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비록 겉모습이 흉포한 괴물로 변해버렸다고 하지만, 반드레온 모렌스는 여전히 이성적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할렌은 자신을 향한 살의를 뚜렷하게 느끼면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흐르던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흐름을 유지하는 것. 그것은 그가 칼을 잡고 살아온 세월을 통해 터득한 요령 중 하나였다.
쾅!
반드레온 모렌스의 공격은 파괴적이었다. 철퇴처럼 떨어지는 발톱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 설령 칼이 버텨낸다 해도 팔과 다리가 버티지 못하리라.
할렌이 할 수 있는 것은 수세로 일관하며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최대한 공격을 흘리며 다른 쪽에서 틈을 노릴 수 있게끔 반드레온 모렌스의 주의를 끄는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반드레온 모렌스는 쉬지 않고 몰아붙였고, 할렌은 점점 자신의 흐름이 끊기는 것을 느꼈다.
“후욱!”
몰아 쉬는 숨에 열기가 가득하다.
틀림없이 위기다. 단 한 번만 손이 꼬이거나 호흡이 틀어지면 저 흉측한 발톱이 그의 몸을 찢어발겨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기 속에서도 할렌은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희열을 느꼈다. 위기 속에 있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급하군.’
여전히 거칠면서도 냉정하지만, 그 움직임은 조금 전보다 미세하게 투박했다. 거친 것과 투박한 것은 비슷할지라도 분명히 다르니, 이는 반드레온 모렌스의 마음이 조금 전과 같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마도, 측면과 후방에서 간간이 들어가는 병사들의 공격에 조금씩 움찔하는 것과 상관 없지 않을 터.
‘약해졌어.’
소용 없는 듯 보였던 병사들의 칼질이, 죽어가면서도 내지르던 창 한 자루가 헛되지 않았던 거다. 아무리 단단한 갑옷도 여러 번 공격을 받다 보면 조금씩 헐고 뜯어지고, 깨지는 것처럼, 괴물로 변한 반드레온 모렌스의 강철 같은 몸뚱이도 연이은 공격에 조금씩 약해져 가고 있음에 분명하다.
“헛!”
허나 조금씩 약해져 가고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갑 같던 가죽의 이야기일 뿐, 몸통을 통으로 찢을 것처럼 날아드는 날카로운 발톱에 실린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여전히 할렌은 칼날 위에서 위태롭게 중심을 잡아야 했다.
“으아아아!”
상대의 맹공을 피해 숨가쁘게 몸을 날리던 차. 반드레온 모렌스가 슬쩍 몸을 움찔했다. 이제는 조금씩 흠집이 나고 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지간한 공격들은 무시하고 할렌을 쫓던 그였다. 그런 그가 움찔할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믿음직스럽구만.’
할렌의 눈에, 길쭉한 칼 한 자루를 들고 달려드는 보리스가 보였다. 반드레온 모렌스는 배후의 보리스를 무시하지 못하고 몸을 틀었다.
이전과 달리 빠르게 반응한 탓에 보리스는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몸을 빼야 했다. 하지만 그 덕에 할렌은 짧지만 귀중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삐걱대던 몸이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고, 다시금 움직일 수 있는 기력을 회복했다.
* * *
“하아. 하아.
보리스는 몸을 뒤로 빼며 숨을 골랐다. 이번에도 괴물은 거칠게 한 번 발톱을 휘두르기만 할 뿐, 따라붙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정면의 할렌에게만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얕아.’
벌써 몇 번째인가.
처음보다는 제법 칼날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 부친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힘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그런 보리스도 저 괴물, 저 괴물의 두꺼운 가죽 앞에서는 몇 번씩이나 무력함을 느껴야 했다.
‘형편없군.’
이가 빠진 칼을 내던지고서 땅에 뒹굴던 주인 없는 칼을 주워들었다.
