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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08화 (508/1,064)

508화

“쉽지 않은 청이었을 터인데 흔쾌히 들어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대부인, 우슈무르는 앨리자 우슈무르는 정숙한 여인이었다. 귀족 가문의 안주인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여인의 모습. 그러나 그녀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안주인의 자리이지, 주인의 자리가 아닌 듯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버거움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군터는 어깨가 처진 중년 여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어떻게든 꺾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어지간한 강골들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음에도 그랬다.

그것을 스스로도 아는지라, 군터는 그녀를 배려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풍기는 기세를 최대한 갈무리했다. 그것은 마치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는 것과 같았다. 어렵지는 않지만, 꽤나 귀찮은 행위였다.

군터가 그렇게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내하니, 그제야 앨리자 우슈무르의 얼굴이 조금 편안하게 풀렸다.

“먼저, 일전에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군터는 그녀가 꺼낸 첫 마디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정중한 사과는 그녀와 대면하기 전부터 마음 속에 있던 작은 불쾌함을 사그라지게 했다.

“부인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앨리자 우슈무르가 장군가의 부인이었던 것은 과거다. 물론 우슈무르 가문은 지금도 ‘장군가’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게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안다. 그럼에도 군터는 그녀에게 존대를 했다. 귀족가의 안주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작고한 세레온 우슈무르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다.

그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기에, 군터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더 없이 정중했다.

“장군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가문은 자밀 그 아이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전의 청에 대한 이 사람의 대답은 수하에게 말한 그대로입니다.”

“예. 그에 대해 다시 무리한 부탁을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리를 청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닙니다.”

“허면?”

“일전의 무리한 청에 대해, 저희 가문의 무례에 대해 사죄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양 가문의 사이에 앞으로도 어색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럴 것입니다.”

군터가 확답하자 그녀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었다.

* * *

“상당히 저자세더군.”

우슈무르 가문과 군터의 사이는, 표면적으로는 대등하지만 실제로는 군터 쪽에 조금 더 기운 관계였다. 우슈무르 가문은 과거이고 군터는 현재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정계에 소문이 퍼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소문?”

“장군께서 전장에서 하신 일에 대한 소문 말이지요.”

“음.”

“더해서, 전하께서 장군을 보호하셨다는 소문까지 덩달아 돌기 시작했을 겁니다.”

황자가 금기를 범한 이를 감쌌다. 그것은 꽤나 큰 의미다. 군터가 황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그 총애의 크기가 어렴풋이나마 드러난 것이니까 말이다.

“장군께서는 공을 빼앗기셨지만, 대신 그에 못지 않은 것을 얻으셨습니다.”

야스메티가 공손하게 군터의 잔을 채웠다.

“장군께서는 공을 빼앗긴 일에 대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전하의 총애가 장군에게 있으니, 공을 세울 기회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술보다도 네 말이 더 달콤하군. 하지만 난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은 쓰다. 술이 달다고 하는 자는 필시 술에 미친 술꾼이거나, 삶이 술보다도 더 쓴 이일 것이다. 군터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았다.

군터가 한 마디를 하자 야스메티는 목소리를 바꿨다. 그리고 달콤함에 딸려오는 씁쓸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장군을 향한 견제가 더욱 심해질 겁니다. 권신들은 또 다른 권신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거느리시는 것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은 더욱 불가능해지지요.”

“…….”

“그렇기에 장군께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우군이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장군의 옆에 서줄 힘 있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적이 장군을 건드리기 힘들어질 것입니다.”

재미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는 딱히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내가 만나봐야 할 자들이 있나?”

“몇 있습니다. 추리고 추린 이들이지요. 실은 장군께서 테리브란에 오신 직후부터 줄기차게 사람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시간을 내보지.”

“옛.”

야스메티와 이야기를 나눈 후. 군터는 니클라스와도 자리를 가졌다. 니클라스는 테리브란에서 벨리사를 비롯한 군터의 가족들에 대한 경호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은밀히 맡은 일이 있었으니, 야스메티를 비롯한 몇몇 이들에 대한 감시였다. 이는 이전에 살라스를 비롯한 몇몇 수하들이 권유한 것이었는데, 군터는 그 권유가 옳다 여겨 허락했다. 직접 보고 겪은 바가 있었기에 배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상인들로부터 얼마간의 재물을 챙겼습니다.”

군터가 피식 웃었다.

“그 외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이상 행동은 없었습니다. 아, 근래에 창녀들 몇을 집에 들인…….”

“됐다. 그런 잡스러운 것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다.”

“예.”

