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까다로운 상대였다. 수는 많지 않지만, 괴물로 변한 적들은 하나하나가 외형에 걸맞은 힘을 발휘했다. 인간을 뛰어넘은 신체 능력은 일반적으로는 할 수 없는 전투를 가능케 했으며, 그것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군터와 그의 병사들조차 쉽게 대응할 수 없을 만큼 까다로웠다.
그러나.
“적이 멀어진다고 쫓지 마라! 뭉쳐라!”
물어 뜯을 것처럼 달려들던 괴물의 아가리에 창 날을 쑤셔 넣으면서 외친 말이었다. 그의 호통을 들은 병사들이 움찔하며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대형이 살짝 벌어졌던 것이 군터의 명령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영악한 놈들입니다. 눈이 뒤집힌 것처럼 달려들지만 속으로는 꿍꿍이가 있군요.”
군터는 수하의 목소리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 번 창을 휘둘러 뻗어오던 괴물의 팔을 잘라냈다.
‘제법.’
그는 정면만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중심으로 일정 거리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만큼은 아니라도, 대강 어떻게 진행되어가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치 또 다른 눈이 생긴 것 같은 느낌. 이러한 감각을 자각한 것은 조금 전 적의 술수를 봉쇄하면서부터였다.
감각의 확장.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현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그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소했지만 적응하기는 쉬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군터는 이 새로운 감각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 군터는 이제껏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덤벼드는 적들에게 더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병사들의 지휘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 일일이 고개를 돌리며 살피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형세의 판단은 물론 명령까지 지금처럼 즉각적으로 내릴 수 있었다.
콰직!
무력화된 괴물의 머리를 말발굽이 도끼처럼 내리 찍었다. 힘이 달리는 듯 몸놀림이 둔해진 전마에게 잠시 숨돌릴 틈을 주면서, 군터는 조금 더 가까워진 화려한 깃발을 눈에 담았다.
“장군! 놈들이 삼방(三方)에서 조여오고 있습니다!”
괴물들을 풀어놓고, 그 뒤를 받침과 동시에 측면에서 찔러온다. 정석적이라면 정석적인 군의 운용. 정석적인 만큼 당연히 예측했고, 새로이 터득한 감각을 통해 그 움직임까지 시시각각 감지할 수 있었다.
“정면돌파 한다.”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니다. 그때마다 군터는 대부분 지금처럼 과감한 선택을 내렸었다.
마음만 앞세운 무모함이 아니다.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상술했듯, 이 정도의 상황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겪었었다. 하나 같이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때마다 그는 원하는 바를 이뤄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
“쐐기 대형!”
군터의 호령에 병사들이 속도를 조절하며 위치를 바꿨다. 군터를 꼭짓점으로 한 하나의 쐐기가 되어 집결한 그들은 방진을 갖춘 베이고르의 병력을 날카롭게 찔러 들어갔다.
“창을 들어라! 창을 들어!”
대 기병용 장창을 든 병사들이 벽을 쌓고 있으면 아무리 중무장한 기병대라 해도 정면으로 맞서기가 어렵다. 수적 우위가 있다면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밀어붙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아니다.
“아아아악!”
그러나 가장 앞에서 길을 여는 이가 군터였다. 군터는 그의 창보다 못해도 반 배는 더 긴 창들 앞에서 가볍게 창을 휘둘렀다. 그 가벼운 몇 번의 휘두름으로 없었던 길이 생기고, 좁았던 길이 넓어졌다.
촤악!
비스듬히 왼쪽으로 휘두른 창이 한 명의 목과, 한 명의 가슴팍을 갈랐다. 피의 장막이 창의 궤적을 따라 펼쳐지고, 떨어지는 핏물 아래서 연이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군터는 그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공격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움직임을 가져갔다. 양 옆과 뒤를 믿음직스런 수하들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의 운용이 이전보다 한층 더 수월해진 덕도 컸다.
창에 머금은 사기가 정면의 적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한 순간에 목숨이 오가는 전투에서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군터의 시간은 그들보다 배는 빠르게 흐르는데, 그와 맞서는 적들의 시간은 덜컥 멈추게 되니 아무리 장창으로 숲을 만든들 그들은 군터의 돌격을 막을 수 없었다.
히히힝!
그러나 아무리 군터와 그의 병사들이 용맹을 보인들, 언제까지고 한 손이 여러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 뜀박질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계속 자잘한 상처를 입어가던 전마가 기어이 기력이 다해 쓰러졌다. 군터는 쓰러지는 말에서 가볍게 뛰어 올랐다.
군터가 말에서 내리자 자연히 돌파력이 줄어들었다. 돌파력이 줄어드니 속도 역시 줄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적들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점점 전투가 격렬해졌고, 병사들의 피해가 커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베이고르의 공격에도 그들은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어어어…….
전신에 더 이상 붉지 않은 곳이 없어졌을 무렵. 군터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형태의, 그의 기억 속에 자리 하고 있었던 괴물과 맞닥뜨렸다.
죽은 자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거인. 아니, 괴물.
조금 놀랍기는 했으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보잘것없던 시절에도 상대했던 괴물. 지금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사라져라.’
