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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504화 (504/1,064)

504화

익숙한 깃발이었다. 저 깃발과 함께 전장을 누빈 적이 있었기에 군터는 배후에서 다가오는 적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프롱기우스.’

백작. 아니, 후작이 되었던가. 아무튼 프롱기우스 후작과는 면식이 있었다. 사실 군터의 기억 속에 남은 이는 지금 다려오는 이가 아니라 전대의 프롱기우스 후작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당대의 프롱기우스 후작 역시 과거의 전우였기는 마찬가지. 그와는 한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적이 있다. 그런 이를 목 베야 한다.

‘그렇다 한들, 지금은 적.’

얄궂다는 생각도 어디까지나 머리에 잠깐 떠올랐다 사라졌을 뿐. 그의 마음에 어떤 울림도 주지 못했다. 아마 당대가 아닌 전대의 프롱기우스 후작이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군터는 다가오는 적을 맞을 준비를 했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조금만 더 가까이 붙는다면 칸디시아렌 공작을 상대로 그랬듯, 단번에 접근해 목을 칠 작정이었다.

‘음?’

점점 줄어드는 거리를 가늠하던 중. 군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또 다른 적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직접?’

이번에도 단번에 적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랬기에 군터는 미련 없이 몸을 틀었다. 프롱기우스 후작이건 뭐건 이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눈길은 크고 화려한 하나의 깃발에 못 박혔다.

주앙 칼 고르.

베이고르의 왕.

저 자만 잡으면 이 싸움은 끝난다. 저 자의 목을 베는 순간 승리한다.

“장군!”

왕의 깃발을 보며 전의를 고양시키는데, 뒤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주니 목소리를 냈던 수하가 쥐어짜듯 외쳤다.

“병사들이 지쳤습니다! 이대로라면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는 소리가 아니다. 척 보기에도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지친 것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이들이 대다수였으며, 병력의 수는 처음에 비해 반절 정도로 줄어 있었다. 막힘 없이 돌파를 거듭하던 와중에도 적의 창칼은, 화살은 착실하게 그들을 갉아먹었던 것이다.

“마지막이다! 저기에 주앙 칼 고르가 있다!”

끝이 보인다는 것은 상당한 동기부여가 된다. 지친 이들로 하여금 남은 힘을 끌어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은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

“허억…허억…….”

병사들이 지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어떻게든 따라와줄 거라고 경험에 기대어 생각했다.

‘이미 한계였던 건가.’

병사들은 제대로 따라붙지 못하고 처지기 시작했다. 군터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약간 자책했고, 약간 실망했다.

‘정예.’

이제껏 휘하 병사들에게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물론 전투를 치를 때마다 생각 이상의 피해가 났을 때는 혀를 차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었다. 군터 자신의 전투 지휘 방식이 대부분 힘 싸움인 만큼 피해가 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나마 피해가 ‘그 정도’에 그칠 수 있는 것도 그의 병사들이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단련된 정예 중의 정예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병사들이 아쉬웠다. 그들이 룬차이가 부리던 루반다이들과 같았다면 지금 저렇게 처져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저들은 평범한 사람이다. 평범한 그들에게 평범함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

“적장의 목을 베어라!”

“전하께서 이르시길 수급을 취하는 자, 천금으로 포상한다 하셨다!”

재미있는 말들이 귀에 들려왔다. 아직은 제법 멀리서 들려오고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저들이 그의 앞에 나타나리라.

“…….”

사실 제법 곤란한 상황이었다. 병사들을 두고 혼자서 싸울 수는 없다. 아무리 그의 창이 빠르다 해도 한 번에 다섯의 적을 베고, 다섯의 창을 부러뜨리며, 다섯의 화살을 쳐낼 수는 없다. 조금씩 피를 흘리게 될 것이고, 지금 헉헉대는 병사들처럼 지치고 상처 입게 되리라. 그리고 어쩌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 주앙 칼 고르의 목을 베기도 전에 말이다.

그리 되는 것은 사양이다. 그러니 병사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치고 상처 입은 병사들은 더 이상 힘이 되기 어려워 보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기에도 급급하다.

‘실수한 건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주앙 칼 고르가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미 이긴 전투에서 너무 무리를 했다. 애송이처럼 마음만 앞섰다. 크게 보았으면서, 작게 보지는 못했다. 철저하지 못했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에게는 이 상황을 이겨낼 힘이 있었으니까. 다만 이 힘을 보이는 것이 조금 꺼려질 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힘이 있음에도 줄곧 숨겨왔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사교도들이 준비한 죽음의 술법을 제어한 것을 적잖은 이들이 목격했다. 어떤 식으로든 입 소문을 퍼져나갈 것이니, 여기서 조금 더 보탠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

그의 몸 속. 영에서부터 끌어냈다. 아주 자연스럽게, 거침 없이.

그의 본질에서부터 뽑아낸 사기는 세상에 나옴과 동시에 끓는 물처럼 부글거렸다. 군터는 그것을 그의 한 손에 가두고 통제했다. 그리고 충분히 모였다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파삭!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들린 듯했다.

그의 손아귀에 갇혀 있던 기운들은 감옥을 벗어나 이리저리로 뻗어 나갔다. 마치 화살처럼 빠르게,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우우우우-!

