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3군의 병사들이 기세 좋게 들이닥쳤다. 왕을 잃은 베이고르의 병사들은 속절없이 밀리고 또 밀렸다. 더 이상 그들에게 싸우라고 외치는 이는 없었다. 지휘를 해야 할 장교들조차 왕의 전사 소식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 더할 나위 없는 대승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지휘관들이 군터의 막사로 모여들었다.
“헌데…희한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두가 승전의 여운을 만끽하고 있는 가운데, 델라모리가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렸다.
“장군께서 사령술을 사용하셨다고…….”
한껏 달아 올랐던 막사 안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그들 모두 얼핏 듣기는 하였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던 말을 델라모리는 대놓고 했다.
“사실이다.”
“허어. 장군.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송구하오나, 아국에서 사령술은 금기…….”
“알고 있다.”
금기를 범한다는 것.
그것은 위장이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은밀했다면 모를까, 직접 본 눈만 해도 수백이 훌쩍 넘지 않나. 그들을 모두 입막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전하를 뵙고 말씀 드릴 것이다.”
군터와 델라모리의 시선이 마주치자 델라모리가 고개를 숙였다.
“장군을 추궁하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장군께서 그 힘을 사용하시지 않았다면 전투가 어찌 흘러갔을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델라모리의 지닌 재주는 군재뿐만이 아닌 듯했다. 치고 빠지는 화술이 꽤나 간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울타마란 소레딜이 자이드라 멕시스를 일컬어 여우라 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수하인 델라모리 역시 주인과 비슷한 기질이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장군. 추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잔당도 잔당이지만, 무엇보다 주앙 칼 고르의 자식들을 모두 처단해야 합니다. 놈들 중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두고두고 후환으로 남을 것입니다.”
옳은 말이었다. 특히 왕가의 혈족들을 모두 처단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일찍이 제국이 그것을 못해서 주앙 칼 고르 같은 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추격대를 편성하고, 사로잡은 귀족들을 심문해서 왕족들의 행방을 알아내라.”
“옛.”
군터는 그렇게 회의를 끝낸 후. 그의 직속 수하들을 불러모았다. 델라모리를 비롯한 지휘관들 앞에서는 7황자에게 직접 소명하겠다는 짧은 한 마디로 끝을 냈지만, 그의 수하들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놀랐을 거라 생각한다.”
“솔직히…예. 조금은 놀랐습니다.”
수하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덤덤했다.
“조금?”
“장군을 따르면서 온갖 것들을 다 보고 겪었습니다. 시체들이 일어나는 것 정도는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지요. 다만, 설마 장군께서 술사의 재주를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할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까요. 하여간 놀랐습니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재주를 터득하신 겁니까?”
“꽤 되었다. 베이고르에 몸담고 있을 적에 내가 사령술의 소질이 있음을 알았지.”
“왜 숨기신 겁니까? 제국에서야 금기라지만, 베이고르에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소질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때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사용할 수 있는 술법도 없다시피 했으니, 어디서 말할 주제도 못 됐지.”
“으음.”
“너희가 서운함을 느꼈다고 해도 이해한다.”
“서운하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델라모리 그 자가 말했듯이…….”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게 우려를 일축하려는데, 그때까지 입을 닫고 있던 모레인이 입을 열었다.
“장군.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일이 아닙니다.”
군터가 모레인을 바라봤다.
“무슨 뜻이냐.”
“아무리 장군께서 전하의 총애를 받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쉽게 넘어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전하께서 묻고 넘어가려고 해도 장군을 곱게 보지 않는 이들이 용납하지 않겠지요. 금기는 달리 금기가 아닙니다. 공으로 과를 덮는다는 식의 논리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장군께서 뭘 어찌 하셔야 한다는 것이야?”
할렌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모레인은 입술만 달싹일 뿐, 시원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로서도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문제는…전하께서 장군을 얼마나 생각하시느냐에 달렸다.’
거창하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사실 금기라는 것은 명목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명목은 힘 있는 자들이 쥐는 순간 명분이 되니, 무서운 건 바로 그것이다.
군터를 좋지 않게 보은 이들이 있다. 어쩌면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이 이 명분을 쥐고 무엇을 하려 들지는 뻔하다. 명분은 저들이 쥐었으니 군터는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7황자 뿐. 허나 그가 군터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담을 져야 한다.
“소관의 생각에…모든 것은 전하께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니저러니 할 이유가 없군.”
군터가 잔을 들었다.
“들지. 비록 조촐하다는 말조차 아까울 정도이나, 승전 후에 승전연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은가.”
모두가 어색하게 잔을 들었다. 다들 심각해진 가운데 오직 군터만이 태연했다. 지금까지 심각하게 나눈 이야기가 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 *
군터는 베이고르 왕족들과 패주한 잔당에 대한 추격을 수하들에게 맡기고 베나시드(살마드)로 향해 울타마란 소레딜과 재회했다.
