 않나.

‘두 황자 사이에 끼어서도 할 말을 하려면 이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하는 건가.’

타고난 것인가 습득한 것인가. 한쪽에다 걸라면 그는 전자에 걸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그릇이 있는 법이오.’

풋풋하던 청년이 노인네처럼 끌끌 웃으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다지 특별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 한 마디가 왜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흐트러진 듯하면서도 날이 선 것 같은 모습 때문이었는지.

‘그때는 마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흐릿하게 등밖에 보이지 않는군.’

그릇. 그릇이라.

뒤로 넘긴 머리가 바람에 밀려 눈 앞을 가렸다. 다시 넘기려 손을 대니, 흰 머리카락의 푸석푸석한 감촉이 느껴졌다.

* * *

“이제야 보게 되는군.”

황자의 또렷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싱긋 웃으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조금 더 일찍 찾아 뵙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길.”

“용서. 용서라. 그래. 용서 해야지. 기대했던 것보다 늦기는 했어도, 결국 이렇게 내 앞에 와 주었으니까 말이야.”

“그리 말씀해주시니 더더욱 송구스럽군요.”

조금 더 몰아치지 않을까 했지만, 그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황자는 가볍게 손짓했고, 자이드라 멕시스는 태연히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지만 비굴함은 없으며, 황자를 바라보는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하다.

‘강하군.’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단련을 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평범한 무인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강한 것은 그라는 사람 자체다.

사실 저런 부류의 인간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저런 이들을 몇 보았고,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다.

저 자. 자이드라 멕시스도 마찬가지다. 물론 저 자는 이제껏 봐 왔던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물이기는 하지만.

“하하하핫!”

자이드라 멕시스는 뭐가 그리 웃긴지 호탕하게 웃어댔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흘러가는 이야기들은 듣고 있었던 만큼 군터는 황자가 한 이야기 중 그리 재미있는 부분은 없었다는 걸 알았다.

“하하핫! 그렇습니까?”

뭐가 그리 즐거울까. 황자를 비롯한 그 휘하의 권력자들이 자신을 위해 모여있는 것이 기껍기라도 한 걸까.

“배짱 한 번 두둑하군.”

누군가 속삭이듯 뱉은 독백에, 군터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좀 쉬게. 곧 다시 자리를 만들 테니, 못 다한 이야기는 그때 마저 하는 걸로 하지.”

대전에서의 자리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먼 길을 달려온 타라냐드의 총독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했고, 짧게나마 오간 이야기들을 토대로 7황자 진영 내부에서 나눌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리가 파한 후. 군터는 그를 붙드는 몇몇 이들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소식에 가려서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호닝거와 술사들이 돌아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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