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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05화 (505/1,064)

505화

“이게 대체…….”

군터의 병사들이 느낀 당혹감은 시체 거인을 맞닥뜨린 베이고르의 병사들 못지 않게 컸다. 그들은 시체들이 몸을 일으켰을 때 한 번 놀랐으며, 그 시체들을 일으킨 것이 군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또 한 번 놀랐다.

잠시 후.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에서 빠져 나온 그들은 군터를 바라보았다. 감히 그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소리 내어 묻는 이는 없었지만, 그들 모두 눈빛으로 이 상황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군터도 그런 그들의 시선을 눈치챘다. 그러나 거기에 답을 해줄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적의 공세가 헐거워졌다. 그리고 주앙 칼 고르는 바로 저기에 있지.”

그는 대답 대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펄럭이고 있는 깃발을 가리켰다.

“따라와라.

시체 거인들이 날뛰어주는 한, 음산하게 울부짖는 시체들이 버텨주는 한, 적은 조금 전처럼 이쪽에 집중하지 못할 터.

“잠깐 힘든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사령술에 대한 거부감은 산 자로서 당연한 것. 하지만 그런 거부감에 흔들릴 정도로 군터와 그의 수하들의 관계는 얕지 않았다. 더군다나, 점점 더 상황이 어려워지던 차에 살 길이 눈에 들어왔으니 그들이 군터의 명령에 다시금 힘을 짜내는 것은 사령술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보다도 더 당연했다.

“장군을 따르라!”

피로가 뚝뚝 묻어나는, 쉬고 갈라진 목소리. 그러나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힘이 있었다.

* * *

주앙 칼 고르는 가슴이 조여오는 답답함에 주먹으로 갑옷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호위 무관들이 다가오려 했으나 그는 손을 뻗어 제지했다.

‘참으로 고약할 노릇이군.’

하루 건너 하루 꼴로 그를 갉아먹던 병마가 오늘까지도 그를 힘들게 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날인 만큼 조금은 얌전히 있어주기를 바랐건만. 아무래도 이놈에게는 눈치라는 것이 없는 듯했다.

‘칸디시아렌이 당한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높이 휘날리던 깃발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적과 교전이 일어났다 싶은 순간부터 깃발이 자취를 감춘 데다 적은 다시금 방향을 틀어 움직이고 있으니,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무시무시하군.’

수백의 시체들보다도, 사제 수십이 붙어서야 간신히 제압되고 있는 시체 거인들보다도 놀라운 것은 군터라는 한 사내 그 자체였다. 벌써 전투가 시작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저렇게 맹위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 괴물을 보는 듯해.’

과거에도 저런 자를 보았다. 도저히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던 괴물.

‘그 자는 정말 괴물이었지만.’

타칸 연합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

그는 과거 지금 적장이 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전장을 주파했었다. 그러나 그는 괴물이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진짜 괴물이었다.

그에 반해 지금 저 적장은 어찌 되었든 겉은 사람의 껍질을 쓰고 있다. 물론 조금 더 상황이 안 좋아지면, 타르가이 베르겐이 그랬던 것처럼 괴물로 변해버릴지도 모르지만.

‘이런 경험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그때는 승리했었다. 타르가이 베르겐과 타칸 연합을 멸하고 옛 베이고르의 영토를 완전히 수복했다. 신하들이 말하길 위대한 승리요,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승리는 온전한 그의, 베이고르의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믿음직한 동맹이 없었더라면 그때의 승리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타르가이 베르겐과 그가 이끄는 군대는 그만큼 막강했으니까.

‘동맹은 없다.’

지금,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온전히 그의, 베이고르의 힘만으로 싸워야 한다. 다행이라면 적도 당시의 타르가이 베르겐에 비하면 약하다는 점일까. 물론 베이고르의 전력 역시 대회전을 벌이던 그때에 비하면 볼품없지만.

‘이겨내리라.’

이겨내지 못하면 죽으리라.

“들어라”’

주앙 칼 고르는 왕가의 보검을 높이 들으며 외쳤다.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리 넓게 퍼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는 고개를 돌렸다. 결연하게 굳어 있는 왕의 얼굴을 보았다.

“그대들도 다 알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아국은 존망의 기로에 섰다! 무도한 제국의 침략자들은 우리의 땅, 우리의 가족, 우리의 재산을 짓밟았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목에 흉험한 칼날을 들이밀고 있지!”

일장연설을 하기에는 시기와 장소가 좋지 못하다. 알고 있다. 사실 지금 주절거리는 말은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함보다는 주앙 칼 고르, 그 자신에 대한 위로이며 격려였다.