야스메티의 신상에 대한 것이야 이미 하도 들어서 줄줄이 꿸 정도였다. 그가 유난히 호색 하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못난 외관 때문에 여인들에게 사랑 받지 못했던 과거 때문인지, 군터의 밑에서 인생이 바뀐 뒤부터 그는 날마다 여인을 탐하고 있었다. 거의 집착 수준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능력이 있고, 할 일만 제대로 한다면 여자를 밝히든 술을 밝히든 상관 없지 않나.

“헌데, 장군.”

“음?”

“어찌하여 살라스 공을 찾지 않으십니까?”

“…….”

머리 속에 벼락이 친 듯했다.

살라스는 일전에 회색 산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 됐었다. 그리고 솜씨 좋은 의원과 사제가 있는 테리브란으로 와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알고 있었다.’

헌데,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인상이 절로 일그러졌다. 마음이 흔들리니 갈무리 한 기운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니클라스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 칠 정도였다.

‘어째서?’

누구에게든 따져 묻고 싶었다. 허나 누구에게 묻는단 말인가.

‘내가…….’

문득 진한 회의가 들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회의인가. 그마저도 알 수 없었다.

속이 답답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니클라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의원들은 뭐라 하더냐.”

“잘린 팔을 제외한 다른 상처들은 호전이 되었다 합니다. 다만 완전히 기력을 찾으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 하더군요.”

“그런가.”

팔. 팔이라.

살라스의 상실감이 얼마나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무인에게, 군인에게 한쪽 팔을 잃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일이다. 어쩌면 살라스는 다시는 전장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방도가 없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살라스의 팔 말이다. 어떻게 고칠 방도가 없겠느냔 말이다.”

“…잘린 팔을 다시 붙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래. 나 역시 들은 바가 없다.’

심지어 잘린 팔을 붙이는 것도 아니다. 잘려나간 팔이 있어야 붙이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살라스의 떨어져나간 팔은 그때 회색 산에서 불타고 지금쯤 뼈 정도만 남아 땅 속에 묻혀있을 터였다.

‘으음.’

군터는 살라스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크게 자책했다. 동시에 살라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당장 살라스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의사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의술로는 무리다. 허나 술사라면 어떨까. 보통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술사들이라면, 술법이라면 뭔가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모페이브는…아직 위글로우에 있겠군.’

어차피 다시 테리브란으로 돌아와야 하니 사람은 보냈지만, 그에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모페이브가 돌아올 즈음이면 늦어도 너무 늦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군.’

군터는 니클라스에게 술사들을 수소문하라 명하고 살라스가 머물고 있다는 의방으로 향했다.

* * *

“장군. 어찌 이런 곳까지…….”

“늦어서 미안하다.”

“어인 말씀을.”

군터는 초췌한 살라스의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붕대를 감은 팔뚝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살라스를 상심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좀 어떠냐.”

“나아지고 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보름 정도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될 거라 합니다.”

“다행이군.”

그 뒤로 대화가 끊겼다. 살라스는 말을 아꼈고, 군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분위기. 군터가 먼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상심이 크겠지.”

“…여기서 아니라고 말씀 드리면 거짓을 고하는 것이겠지요.”

살라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너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는구나. 네가 처음 내 밑으로 들어왔을 때도 떠오르고.”

그때의 살라스는 앳된 얼굴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때의 지금 살라스에게서 그때 그 청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잘려나간 팔이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흉터가 적지 않은 데다, 전장의 풍파를 적잖이 겪은 얼굴은 동 나이대의 사내들보다 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책임감을 느낀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런 말씀은 소관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리 느꼈다면 사과하마.”

“애당초 그리 마음 쓰실 일이 아닙니다. 군인이 싸우다 몸이 상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겠습니까. 팔을 잃었지만 죽지는 않았으니,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 말이 진심이기를 바라지만 그럴 리는 없다. 지금 한 말이 진심이라면 살라스의 눈이 지금처럼 가늘게 떨릴 리는 없었을 테니.

“꼭 전장에서 칼을 휘둘러야만 군인이 아니다.”

“…….”

“어차피 평생 일선에서 직접 몸을 쓰며 싸울 수는 없다. 너도 알겠지만, 진정 크게 싸우는 자는 칼이 아니라 머리를 쓴다. 네게 그 시기가 조금 더 일찍 찾아왔다고 생각해라.”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게 군터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에게 따뜻한 말로 사람을 위로하는 재주는 없었으니까.

“몸이 좀 나아지면 그때부터 다시 일을 해야 할 거다. 준비하고 있거라.”

“예.”

팔에 대해서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희망을 주었다 뺏는 것만큼 잔혹한 짓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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