이리저리 떠돌던, 그야말로 넘쳐나는 망령들이 갑작스레 뻗어 나온 기운들에 화답했다. 자신들에게 내려온 ‘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그들은 죽음을 머금고 다시 한 번 그들의 과거에 안착했다.

“으…으어어어…….”

하나, 둘,…열, 스물…백, 이백…….

죽었던 자들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장면은 산 자들이 보기에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들도 비명 소리에 한 번 고개를 돌리면서 알아차리게 되고,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오…신이시여!”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놀라면서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령술이다.”

“허나 이 정도 규모라니, 대체 이게…….”

특히 사교도들은 시체들의 움직임을 보고 단번에 그 정체를 파악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놀라움이 가장 컸다.

시체를 일으키는 것. 사령술의 대표적인 술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별로 효율이 좋은 술법은 아니다. 망자 하나 하나를 조종하는 일이 쉽지 않을뿐더러, 시체를 일으키기 위해 들여야 하는 기운의 양도 상당하다. 그러니 전투 용도라면 시체를 일으키느니 차라리 저주를 걸거나, 다른 술법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

“말도 안 되는 기운이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갑작스레 느껴진 강렬한 기운. 그리고 그 기운이 꿈틀댄다 싶었을 때는 이미 물경 이, 삼백에 가까운 시체들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단언컨대, 결코 한 사람이 부릴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못해도 열 정도, 그것도 고위 술사들이 힘을 써야 하는 정도다. 그런데 그 정도의 술법을, 술사도 아닌 제국의 장수가 부리다니?

그 믿기 힘든 사실을 알아차린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이들 중 시세로 하이윈즈 백작이 있었다.

‘저 자…뭔가 있다.’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는 술사였다. 그것도 사령술을 익힌 사령술사였으며, 그 조예 또한 꽤나 높은 수준이었다. 사령술을 익히는 사교의 고위 사제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그렇기에 그는 시체를 일으키기 전부터 군터에게서 느껴지는 사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군터보다는 그의 검은 창에 집중하고 있었다. 창을 통해 사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그 검은 창이 사기를 머금은 법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기의 근원은 저 검은 창이 아니라, 창을 휘두르는 군터 그 자체였다. 시체 거인들이 그의 앞에서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질 때부터 그리 생각했고, 시체들이 일어서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웃기는군. 제국의 무장이 사령술을 익혀? 그것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저 정도면 고위 술사의 수준조차 아득히 넘어섰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법구의 도움을 받은 것이겠지만, 저 정도 규모의 술법을 전투 중에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술사로서의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지 않은가. 사령술이라면 입에 거품을 무는 제국에서, 그것도 제국의 위장이라는 자가 사령술을 사용한다?

‘그렇지. 결국 이런 것이지.’

다른 술법들도 마찬가지지만, 사령술도 상당히 위력적인 힘이다. 그 힘을 통제하여 사용할 수만 있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제국 역시 마찬가지. 대외적으로는 금기니 뭐니 해도, 그들이 은밀하게 여러 ‘금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을 것임을 그는 확신했다. 근거 없는 의심이 아니었다.

시세로 하이윈즈 백작은 일찍이 정체를 숨기고 제국인으로 살았으며, 고위 관료의 심복으로서 제국 고위층의 이런저런 비밀들을 엿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사실, 아니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은 모두 똑같으며 사람 사는 곳도 다 똑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군.’

저 자에 대해 안다. 지금은 제국의 위장이 되었으나, 본래 베이고르의 기사였다. 물론 그 이전에는 제국의 군인이었겠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런 자가 어떻게 저런 힘을 손에 넣었을까?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다. 듣기로 저 자는 7황자의 총애를 얻었다 했으니, 7황자가 그에게 힘을 주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거슬려.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베이고르가 다시 서기 전에는 오랜 시간 제국에 첩자로 잠입해 있었고, 베이고르가 다시 선 후에는 조정에 정객으로서 몸담았다. 타고난 자질은 오랜 경험으로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졌으니, 그의 감각은 범인들과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발달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감각이 속삭인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고민이라도 해보겠지만, 지금은 그럴 틈도 없었다.

“대사제! 어찌 좀 해보시오!”

“어쩔 수가 없소! 영문을 알 수 없으나, 그 어떤 사령술도 소용이 없소이다!”

시체들이 일어났다고 해서 전황이 극적으로 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 성가신 장애물이 생긴 정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사령술로 일으킨 시체들이 갖는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사기를 품고 일어난 시체들은 생전의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힘이나 순발력, 모든 것이 부족하다. 물론 다시 죽을 염려가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니 고기 방패로는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뿐.

“밀어붙여라! 무기를 쥔 팔을 잘라버려!”

당황하지만 않는다면, 두려워하지만 않는다면 시체들은 걱정할 만한 적이 아니다.

‘단순하게 뭉치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적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군. 핵심이 되는 것은 망령이 아니라 의지를 부여한 기. 그 자체인가.’

군터 역시 알고 있었다. 시체들은 시간벌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는 다음 수를 준비했다.

완벽하게 원리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원리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 같지도 않았다.

‘일어나라.’

그어어어어…….

피와 살. 원념과 살의로 뭉친 거대한 형체가 몸을 일으켰다.

시체들처럼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셋.

하지만 그것은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힘을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짓뭉개라.’

군터의 의지가 그것들에게 심어졌다.

그아아아아-!

세 구의 시체 거인이 스산하게 포효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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