“이 나라의 명운이 우리에게 달렸다! 아니, 사실은 그대들에게 달렸지! 난 이 칼을 이렇게 들고 있는 것만 해도 버거우니까 말이다!”

왕으로서 스스로를 웃음거리의 소재로 쓴다는 것. 평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나, 지금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웃지 않는 가운데 홀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주앙 칼 고르의 모습에는 눈길을 잡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병사들이여! 베이고르의 장병들이여! 내 비록 그대들과 같이 용맹하게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그대들과 함께 서리라! 그대들과 함께 피를 맞을 것이다! 승리한다면 그대들과 함께 함성을 지를 것이요, 패배한다면 그대들과 함께 죽을지니…….”

어느새 그를 향해 있는 시선은 적지 않았다. 주앙 칼 고르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서 그들 하나하나를 되도록 눈에 담았다.

“검을 들어라. 마지막 순간까지 한 점 후회 없도록.”

와아아아아-!

연설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콰앙!

병사들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온 직후. 흉험한 존재감이 그늘을 드리웠다. 주앙 칼 고르의 눈이 병사들을 떠나 정면으로 옮겨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졌다. 목에 칼이 닿은 것 같은 섬뜩함은 덤.

‘그렇군.’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저 정도는 되니까 칸디시아렌이, 숱한 베이고르의 장졸들이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타르가이 베르겐.

전쟁이 끝난 후에도 꽤나 오랜 시간 악몽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그 괴물이 떠올랐다. 그 끔찍한 모습이, 지금 모습을 드러낸 적장과 겹쳐 보였다.

* * *

군터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아니, 그런 말조차도 부족했다. 그는 그야말로 백전(百戰)을 훌쩍 넘는 전투 경험을 지녔으니까. 그가 치른 무수한 전투 속에는 자잘한 전투도 많았지만, 회전이라 할 만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본래 타고난 재능에 그런 숱한 전투 경험까지 더해지니, 군터의 감각은 전장에서만큼은 그야말로 초능력이라 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 순간에 베이고르 군사들의 사기가 치솟은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대충 짐작했다. 그 짧은 시간에, 주앙 칼 고르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연설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전장에 나온 최고 지휘관의 연설이라면 병사들을 어느 정도 고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다. 말을 길게 한다고 해서 더 크게 효과를 보는 건 아니라지만, 지금처럼 병사들로 하여금 결사의 각오를 다지게 할 만큼 무언가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런데 주앙 칼 고르는 그것을 해냈다.

‘아아.’

그러고 보면 단순히 최고 지휘관이 아니다. 왕이 아닌가. 한 나라의 주인. 모든 이들의 섬김의 대상. 그런 이가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다면, 병사들의 마음가짐도 비상해질 수밖에 없을 터.

‘근사하군.’

이만큼 강렬한 군기는 처음이다.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별 것 아닌데, 하나인 듯 똘똘 뭉친 모양을 보면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정예라 하는 병력이 방패 하나하나를 틈 없이 이어 붙인 것 같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왕의 군대’는 그냥 하나의 거대한 방패와 같았다.

비록 적이지만, 그 단단함과 장엄함은 군터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장애물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쁘지 않았다. 하나의 견고한 방패가 된 적을 보았을 때부터, 이성보다는 감성이 그를 지배했다.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위기보다는 흥미에 고개를 돌렸다.

“간다.”

뒤따라온 병사들에게 한 말이었다. 숨을 돌릴 시간을 충분히 주었으니, 이제는 움직일 것임을 통보한 거다.

“마지막이다.”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군터는 병사들의 지휘를 포기했다. 말했듯이 어차피 마지막이다. 저 방패를 뚫고 주앙 칼 고르의 목을 베는 것만이 목표다. 해내지 못한다면 죽을 것이요, 해낸다면 거기서 끝이니 그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오직 눈 앞에만 집중했다. 주앙 칼 고르에게 이어지는 길을 열고, 길을 따라 달리는 데만 전념했다.

퍼걱!

창대를 휘둘러 투구째로 머리를 터뜨렸다. 허리를 노리는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아래로 내려갔던 창을 빠르게 들어올렸다. 내려치던 도끼가 창 날과 부딪쳐 위로 튀며 도끼를 쥐었던 병사가 크게 뒷걸음질 쳤다. 군터는 그를 향해 몸을 부딪쳤다. 거리가 부족해 제대로 힘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병사는 쇠망치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그의 뒤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그와 뒤엉켜 밀려났다.

‘지금.’

군터는 작게 난 구멍에 몸을 던지며 창을 휘둘렀다. 따로 노리지 않고 크게 반원을 그리며 휘두른 창은 두 명을 얕게 베고, 한 명의 팔을 잘랐다.

