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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07화 (507/1,064)

507화

군터가 테리브란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가 성문을 지나기 무섭게 근위병들이 그를 내궁으로 이끌었다.

“전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

7황자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시간이 늦어서만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보이는군. 알고 보는 것이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

“숨길 생각이었나?”

“알려져서 좋을 것 없다 생각했습니다.”

“솔직해서 좋군.”

황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계속 숨길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다는 뜻이겠고.”

“예.”

“군인으로서 승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을 뿐…이라고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순진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지. 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군.”

“금기라는 것이 그리도 큰 것입니까? 소장이 그리 하지 않았다면 주앙 칼 고르를 놓쳤을 겁니다.”

“크냐고? 글쎄. 모르겠군. 허나 민감한 사안인 것은 사실이다. 일찍이 사령술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거든.”

황명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그때 제국 내에 있던 사령술사들은 씨가 마르다시피 했고, 제국 내에서 사령술에 관련한 모든 것이 금기로 지정되었다.

“사령술사들이 사람을 잡아다가 끔찍하고 사악한 실험을 자행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핑계다. 애초에 술사들에 의한 비인도적인 불법적인 실험은 심심찮게 일어나니까 사령술사들에게만 죄를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허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사령술사들이 탄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진짜 ‘금기’에 다가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진짜 금기?”

“불멸.”

모든 인간의 비원.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소망.

하지만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누구나 꿈꾸는 것은 맞지만, 누구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실제로 이뤄낸 이가 있지 않은가.

“정확하게는 불사지. 죽음을 피하는 것. 사령술의 뿌리가 본래 그것이 아니더냐. 어찌 보면 그들은 본래 그들의 목표에 충실했을 뿐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려버렸다는 거지.”

앞서 이야기했듯, 실제로 불사를 이뤄낸 이가 있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수명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백 년 간 늙지 않고 살아온 이가 있지 않은가.

“황제.”

“뒤에 ‘폐하’라는 말을 빼먹었군. 다른 이들 앞에서 그런 실수를 했다가는 또 다른 낭패를 보게 될 거다.”

“…송구합니다.”

“뭐, 아무튼 그래. 비단 사령술사들만이 아니라 불사를 탐구하는 이들은 오랜 세월 숱한 좌절만을 맛봐야 했지. 하지만 그들이 숱한 세월 동안 해내지 못한 걸 해낸 이가 있었으니, 그들이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황제를 알고자 했다. 인간을 넘어선 그의 비밀을 캐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탐구는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철저하게 몰락했지. 전해 들은 이야기일 뿐이지만, 정말 참혹했다고 하더군. 거의 수 년 간 사령술사들의 비명이 지하감옥에 매일 같이 울려 퍼졌다고 하니까.”

“그 비밀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글쎄. 선황이 원신의 사도니 뭐니 하는, 살아있는 신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근간일 테니 대단하다면 대단한 것이겠지. 나는 잘 모르지만.”

과연 정말 모르는 것일까.

그러나 안다고 해도, 황자는 말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네게 따로 벌이 내려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대신, 이번 전쟁에서 네가 세운 공은 없는 셈이 되었다.”

“…….”

“억울한 모양이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 벌써 백 년도 더 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시시콜콜한 과거에 얽매인 이들이 이 나라에는 차고 넘치거든.”

“…소장이 사령술을 쓰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그 자들이 거래에 응한 것은, 부담을 지는 데 동의하겠다는 뜻이다.”

“부담이라 하심은.”

“어차피 떨거지들은 다 떨어져 나갔다. 이제 남은 내 형제들은 모두 야심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놈들이야. 모두 서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 이기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쓸 수 있는 수는 다 쓰려고 할 거다. 듣자 하니 저 아래의 멍청한 놈은 아주 제대로 미친 짓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쪽에서 시체 군대를 조직한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는 놈이 없을 거다.”

군터는 빠르게 이어지는 황자의 이야기를 반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다. 자신이 범한 ‘금기’는 이제부터는 금기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것.

“마음껏 사령술사 행세를 하고 다녀도 좋다. 대신 네 명망에 얼룩이 지는 것은 스스로 감내해라. 병사들이 네 녀석을 ‘시체 장군’이나 다른 이상한 이름으로 불러도 그런 줄 알라는 뜻이다.”

“그러지요.”

“농담하는 것이 아니다.”

군터는 ‘시체 장군’ 운운하는 황자의 표정이 꽤나 진지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 * *

황자와 독대한 직후. 바크렌(베이고르)에 남아 있던 파헨델의 군대에게 철군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새로이 편성된 군대가 테리브란에서 출발했다.

이 모든 소식을 뒤로 하고, 군터는 그의 자택으로 가 가족들과 해후를 나눴다. 미리 소식을 듣지 못한 벨리사와 실비아는 뜬금 없이 나타난 군터를 보고 놀랐으나, 곧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장군.”

가족들과 만난 후. 군터는 야스메티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군터는 그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렇습니까. 이거 참.”