벌써 세 번째다. 본래 그가 쓰던 칼은 이미 칼이라 할 수 없는 몰골이 되어버렸다. 명검이라 할 수는 없어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좋은 검조차 그 꼴이 났으니 병사들이 쓰는 검이야 말할 것도 없다. 두어 번 정도 괴물의 가죽과 부딪치면 예기가 죽어버리고 만다.
‘칼로는 안 돼.’
쥐었던 칼을 곧바로 내던졌다. 그리고 선 채로 석상처럼 굳어 있는 병사에게 손을 뻗었다. 말이 뻗은 것이지, 거의 주먹을 날리는 수준으로 빠르게 움직인 손은 병사가 들고 있던 무기를 낚아챘다.
“어엇!”
“잠깐 빌리겠다.”
한 손으로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검과는 확연히 다른 무게. 두 손으로 쥐고 휘둘러야 하는 중병기. 흔히 전투도끼라고 부르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큰 크기와 무게를 자랑하는 거대 도끼는 흔히 보기 힘든 무기다. 흔치 않은 무기였고, 그런 만큼 보리스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익숙하지 않은 녀석의 힘이 필요하다. 기술이 아니라 한 방을 터뜨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니.
‘확실한 틈이 필요해.’
다만 그 힘을 쓰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보다 더 확실한 기회가 필요하다. 저 영악한 괴물이 묵직한 도끼로 자신을 내리찍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음? 그러고 보니, 자밀 이 녀석.’
어떻게 그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 문득 보리스는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은 친구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를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눈을 돌릴 필요는 없었다. 자밀 우슈무르는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수하들과 함께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겁쟁이처럼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녀석이었다면 애초에 친구로 사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 그런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의아해 하던 보리스는, 곧 자밀 우슈무르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병사들의 상당수가 활을 들고 있음을 눈치 챘다.
‘안일한 것 같지만…네게도 생각이 있겠지.’
활을 들고 있지만, 화살은 시위에 걸린 채 멈춰 있다. 무작정 멀리서 활을 쏘는 게 아니라,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회를 엿보는 모양새다.
‘시간이 많지 않아. 이제 곧…….’
괴물의 정면에서 시선을 끄는 할렌. 그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괴물의 발톱을 피해내는 데 점점 더 어려워하는 것이 보였다.
‘뭘 하려거든 지금 해야 한다.’
그가 검을 버리고 도끼를 든 이유였다. 보리스는 자신이 아는 것을 그의 친우가 모르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지금뿐이야!’
땅을 박찼다. 틈이 보여서가 아니었다. 발이 느려지던 할렌이 마침내 괴물에게 따라 잡혔기 때문이었다. 보리스는 두 손으로 쥔 거대 도끼를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있는 힘껏 달려나갔다.
“크르르.”
할렌이 쓰러졌다. 괴물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있는 힘껏 달린 보리스가 어느새 그의 바로 뒤까지 접근해온 탓이었다.
“너!”
거칠게 끓는 목소리가 분노를 머금었다. 반드레온 모렌스는 지금껏 귀찮게 달라붙은 날파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탁!
보리스가 뛰어올랐다. 동시에 몸을 틀던 반드레온 모렌스를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슈슈슝!
무시하고 넘겼을 수도 있다. 일제히 날아든 화살이 얼굴을, 특히 눈을 향해 오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무시했을 것이다.
“크아아!”
두어 대의 화살이 그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에 반드레온 모렌스는 아주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한 순간 눈을 감았고, 화살은 감긴 그의 눈을 두들겼다.
‘아차!’
그가 통증을 뒤로 하고 눈을 부릅떴을 때. 큼직한 무언가가 그의 시야를 가렸다.
콰직!
* * *
“커흑!”
보리스가 거칠게 땅을 굴렀다. 그가 굴러가는 방향으로 가느다란 혈선이 남았다. 한참을 뒹굴다가 이름 모를 병사의 시체와 부딪쳐 멈추고서도 보리스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흐…흐윽…….”
보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찌그러지고 갈라진 갑옷을 풀어헤쳤다. 흉부를 압박하던 갑옷을 떼어내자 조금 숨쉬기가 편해졌지만, 그럼에도 보리스는 일어서지 못했다. 마치 깊게 긁어낸 것 같은 두 가닥의 상처가 그의 가슴에 새겨진 탓이었다.