“멋지게 해냈더군.”
노장은 군터를 보자마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먼저 꺼낸 것은 치사의 말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시체를 일으켰다지? 골치 아픈 일을 저질렀군. 어쩔 수 없어서 한 일이겠지만 말이야.”
“감당해야 한다면 감당해야지요.”
“글쎄.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걸세. 또한, 감당하는 것은 자네가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전하께서는 자네를 총애하시지. 결국 나서실 게야. 하지만 그리 되면 그분께서는 많은 것을 포기하셔야 할 테고…….”
“…….”
“조만간 사자가 오겠지. 승전을 거두고도, 주앙 칼 고르의 수급을 취하고도 죄인처럼 홀로 테리브란의 성문을 지나게 될지도 몰라. 허나 너무 상심하지는 말게. 시간이 흐르고, 자네가 그 전포에 조금 더 익숙해질 즈음이면 다 이해하게 될 걸세.”
얼마 후. 과연 그의 말처럼 테리브란에서 사자가 왔다. 울타마란 소레딜의 말처럼 사자가 가져온 명령서에는 군터를 소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군대를 놓고 오는 것은 물론, 호위 병력도 달랑 스물까지만 허용한다는 것을 보면 숫제 죄인의 소환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장군.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랍니까! 이번 전쟁에서 장군만큼 공을 세운 이가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죄인 취급이라니요!”
분노하는 이도 있었고,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할렌은 전자, 보리스는 후자였다.
“호들갑 떨지 마라.”
군터는 분노하고 불안해하는 그들을 진정시켰다.
“할렌. 네게 이곳의 일을 맡기겠다.”
“알겠습니다. 장군. 허면 호위는.”
“혼자 가겠다.”
“옛?”
“스물을 데려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
“하오나 장군.”
군터는 만류하는 말들을 뿌리쳤다. 보리스가 마지막까지 자신만이라도 따라가겠다 했지만 군터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자가 당도한 그날. 군터는 사자를 호위해온 병사들과 함께 테리브란으로 향했다.
“장군. 조금만 쉬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안색이 누렇게 변한 장교가 앓는 소리를 했다.
그뿐 아니라 병사들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테리브란에서부터 베나시드까지 사신을 호위해 온 직후에 쉬지도 못하고 다시 테리브란까지 움직이게 되었다. 거기에 군터가 말을 모는 속도가 좀 빠른 게 아니라, 그들은 이동하는 내내 군터의 뒤꽁무니만 쫓아야 했다. 이러니 그들의 체력이 남아날래야 남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잠시 쉬어가도록 하지.”
군터의 허락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허겁지겁 야영할 장소를 물색하고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군터는 호위 장교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눴다.
“테리브란의 분위기는 어떤가.”
“축제 분위기입니다. 승전 소식이 전해졌으니까 말입니다. 장군의 이름도 많은 이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 나름대로는 추켜세우려고 한 말이겠지만, 군터는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 군터는 장교의 말 속에서 알아낸 한 가지 사실에 집중했다.
‘아직 모르고 있다.’
장교의 표정은 밝았다. 그리고 그는 왜 자신이 이런 호송 임무를 맡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를 통해 군터는 자신이 사령술을 썼다는 사실이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부족했던 건가, 아니면 통제하고 있는 건가.’
전자라면 모르겠으나,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아마도 7황자가 손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금기라.’
솔직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때 만약 사령술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주앙 칼 고르를 잡는 것은 고사하고, 목숨이나 부지했을까 싶었으니.
‘허나 그건 내 사정일 뿐. 저들의 사정은 또 다르겠지.’
일이 어찌 흘러갈지, 두고 보면 알 일이다.
* * *
“금기라고는 하지만, 쉰내 나는 관습일 뿐이지.”
“허나 승하하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징치하셨었지요.”
“내가 그것을 모를 거라 생각하나?”
“어찌 소신이 그리 생각했겠습니까. 소신은 다만 세간에 알려진 바를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긁을 만큼 긁어대면서도 절대 선은 넘지 않는다. 자신의 지위와 상황을 철저하게 고려하는 것이다.
“이번 전쟁의 1등 공신이 누구라 생각하나.”
“그야 물론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이겠지요.”
“그 다음은?”
“군터 장군일 것입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인재가 필요해.”
“전하의 말씀에 백 번 천 번 공감하옵니다.”
“그렇다면 크게 봐야 하지 않겠나?”
“하오나 전하, 크게 봄과 동시에 면밀히 살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언제나 큰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무너지는 법이니 말입니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자신이 정한 ‘선’을 밟고서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다.
‘제대로 물었다는 건가.’
항상 생각하지만, 정말이지 승냥이 같은 작자다. 단순한 승냥이라면 목을 비틀어버리겠지만, 이 승냥이는 막대한 무리를 대장 승냥이라 그럴 수가 없다.
레네프 티브리악.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에 준 힘은 절대 풀지 않는 중년인의 이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