야스메티는 한숨을 쉬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었든 다행이군요. 장군께서 세우신 전공이 날아가버린 것은 아쉽지만 말입니다.”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은가?”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테리브란에서 새로이 군대가 출병한 것과 무관하지 않겠지요. 장군의 공을 축소하고, 새로이 떠난 이들의 공을 부풀려 포상하는 식으로 진행 될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추측이다. 군터가 전장에서 세운 공은 그와 함께 전쟁을 치른 이들이 다 알고 있다. 그러니 군터의 공을 아예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없애는 대신 최대한 축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 가장 먼저 그의 군대를 철군시킨 것일 테고.

“베이고…아니, 바크렌의 안정화 작업은 하루 이틀 안에 될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타라냐드와의 일도 마무리 지어야 하고, 무엇보다 서쪽의 대적(大敵)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 내부의 잡음을 크게 키우는 것은 어느 쪽이건 피하고 싶겠지요.”

이대로 잠잠하게 일이 마무리 될 거라는 소리다. 황자의 말처럼 흉흉한 소문 정도는 남을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일 것이다.

“장군께서 나가 계신 동안 우슈무르 가문과 이런저런 교류를 확대했습니다.”

당면한 일에 대해 논하고 난 후에는 그간의 일들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우슈무르 가문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귀족들, 고위 관리들과의 연줄을 군터 쪽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직접 만나는 자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랫사람들을 통한 왕래는 적잖이 생겼으니 그들이 곧 군터 가문이 새로이 얻은 무형의 자산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우슈무르 가문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는 만큼 그들과의 연줄은 반쪽 짜리에 불과합니다.”

야스메티가 말 끝을 흐렸다. 슬쩍슬쩍 눈치도 보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지금 한 말과 관련이 있으리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눈치 보지 말고 해라.”

“자밀 우슈무르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슈무르 가문에서는 가문의 당주가 십부장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입니다.”

우슈무르 가문의 대소사는 대부인이라 불리는, 자밀 우슈무르의 모친이 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리일 뿐, 엄밀히 말해 우슈무르 가문의 당주는 자밀 우슈무르였다.

“녀석의 앞으로 공을 돌려달라는 건가?”

“그쪽에서는 최소한 천부장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만.”

“안 될 말이다.”

자밀 우슈무르의 지위는 십부장이다. 비록 전투를 몇 차례 치렀다고는 하지만 눈에 띄는 공을 세운 적도 없으니 이런저런 사유로 공을 몰아준다고 해도 백부장 정도가 한계다. 그것만 해도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 있는데, 천부장?

“마음은 알겠지만, 욕심이 크군.”

“조급한 것이겠지요. 대부인은 자신의 자리에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아들이 가문을 이끌어주기를 원하고 있지요.”

하지만 우슈무르 가문을 이끌기에 자밀 우슈무르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일천하며, 무엇보다 지위가 낮다. 세레온 우슈무르가 사망하면서 더 이상 장군가라고 불릴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명망 있는 귀족가문이었다. 일개 십부장 애송이가 책임질 수 있는 크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백부장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 허나 천부장은 무리다. 다른 놈들 이전에 나부터가 용납이 안 되는군.”

“으음. 알겠습니다. 최대한 사정을 설명하도록 하지요.”

“사정을 설명한다는 것도 우습군. 내가 그들에게 빚을 진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물론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만.”

“매달릴 필요 없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면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뿐이니.”

“명심하겠습니다.”

군터는 야스메티가 자신을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았다. 인맥의 중요성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만약 자밀 우슈무르가 이번 전쟁에서 주앙 칼 고르의 목이라도 베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우슈무르 가문의 청은 군터의 성격상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자밀 우슈무르라.’

아들 보리스와 친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수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꽤나 평판도 좋은 모양이고.

‘급한 모양이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찌 보면 그들 스스로 초래한 결과다. 정확히는 세레온 우슈무르의 고지식함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좀 더 일찍 아들을 챙겼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생기지 않았으리라. 물론 이런 가정 따위는 무의미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슈무르 가문에 관련한 이야기는 그렇게 끝냈다. 아니,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틀 뒤. 우슈무르 가문에서 만나기를 요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벨리사에게 이야기하게.”

대부인이 직접 요청한 것이라 하니, 벨리사가 만나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야스메티는 군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대부인은 장군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나를 말인가?”

“예.”

그 동안 우슈무르 가문과의 일은 대개 아랫사람들의 선에서 이루어졌다. 서로 최대한 격식을 차리는 경우에는 대부인과 벨리사가 만났다. 결코 군터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다. 당주의 일을 대리하고 있다지만, 군터가 직접 타 가문의 미망인을 만나는 것은 영 모양새가 좋지 않은 탓이었다. 군터 뿐만 아니라 우슈무르 가문에서도 그것을 의식하는 모습을 몇 번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직접 만남을 청해왔다. 그것도 대부인이 직접.

“무슨 의도지?”

“확답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답을 주지 않았나.”

“그러셨지요. 그들도 장군의 성정을 어느 정도는 알 테니, 확약이라도 받고자 할 것입니다.”

“…….”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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