창을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손을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능하다는 생각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괴물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들었다.
우우우우우…….
괴물을 응집시켰던 사기. 망령들이 군터의 의지에 속박됐다. 한 데 응어리진 기운을 뜯어버리는 것은 군터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체 거인은 군터의 가벼운 손짓 한 방에 무너져 내렸다. 사교의 사제들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을 것 같은 수십 기의 시체 거인들은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적들이 당황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군터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 앞으로 나아감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방어선까지 뚫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칸디시아렌 공작이 쓰게 웃었다. 그가 그의 친위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각하.”
“뒤로 물러나 있어도 괜찮네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세가 오른 적을 저지하려면 한 팔이라도 더 보태야지요.”
프롱기우스 후작이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생각을 잘못 했던 것일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생각합니다.”
“글쎄. 그대의 형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떠올렸을지도 몰라.”
현 프롱기우스 후작의 형이었던 전대 프롱기우스 후작. 음침한 사내였지만 그 군재만은 인정했다. 칸디시아렌 공작은 그의 부재가 못내 아쉬웠다.
“자네가 오른쪽을 맡게. 내가 왼쪽에서 가지.”
“그리 하지요.”
왕의 곁을 지키는 근위대를 제외하고는 이제 여력이 없다. 그들이 적을 멈춰 세우지 못한다면 사실상 끝이다.
“화살을 쏴라!”
슈슈슝!
조금 뜸하다 싶었던 화살 비가 다시금 쏟아졌다. 거슬리기는 하지만 크게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근거리에서 쏘는 화살이라고 해도 군터의 눈은 그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고, 그의 창과 몸은 화살을 두려워하는 수준을 넘어섰으니.
채챙!
창을 휘둘러 화살을 쳐내고, 시신을 들어 미처 쳐내지 못한 것들을 막는다. 그럼에도 다 막아내지 못해 두어 대 정도가 갑옷을 때리고, 또 일부는 살을 파고들기도 했지만 무시해도 좋을 가벼운 상처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렇게 화살 비를 한 번 맞고 나면 돌파력이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적들이 왜 화살을 아끼느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지금 그들은 표적처럼 덩그러니 떨어져 나와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막으려는 베이고르의 군졸들과 뒤섞여 있는 것이다.
“크악!”
쏟아지는 화살 비는 적아를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베이고르는 되도록 화살을 아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군이 죽어나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화살을 퍼부었다. 왜?
‘기민하군.’
군터는 좌우 양측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병력을 감지했다. 그들의 움직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역시.
정예다. 아마도 이들은 베이고르가 숨겨놓은 또 다른 한 수일 터. 하지만 주앙 칼 고르의 깃발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숨겨놓은 한 수라.
피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있다. 이쪽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측면에서 접근해 온다면, 그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군터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받아주지.’
무시하기에는 적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 그럼에도 돌파를 고집한다면 피해가 더 커질 것이니 가만히 자리에 앉아 적들을 기다릴 수는 없다.
“흠!”
군터는 방패를 들고 버티던 적병을 후려쳐 날려버리고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적이 다가오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런!”
칸디시아렌 공작은 군터의 접근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다. 비명이 가까워지고, 허공에 치솟는 살점과 피가 점점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 알기 싫어도 알 수 밖에 없다.
“적은 지쳤다!”
그는 뻔한 말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며 선봉으로 나섰다. 그는 본래 무인이 아니었다. 사실 이렇게 무겁게 무장하고 전장에 나서는 것만 해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군세의 사기였다. 일전에 크게 데였던 전쟁을 통해 그는 어느 정도 전장의 법도를 체득했던 것이다.
“각하!”
적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갑작스레 그의 호위 기사가 고함을 지르며 그의 앞으로 튀어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뜬 순간.
쾅!
말과 사람이 동시에 튕겨 나갔다. 기사가 있던 자리에는 그들을 쳐낸 검은 창과, 그것을 든 거한이 대신 자리했다.
“군…….”
스산한 눈빛에 압도되어 신음하듯 한 마디를 뱉었다.
푸욱!
가슴에 차가운 무언가가 파고 들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빠르게 잠들어갔다. 칸디시아렌 공작은 자신의 시야가 반전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콰직!
그의 세상이 눈을 감았다.
* * *
“…….”
칸디시아렌 공작.
리에론 공작이 죽은 지금, 주앙 칼 고르를 제외하고 베이고르의 최고 권력자라 봐도 무방할 자.
그런 이를 참살했음에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건 뭐건, 어차피 이 전장에서 다 죽어나갈 것이다. 일찍이 7황자는 되도록 고위 인사들은 생포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하루에도 몇 번씩 상황이 급변하는 전장에서 그런 것을 다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생포하라고 했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은 죽을 것이다. 전장에서 목이 베이느냐, 광장에서 목이 베이느냐의 차이일 뿐.
“각하!”
눈에 핏발이 선 자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군터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뒤따라 온 군터의 병사들이 그를 상대했다.
서걱!
수하들의 용전을 보며, 군터도 머리를 잃은 시신을 지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잃은 적들은 꽤나 사나웠으나,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