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전장의 열기. 그것은 인간의 이지를 흐린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 중 하나인 투쟁의 본능에 불을 지펴, 두려움과 망설임을 지워버린다.
전장의 열기. 바로 그것에 취한 병사들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용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달려들 수 있었다.
허나 그런 광기와도 같은 열기 속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몇 있었다. 보리스도 그 중 하나였다.
'신중해야 한다.'
보리스는 어렸을 적부터 부친인 군터 휘하의 무관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부친에게 직접 배운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같이, 모두 기교보다는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특히 전장에 나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무던히도 반복하여 이야기했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처한 상황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한다.
물론 어느 순간, 확신이 들었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과감해지라는 가르침도 있었다. 허나 지금과 같은 경우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리라.
'저 검은 가죽에는 창칼이 통하지 않았다.'
할렌의 칼이 상흔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수십 수백 개의 칼질이 있었다. 수백 번 중에 오직 하나뿐이었다는 것이다.
'어중간한 공격은 쓸모 없다.'
제대로 힘이 실린 일격. 그것도 제대로 된 기회 하에서.
"금방이라도 달려나갈 듯하더니, 의외로군."
자밀 우슈무르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자네도 지금 내 옆에 있지 않나."
"난 항상 조심스러웠지. 그러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셈 아닌가."
"그렇기도 하군."
자밀 우슈무르의 가벼운 농담에 보리스도 굳은 표정을 풀었다. 그러자 자밀 우슈무르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틈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네."
"틈?"
"그래. 틈."
하지만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해서 주변의 모든 이들이 괴물에게 달려들고 있는 와중에 언제까지고 관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신중을 몇 번씩이나 되뇌면서도 보리스의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크아악!"
또 한 명. 용맹과 만용을 구분하지 못한 병사가 방패에 더해 팔 한쪽까지 잃어버리고 비명을 질렀다. 괴물은 그 비명이 듣기에 거슬렸는지, 연달아 발톱을 휘둘러 병사의 몸을 찢어발겼다.
'지금!'
괴물이 팔을 크게 휘둘러 병사를 공격한 그 순간. 보리스는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여느 병사들이 달려드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보리스!"
예고도 없이, 홀로 달려드는 뵈스를 향해 자밀 우슈무르가 소리쳤다. 하지만 보리스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미 그의 귀는 멀어있었고, 그의 눈은 괴물의 거대한 형체만을 담고 있었으니까.
"흐읍!"
마지막으로 땅을 박차기 전. 보리스는 깊게 들이마신 숨을 일순간 멈췄다. 그리고 등을 보인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됐다!'
보리스는 성공을 확신했다. 그가 몇 발자국을 더 뗄 때까지도 괴물은 반응하지 못했다. 정면에서 덤벼드는 병사들이 그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기회. 보리스는 자신감을 가지고, 옅은 상처가 나 있는 괴물의 왼쪽 다리 뒤쪽을 노려보았다.
할렌이 낸 상처다. 보리스는 그곳을 다시 한 번 노릴 생각이었다.
'기동력부터 앗아간다.'
지금은 상처가 옅어 멀쩡히 움직이고 있지만, 저 상처를 더 크게 후벼 팔 수 있다면 괴물은 더 이상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괴물의 가죽이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발톱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할렌은 그것을 알았고, 보리스 또한 그것을 알았다.
'한쪽 다리부터 가져가겠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을 마저 내딛는다면 목표가 칼날의 거리에 들어온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휘익!
보리스는 섬뜩한 소리가 귀에 들리기도 전에 엎드리다시피 몸을 낮췄다. 발톱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살짝 힘이 빠진 칼날이 검은 가죽을 긁었다.
푸욱!
땅을 뒹군 보리스가 곧바로 몸을 튕겼다. 그가 쓰러졌던 자리에 흉악한 발톱이 틀어박혔다.
"허억!"
숨을 멈춘 채로 몇 번씩이나 격하게 움직였다. 보리스는 억눌린 숨을 토해내며 다시 한 번 뒤로 몸을 뺐다. 괴물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병사들을 상대로 싸웠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간간이 샛노란 눈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알고 있었군.'
당했다. 그것을 깨달은 보리스는 부득 이를 갈았다. 그렇게나 신중하자고 되뇌었건만, 결국 상대에게 놀아나고 말았다.
'성과라고는 고작 생채기 하나.'
그마저도 원래 노렸던 부위에서 한 뼘이나 벗어난, 거의 의미 없는 상처에 불과하다. 그 상처를 내는 대가로 그는 괴물의 경계심을 샀다.
"좋은 시도였소."
보리스가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을 때.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온 한 사내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 목소리는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보리스를 건져 올렸다.
"천부장님."
"왼쪽 다리를 노린 것은, 놈의 발부터 잘라내겠다는 의도였겠지?"
"…그렇습니다."
할렌은 이를 가는 보리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비록 실패했다지만, 어쨌거나 그는 괴물의 몸을 베는 데 성공했다. 자신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되련만, 이 젊은 군인은 자부심은커녕, 자신에 대한 분노에 차 있었다. 다소 감정적이었지만, 할렌은 그런 보리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 장군의 아들이라면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언제고 이 혈기왕성한 공자는 부친의 뒤를 잇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 할렌 자신은 이 세상에 없을 확률이 높지만, 그의 못난 자식들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것이었다.