“찔러!”

창 세 개가 튀어나왔다. 군터는 몸을 반대쪽으로 기울이며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한 쪽 발을 들어올렸다. 콰콱! 세 개의 창이 땅을 찌르자 군터는 올렸던 발로 창두(蒼頭)를 밟아 부러뜨렸다. 당황한 적병 셋. 그들의 목을 베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나,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저들이 저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 줌으로 인해, 동료 병사들이 덤벼들지 못하도록 길을 막는 벽이 되어줌으로 인해 그는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흐읍.”

죽음의 기운을 끌어냈다. 사실 기를 끌어내는 것은 몸의 동작에 구애 받지 않는다. 다만 익숙함의 차이일 뿐. 군터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형태’는 지금처럼 기를 한 손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콰직!

하나의 구슬처럼 똘똘 뭉친 사기가 으스러졌다. 가느다랗게 풀린 기운들은 꽉 쥔 손아귀를 벗어나 망령들에게 스며들었다.

그어어어…….

시체들이 일어섰다.

“놈이 사술을 사용한다!”

사술이라. 베이고르에 몸 담은 자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아무튼 됐다. 일어선 시체들은 고작해야 서른, 혹은 마흔 구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시간 벌이로는 충분하다.

‘비어가는군.’

군터는 그의 안이 허해졌음을 느꼈다. 체력적인 문제와 별개다. 그의 영에 담긴 힘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다.

‘상관 없다.’

더 이상 시간을 벌 필요도 없다. 왕의 깃발은 어느새 목전이었으니.

쿵!

막아서는 적을 부수고, 또 부쉈다. 베이고르의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맹렬히 그를 막아 섰다. 그 기세가 너무도 저돌적이라 순간 사교의 수법으로 눈이 돌아갔나 싶었지만, 그런 것은 또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히 자의로 싸우고 있었다.

푸욱!

심장을 찔렀다. 군터는 창을 슬쩍 돌리며 그대로 밀어붙였다. 적병의 몸뚱이를 방패 삼아 힘으로 밀고 들어가니 몇 명의 적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물론 그 동안 적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쭉 뻗은 창이, 휘두른 칼이 그의 몸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군터는 급소를 향해 오는 것들만 몸을 틀어 피했다. 여기서 말하는 ‘피했다’란 몸의 다른 부위로 대신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막아!”

반쯤 달려가던 군터의 움직임이 멎었다. 열, 아니 그 이상의 병사들이 몸으로 버티고 선 것이다.

“후욱!”

더 이상 밀고 가지 못한다 싶었을 때, 군터는 재빨리 고기 방패를 걷어차며 창을 뽑았다. 그리고 연달아 땅을 내리찍으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찔러어엇-!”

족히 십여 개의 창이 그를 겨눴다. 군터는 개 중 몇 개를 쳐내고, 쳐내지 못한 것들 중 하나를 손으로 잡아챘다. 아무리 건틀릿을 찼다지만 날카로운 창 날이 손아귀를 파고드는 것을 다 막아주지는 못해, 살이 찢기는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안돼!”

“놈을 잡아!”

군터는 통증을 무시하고, 손으로 잡은 창을 지지대 삼아 다시 한 번 몸을 튕겼다. 수십 명이 쌓은 벽을 뛰어넘어 착지했을 때, 그의 앞에 있는 적은 단 일곱이었다.

“전하를 지켜라!”

가로막는 적을 찌르고, 베었다. 등 뒤에서 오는 공격은 모조리 무시했다. 달리기 시작한 그를 따라잡은 공격은 몇 되지 않았다.

퍼억!

몸으로 부딪쳐 오는 적을 흘려 보냈다. 허리를 잡아채려는 손을 가볍게 비틀었다.

군터와 주앙 칼 고르의 시선이 마주쳤다.

푸욱!

검이 심장에서 제법 벗어난 위쪽을 찔렀다. 본래 심장을 노렸던 것을 몸을 낮추며 피해냈다.

어설픈 공격이었다. 보통 때였다면 한 손으로 검을 쳐내버렸을 정도로 허술한.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왕은 한 순간의 틈을 잘 노렸다.

‘훌륭해.’

한 칼을 먹였으니 만족한다는 걸까. 주앙 칼 고르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콰악!

군터의 왼 손이 왕의 목을 움켜잡았다.

창은 몸을 던져 매달린 호위 무관 때문에 쓰기가 어려웠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는 한 손이면 충분하다.

우득!

뻣뻣하던 목이 흉측하게 꺾였다. 꽉 다문 입에서 피가 흐르고, 눈은 빛을 잃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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