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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99화 (499/1,064)

499화

"크흐."

할렌이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조금은 안일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적을 앞에 두고서 이리 재고 저리 쟀단 말인가.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면 이런 무식한 기습 따위에 당할 이유가 없다.

"?!"

입에 들어간 흙을 뱉으니 그 색이 불그스름했다. 땅을 구르면서 입 안이 살짝 터진 모양이었다.

할렌은 흙이 잔뜩 들어간 투구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무슨 생각이지? 말을 잃음으로 더 불리해지는 것은 내가 아닌데.'

상대도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할렌과 마찬가지였는지, 거칠게 투구를 벗었다.

그런데 투구를 벗고 드러난 얼굴이 어쩐지 익숙했다.

'어디서 봤었지?'

바로 떠올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 할렌은 그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반드레온 모렌스."

"나를 알고 있나?"

"지금 막 생각났소."

"미안하지만 난 네가 누군지 모르겠구나. 내 기억력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닌데 말이지."

"모르는 것이 당연할 거요. 난 당신과 말 한 마디 나눈 적이 없었으니."

"그렇군."

이 상황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반드레온 모렌스에게 있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짤막한 몇 마디를 나누는 와중에도 제국군 병사들이 포위를 좁혀오고 있었으니까.

"코누다이안에 있었나?"

"그렇소."

그런데 희한하게도, 반드레온 모렌스는 태연하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적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임에도.

"초원에서 태어나 베이고르인이 되었다가, 이제는 제국인인가? 재미있는 인생이군."

"비꼬는 건가?"

"아니. 말 그대로다. 재미있어.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제국인으로 태어나 지금은 베이고르인이 되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반드레온 남작이 아니시군. 말이 참 많소."

"남작인가? 이제는 자작이라네. 뭐…말이야 많은 게 좋지 않은가? 자네에게는 말이야. 덕분에 졸개들이 다가올 시간이 벌지 않았나."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하하."

반드레온 모렌스는 빠르게 좁혀오는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못해도 백 명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그 하나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살의, 욕망, 온갖 것들이 뒤얽혀 그의 목을 탐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의 죽음을 바라니, 반드레온 모렌스는 마치 세상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좋아. 죽어주지.'

다만 혼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얌전히 죽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채앵!

그는 머리 쪽으로 날아든 화살을 쳐냈다.

'발칙하군.'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자신의 목을 가져갈 작정인가. 욕심이 너무 크다.

"니클라스가 아쉬워하겠군."

"니클라스? 그게 누구지."

"당신에게 빚이 있는 녀석이오. 당신의 목을 오랫동안 탐해온 녀석이기도 하지."

"그런 놈이 한 둘이 아니지."

한 둘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그러니 그런 놈들을 어찌 일일이 기억하겠는가.

"지위가 어떻게 되는가?"

"천부장이오."

먼저 죽인 놈들과 같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길동무로 삼을 놈은 조금 더 거물이기를 바랐건만.

'아니. 델라모리 그 놈이기를 바랐지.'

다만 그것은 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알았다. 그러니 적당히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그것을 인정했고, 뒤는 거버렉 후작에게 맡겼다.

"그래."

미련은 없다. 각오는 진작 되어 있었지만, 정말 마지막에 직면하니 속이 후련해졌다.

"나는 판데라스 리에론이다."

초원인 천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연하지만,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다.

그래도 괜찮다. 알아듣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니까. 단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아무렇지 않게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뿐.

"내 길동무가 되어주게나."

샛노란 동공이 길게 찢어졌다.

*

"반드레온 모렌스."

보리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에 자밀 우슈무르가 물었다.

"알고 있나?"

"조금."

정말 조금이었다. 이름은 꽤 자주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군중 속에 섞여 멀리서 보았던 한두 번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리스가 직접 보았던 이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신분이 높은 이였기 때문이다.

'니클라스님이 아쉬워하시겠군.'

또한, 그가 니클라스의 원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자리에 니클라스가 없는 것은 아쉽지만, 반드레온 모렌스가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목을 베어간다면 더 좋아하시겠지.'

보리스는 니클라스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한 선물로 반드레온 모렌스의 목만한 것이 있을까.

"후우."

전의를 다졌다. 보리스만이 아니라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군졸들 모두가 그랬다.

비록 한 사람이 상대였지만 가슴은 왜인지 모르게 수백, 수천의 적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뛰었다.

"가라! 적장의 목을 베는 자에게는 두둑한 포상이 있을 것이다! "

와아아아아!

할렌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튀어나갔다.

"앞서나가지 마!"

보리스가 그의 병사들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이 발을 늦추며 물었다.

"대장! 어째서?"

"늦으면 다른 놈들이 채갈 겁니다!"

