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전하!”
“내 이미 물러서지 않겠다 말했느니라.”
주앙 칼 고르는 자신을 만류하는 귀족들이 답답하기 보다는 안쓰러워 보였다.
여기서 몸을 뺀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왕국의 남은 전력은 이곳에 집결해 있고, 이곳에서 패한다면 미래는 없다. 왕인 그가 어떻게 목숨을 건진들 결국 베이고르는 제국의 군홧발에 짓이겨질 것이다.
“전하. 대장기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근위대장 칼가린 자작이 나직이 말했다. 키도 큰 데다 체고가 높은 전투마에 오른 그의 시야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넓었다. 눈이 좋기도 했고.
그렇기에 그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제국의 대장기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볼 수 있었다.
“군터. 그 자가 오고 있군.”
칸디시아렌 공작이 실소를 머금었다.
지금 왕의 목을 노리고 달려오는 이는 한때는 이 나라의 기사였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모르겠군.”
“꼭 무언가 잘못 되어서 일이 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앙 칼 고르는 칸디시아렌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옅게 떠올라 있던 씁쓸함이 지워지고, 결연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건 그렇고…상당히 저돌적이군.”
“위협적이지만, 우리로서도 기회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한다. 양측의 군세. 양측의 대장. 물론 일국의 왕과 일개 장수의 목의 무게가 같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전투에서 그 두 개의 목은 ‘대장’으로서 같은 값을 가진다.
“놈의 수급을 취한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승기를 다시 쥘 수 있습니다.”
칸디시아렌 공작은 마음과는 다른 말을 했다. 물론 그는 정말로 군터의 목을 벤다면 승기를 다시 찾을 수’도’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렇게 될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전투를 치르면서 파악한 바, 그들이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제국군은 정예였다. 대장을 잃는다고 해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현 전세는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이다. 전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왕을 중심으로 뭉친 친위 병력이 유일했다. 이들만으로 이 불리한 전황을 뒤집는 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 해도 이대로 허망하게 끝날 수는 없지 않은가.’
패할 것을 알더라도, 죽을 것을 알더라도 물러날 수 없다. 보검을 뽑아 든 왕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이리라.
“밀집하라! 대사제! 적이 언덕 너머로 나타남과 동시에 준비한 것들을 아낌 없이 쏟아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공멸을 각오하고 사용한 대규모 저주마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대사제를 칸디시아렌 공작은 괜찮다는 말로 위로했다. 덕분인지 대사제를 비롯한 잊힌 신의 사제들은 혼란 대신 독기에 가득 차 있었다.
‘제국의 저력이라는 거겠지.’
괜찮다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 ‘쇠락의 저주’는 베이고르가 준비한 회심의 한 수였다. 그것이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막혔을 때는 칸디시아렌 공작조차 암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우리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군.’
그대로 전투가 정석적으로 흘러갔다면 패배는 확정이었다. 제국이 무리하지 않고 삼군을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밀어붙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타났습니다!”
언덕 위에 나타난 적의 수는 예상대로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은 치켜 올라간 깃발의 수를 헤아리지 않아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체할 수 없었던 거겠지.’
아마도 왕이 빠져나가지는 않을까 우려했을 것이다. 제국이 이 전쟁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왕이 빠져나가는 것이야말로 패전을 제외하고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일 터.
그러기에 그들은 서둘렀으리라. 대장기 주위에 뭉쳐 있는 저 소수의 병력이 그 증거다.
우우우우우-!
검은 안개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 적을 향해 날아들었다. 메아리처럼 귓가를 스치는 이 소리는 환청이 아니다. 죽음에서 일어난 망자들이 내지르는 울음, 절규였다.
* * *
“장군!”
“이게 대체…….”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 않은가. 길게는 십 수 년. 짧게는 수 년 가까이 그의 곁에서 온갖 비현실적인 것들을 목도해 온 수하들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곧 군터는 생각을 바꿨다. 산 자로서 죽은 것들에 대해 갖는 거부감이라든지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들이 정상이며.
‘꺼져라.’
이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그 자신이 비정상일지도 모른다.
아아아아아-!
술사들의 술력에 의해 움직이던 망령들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이어 비명을 지르며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기, 아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따로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었다. 군터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망령들은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니.
군터는 그것이 흥미로웠다. 그가 망령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왜 ‘죽은 것’들이 그를 두려워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작은 호기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그토록 쫓아온 왕의 깃발이 드디어 눈앞에 다가왔다는 점이다.
슈슈슝!
망령 다음은 화살 비. 진부하지만 언제 봐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은 광경이다.
“방패 들어!”
굳이 그가 직접 입을 열 필요도 없이, 장교들이 즉각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히히힝!
군터가 할 일은 그저 말을 달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앞서 달림으로써 그의 병사들이 덩달아 달린다. 그의 질주는 진군의 알림이고, 그의 창이 움직일 때 병사들은 싸운다.
와아아아아-!
그가 본 것을 병사들도 보았다. 다른 깃발들에 비해 더 크고 화려한 왕의 깃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거창!”