“쿨럭!”
숨 쉬기가 힘들었지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보리스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죽여!”
병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괴물은 여전히 사납게 울부짖었지만 그 기세가 이전만 못했다.
당연하다. 아니. 사실 전혀 당연하지 않다. 정수리에 거대한 도끼날이 박히고서도 살아 있는 것은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괴물.’
어떻게 저 몰골을 하고서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가 있나. 설마하니 도끼날이 두개골을 다 가르지 못한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끝이다.’
괴물은 여전히 두 다리로 서서 사납게 울부짖고 있지만, 그 기세는 머리에 도끼가 박히기 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다. 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했고,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놈은 이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보리스가 생각한 것을 병사들도 생각했다. 이제 괴물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저 흉측한 수급은 먼저 목을 자르는 자의 것이었다.
“저 괴물의 숨통을 끊는 자에게 두둑한 포상을 약속하겠다!”
할렌의 외침은 안 그래도 부글부글 끓던 병사들의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와아아아아!”
제각각으로 거칠게 내는 목소리들이 감미롭게 들렸다. 보리스는 무너져가는 괴물을 보며 통쾌함보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직접 놈의 목을 자르지 못해 분하시오?”
할렌이 어느새 다가와 말했다. 그 역시 성한 몸이 아니었는데 보리스의 상태를 살피러 힘겨운 걸음을 한 것이었다.
“으…….”
“무리하지 말고 그냥 누워 있으시오.”
보리스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가슴의 통증이 그를 가로막았다. 할렌은 보리스의 가슴에 난 상처를 힐끗 보고는 처참한 몰골이 되어가는 괴물, 반드레온 모렌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쉬워 할 것도, 분해 할 것도 없소. 누가 저 놈의 목을 베든, 놈의 머리에 박힌 도끼가 공자의 솜씨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테니까.”
“아버지셨다면…….”
“음?”
“아버지셨다면, 지금 저처럼 이렇게 누워서 지켜보시는 일은 없었겠지요.”
“물론. 도끼를 들 필요도 없으셨을 거요.”
“…….”
“하지만 공자. 장군은 장군이고, 공자는 공자요. 부친의 등을 보며 따라가는 것은 좋지만, 그 하나만 바라보며 스스로 눈이 머는 일은 없도록 하시오.”
“유념하지요.”
유념하겠다. 그 말이 진심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할렌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보리스는 어리석은 청년이 아니었다. 오늘도 확인하지 않았나.
‘그늘이 크면 시원하기도, 답답하기도 한 것이지.’
혈기라고 해야 할까. 패기라고 해야 할까. 뭐가 되었든 나쁘지 않다.
“크아아아!”
반드레온 모렌스가 무릎을 꿇었다. 한 용감한 병사가 그의 목덜미에 칼을 박아 넣었고, 창을 든 병사들이 양 옆에서 옆구리를 찔렀다. 창칼이 무용하던 단단한 가죽은 이제 더 이상 갑옷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잘 가시오.’
한때는 올려다봐야만 했던 사내. 딱히 감정은 없지만 어쩐지 허한 마음이 들어, 할렌은 속으로나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 * *
군터의 창은 이제 더 이상 사납지 않았다. 전만큼, 어쩌면 전보다 더 빠르게 적을 찌르고 베는 그의 창에서 이전과 같은 격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
군터는 무장이 제법 화려한 장교를 말과 함께 베어버리고서 잠깐 멈칫했다. 숨을 고르기 위함은 아니었다. 줄곧 그의 신경을 거스르던 후방의 소란이 잠잠해진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끝난 모양이군.’
아무래도 할렌이 임무를 완수한 것 같았다.
“장군.”
“머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간다.”
전투를 길게 가져갈 생각은 없다. 길게 끌었던 이 전투는, 전쟁은 오늘 끝난다.
“주앙 칼 고르의 목을 벤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