'자질은 충분해. 여기서 경험만 더 쌓이면…장군의 뒤를 잇기에 부족하지 않겠어.'
말 한 마디 못하던 아기였을 때부터 봐왔다. 그가 어찌 자라왔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봐온 할렌으로서도 보리스가 이렇게 훌륭한 전사가 되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저 괴물은 보이는 것과 달리 상당히 영악하오. 무엇이 귀찮은 것이고, 무엇이 위협적인 것인지 잘 알고 있지."
"그런 것 같습니다."
"본래 놈에게 있어 위협은 하나였으나, 이제 둘이 되었소."
괴물에게 제대로 된 상처를 낼 수 있는 전력. 본래는 할렌 하나였으나, 이제는 그의 말마따나 둘이었다.
"나와 공자가 앞뒤에서 놈을 상대하는 거요. 한 명이 미끼가 되어 시선을 끌고, 한 명이 뒤를 치는 거지."
할렌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기존에 그가 오른 손에 쥐고 있던 것과는 다른, 예비용 칼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리스의 앞에 던졌다.
보리스는 눈 앞의 칼을 보았다가 손에 쥔 자신을 칼에 눈길을 주었다. 칼날에 희미하게 실금이 간 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괴물의 제대로 베지 못한 탓에 칼에 손상이 간 것이었다.
'이걸 몰랐다니.'
이 상태로 괴물을 베었다면 가죽을 가르기 전에 칼날이 부러졌을 것이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했다.
할렌은 그런 보리스를 기껍게 보다가 그의 칼을 들어 올렸다.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칼은 크게 날이 상한 곳 없이 멀쩡했다.
"내가 먼저 나서서 시선을 끌어보겠소. 공자는 놈이 내게 전력을 기울일 수 없도록 뒤에서 놈의 신경을 긁어주시오."
할렌은 보리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뛰쳐나갔다. 방금 또 한 명의 병사가 처참한 시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피해도 피해지만, 이대로 괴물이 계속 설쳐댔다가는 기껏 끌어올린 사기가 다시 곤두박질 칠지도 모른다.
'어차피 시간은 이쪽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지금도 사방에서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 압도적인 수적 우위에다가 포위 진까지 갖춘 제국군이 지칠 대로 지친 소수의 적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머지 않아 적을 제압한 아군이 이곳에 합류할 터. 그렇게 되면 저 괴물도 죽은 목숨이다.
'그것을 네놈도 알고 있겠지.'
모를 리 없다. 괴물처럼 변했다지만, 샛노란 눈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괴물이 되기 전의 반드레온 모레스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거겠지.'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은 이따금씩 그를 향했다. 할렌은 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몰려드는 병사들에게 발톱을 휘두르고 있지만, 괴물은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러나라! 정면은 내가 맡겠다! 양 옆과 뒤쪽에서 쳐라!"
사실은 병사들이 아니라 보리스에게 하는 말이었다. 괴물로 변한 반드레온 모렌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 목을 가져가고 싶겠지. 훔쳐보는 것은 그만하고 덤벼보시지."
"용감하군. 아니면 어리석은 건가."
짐승처럼 변한 괴물의 입에서 인간의 말이 흘러나온다. 직접 대면하고 있지만 영 낯설었다.
"가죽이 좀 튼튼하다고 해서 너무 우쭐대지 마시오. 당신 같은 괴물들은 여럿 죽여보았으니."
"난 그것들과 다르다. 뭐, 이제 곧 알게 되겠지."
"흥!"
할렌이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칼을 들었다. 그게 신호라도 되었는지, 우두커니 서 있던 괴물이 소름 끼치는 살기를 뿌리며 달려들었다.
'무조건 피한다. 안 된다면 흘린다.'
할렌은 자신보다 배는 더 거대해 보이는 괴물을 노려보며 숨을 골랐다.
떨어져 내리는 발톱에 맞추어 칼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무지막지한 힘이 그를 찍어 누르려 할 때, 할렌은 지체 없이 몸을 굴렀다.
*
자밀 우슈무르는 괴물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천부장의 명령대로 괴물의 측면과 후면에서 공격해 들어갔지만, 별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가 저기에 끼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만약 그가 천부장과 같은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면 당연히 저 무리에 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밀 우슈무르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간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했다.
"궁수들을 모아!"
모은다고 모았지만 그 수가 몇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혼란스러운 와중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십부장의 지위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부대의 병사를 소집할 수는 없었을 테니.
"들어라! 내가 명하면 괴물의 머리, 정확히는 눈을 향해 쏘는 거다!"
저 괴물의 가죽이 강철, 아니 그에 준할 만큼 단단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가죽에 덮이지 않은 곳이라면? 설마 눈마저도 그렇게 단단할까?
'아니겠지.'
추측이었으며, 바람이기도 했다.
자밀 우슈무르는 천부장을 몰아붙이는 괴물과, 그 괴물의 뒤쪽에서 달려들고 있는 보리스를 차분하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