적은 이미 준비를 미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해 온 오합지졸들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것 같은 정예들. 패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사기가 나빠 보이지 않는, 아마도 베이고르 최후의 보루일 병력.
군터는 알았다. 그들은 굴하지도, 꺾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콰직!
그러니 오직 힘으로써 쳐부숴야 한다. 가장 유효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물론 그만한 힘이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지만, 군터에게는 힘이 있었다. 차고도 넘치는 힘이.
“흡!”
가볍게 휘두른 창이 길게 뻗은 장창을 가른다.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거무튀튀한 창은 눈에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몇 개의 선을 그었고, 그 선의 궤적에 걸린 것들은 모조리 잘려나갔다. 틈 없이 빽빽하게 세운 창 끝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콰득!
군마의 앞발이 당황한 병사를 짓밟고.
푸욱!
쭉 뻗은 창이 두 명을 한 번에 관통했다.
“벌려라!”
군터가 구멍을 내고, 뒤따른 병사들이 그것을 양 옆으로 잡아 뜯었다.
견고하던 진형에 균열이 생기고 뒤흔들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안 되겠군.”
주앙 칼 고르가 혀를 찼다. 그리고 칼가린 자작에게 눈길을 보냈다.
칼가린 자작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이상 밀리면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겠지. 또, 근위대의 실력을 감상해보고 싶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칼가린 자작은 그의 말을 천천히 앞으로 몰았다. 근위대의 병사들 중 일부가 그를 따랐다. 모두 그와 같이 특별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멈춰 세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적장의 수급을 취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제국의 흑포장군이라. 괜찮군요.”
“그래.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지.”
사실 칼가린 자작은 저 앞에서 달려오는 적장과 면식이 있었다. 상대도 그를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얄궂은 운명이고, 인생이다.
병사들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다.’
말을 달렸다. 적과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적은 여전히 막아서는 아군을 손쉽게 돌파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달리는 말 위에서 자세를 바꿨다. 들고 있던 무기를 버리고, 속도를 줄이며 말의 등 위로 올라갔다. 달리는 말 위에서 이런 위태로운 자세를 취하는 것은 어지간한 균형감각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나, 그와 근위대 병사들 모두 어렵지 않게 해냈다.
히히힝!
말들이 비명을 질렀다. 칼가린 자작과 근위대가 말 등을 박차고 뛰어오른 탓이며, 그들의 몸이 조금 전보다 배 이상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발판이 된 말들의 대다수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크아아아아아아!”
몸을 채우는 강력한 힘. 칼가린 자작은 그 힘에 한껏 고무되었다. 처음 이 힘을 손에 넣었을 때부터 매번 그랬으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여 그는 포효했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며, 상대의 이목을 끄는 것이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군터-!”
허공에 떠오른 칼가린 자작과 그 아래, 말 위에 앉은 군터의 시선이 마주쳤다. 투기를 줄기차게 뿜어내는 그와는 달리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눈길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군.”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기억하고 있다 한들 이런 몰골이 된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할 터.
허나 그는 군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 몇 번, 그것도 사적인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지만 그 독특한 인상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래.’
상대가, 적이 움직인다.
‘그 창으로 날 찌르겠지.’
검은 창이 움직인다. 이 거리라면 찌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창 끝이 향하는 한 점만 피하면…….
푸욱!
“……!”
‘피한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그의 몸이 덜컥 멈췄다. 분명히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창 끝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에 시리도록 찬 무언가가 퍼져 나갔다.
‘아직…이다!’
칼가린 자작이 있는 힘껏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발톱은 아무것도 가르지 못했다. 허공에 멈춰 있던 그의 몸이 순식간에 땅에 처박힌 것이다.
쾅!
“크르륵…….”
“…….”
군터는 아직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적에게서 눈을 돌렸다. 상대해야 할 것들은 이 한 마리가 끝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익숙하면서도 낯선 형태의 괴물들이 덤벼들었다.
‘바르바피.’
이질적인 외형을 보자마자 과거 질리도록 싸웠던 괴물들이 떠올랐지만, 이 괴물들은 그때의 바르바피들과는 조금 달랐다. 외형도 외형이지만, 풍기는 기세가 특히. 게다가 이것들, ‘말’도 하지 않았나.
콰직!
부들거리는 괴물의 목에 창을 내리 찍었다. 숨이 멎고, 버둥거림도 멎었다.
‘날 알고 있었던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괴물로 변한 탓에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알던 자일지도 모른다.
‘상관 없지.’
어차피 목 베야 할 적. 잘려나간 수급의 주인이 누구든지 신경 쓸 바 아니다.
“이놈!”
괴물들이 노기 섞인 살기를 풀풀 풍겼다. 지금 숨통을 끊은 괴물이 그들의 대장이라도 됐던 걸까.
“이성이 있는 놈들이다. 냉정하게 응전하라.”
물론 그 역시 알 바는 아니다. 알아서 흥분해준다면 고마울 뿐.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