분명 그래 보였다. 살기등등한 병사들의 수는 백이 넘었고, 반드레온 모렌스는 체념한 듯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의 목은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칼에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저 자는 절대로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호락호락한 자였다면 옛적에 니클라스에 의해 목이 떨어졌을 터였다. 후군의 상황이 이렇게 곤란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느낌이 영 좋지 않아.'

영문 모를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수급만 취하면 될 것 같은 적장을 앞에 둔다면 긴장보다는 흥분이 더 고개를 들어야 함에도, 조금도 흥분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보리스는 곧 알 수 있었다.

콰직!

아마도 있는 힘껏 달렸을, 그래서 가장 먼저 적장에게 달려들었던 병사가 처참하게 찢겨 나뒹굴었다.

"뭐……."

보리스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다 그랬다. 매사에 침착한 자밀 우슈무르마저도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무슨……."

병사를 후려친 것은 검이 아니라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은 인간의 손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아-!

짐승의 것과 닮았으나 묘하게 다른, 사납고 위압적인 포효가 울렸다.

"괴물……?"

평소 같았으면 멍청한 소리를 지껄인 병사를 꾸짖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보리스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저것'은 괴물이었다. 괴물이라는 말 외에 그 어떤 말로 저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

"바르바피……."

순식간에 괴물이 되어버린 반드레온 모렌스를 보며, 할렌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는 더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괴물. 그 괴물을 이제 와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틀림없다.'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바르바피들과는 외형이 조금 다르지만, 확실히 저것은 바르바피였다. 확신할 수 있다.

"괴물이 됐군."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혼자 중얼거린 말에 가까웠다.

"괴물? 흐흐흐. 틀린 말은 아니군."

"……!"

말을 할 줄 아는 바르바피. 그런 놈들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할렌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각오를 해야 할지도…….'

듣기로, 말을 할 줄 아는 놈들은 바르바피들 중에서도 특출한 놈들이라 했다.

'뭐, 척 보기에도 평범하지는 않아 보이는군.'

괴물이 된 반드레온 모렌스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바르바피들보다도 훨씬 덩치가 컸다. 특유의 갑각 같은 피부도 더 검은 빛을 띄고 있었고, 갈고리 같은 발톱도 더 크고 날카로워 보였다.

'온다.'

반드레온 모렌스, 아니 괴물이 땅을 박찼다. 거대한 몸뚱이가 거리를 좁혀오는 속도는 전력으로 달리는 말에 준할 정도로 빨랐다.

피잉!

화살들이 그의 몸을 때렸지만 갑옷 같은 피부를 뚫지 못하고 힘 없이 튕겨나갔다.

할렌이 이를 악 물고 칼을 들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샛노란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콰앙!

칼과 발톱이 부딪쳤다. 할렌의 몸이 붕 떠서 뒤로 밀려났다. 힘에서 밀린 것도 있었지만, 할렌의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혼자서 맞서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했기에 어떻게든 거리를 벌릴 심산이었다.

"커헉!"

하지만 괴물의 힘은 할렌의 예상 이상이었다. 충돌하는 순간 숨이 멎었다. 멎은 숨이 트인 것은 바닥에 몸이 부딪치면서였다.

'이건…어지간한 바르바피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다.'

떨림을 멈추지 않는 칼을 땅에 박으며 몸을 일으켰다. 괴물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화살을 쏘고 창을 찌르며 막아서고 있었지만, 별로 효용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콰직!

방패가 갈라지고, 병사의 몸이 힘 없이 나가떨어졌다. 괴물이 발톱을 휘두른 틈을 노려 여러 개의 창이 괴물의 몸을 찔렀지만 단단한 가죽을 뚫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으으……."

아무리 정예라 할지라도 사람인 이상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창칼이 통하지 않으며, 한 번 팔을 휘둘러 사람의 몸을 찢어버리는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괴물의 발톱과 이빨에 십여 명이 희생당한 후부터, 괴물을 막아서던 병사들이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그때 할렌이 거세게 일갈하며 앞으로 나섰다. 병사들을 밀치며 달려 나온 그는, 몸을 낮춘 채로 괴물의 뒤에서 달려들었다.

서걱!

괴물이 뒤늦게 반응하여 발톱을 휘둘렀지만, 할렌의 몸은 이미 괴물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간 후였다. 아주 가늘지만 섬뜩한 소리와 함께.

크아아아!

분노에 찬 괴물의 포효. 그러나 병사들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보았기 때문이다. 부러질 듯 떨리는 칼에 맺힌 피와, 괴물의 다리 한쪽에 난 작은 상처를.

"놈의 가죽은 강철이 아니다! 단지 조금 질길 뿐이야!"

분노한 괴물을 앞에 두고 외친 할렌의 한 마디는 병사들의 용기와 전의를 더욱 끌어올렸다.

와아아아-!

병사들이 다시 한 번, 함성을 지르며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고.

"후욱…후욱……."

그 중에는 보리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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