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498화 (498/1,064)

498화

"장군! 후방에 적의 별동대가 출현해다 합니다!"

검은 창을 휘둘러 적병의 몸을 반 토막 낸 순간. 군터는 뒤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순간 멈칫했다.

자잘한 보고라면 그에게까지 들어오지는 않는다.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후군에서 전령이 왔다면, 그만큼 후방에 나타났다는 적의 별동대가 위협적이라는 뜻이다.

"더크만은?"

"적의 기세가 위협적이라 가벼이 여길 수 없으니, 진군을 멈추고 적과 맞서기를 청하셨습니다."

삼군이 적과 맞서며 전진을 거듭하고 있는 와중에 후군 역시 보조를 맞춰 착실히 뒤따르고 있었다. 지원이 필요한 쪽에 지원군을 보내고, 지금처럼 후방으로 돌아오는 적에 맞서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런 후군이 멈춰 서기를 청한다. 이는 발을 멈추고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대가 강하다는 것.

"아직도 그만한 저력이 남아 있었던가."

할렌이 중얼거렸다. 군터의 마음도 그와 별 다르지 않았다.

"허한다."

별 걱정은 없었다. 후군의 전력이 비록 예비대의 성격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소수의 별동대를 어찌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옛!"

그렇게 후군을 남겨두고 다시 진군을 이어갔다. 적의 저항은 이제 슬슬 조직적으로 바뀌고 있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 베이고르군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군! 왕의 깃발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쥐새끼가 어디로 숨은 것일까요?"

할렌이 조소하며 물었다. 왕이라는 자가 꼴사납게 깃발까지 내리고 몸을 숨기는 것이 우습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군터는 주앙 칼 고르의 그런 선택을 이해했다.

뒤가 없다고 하나, 왕이 잡히면 그것으로 전투는 물론이고 이 전쟁마저도 끝이 난다.

"찾아라."

"옛."

깃발을 내렸다고 해도 여전히 이 전장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왕이니만큼 친위병력에 둘러싸여 있을 테지만, 그것이 오히려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병력이 밀집해 있는 곳을 중점적으로 들이치면 되니까 말이다.

"장군!"

할렌이 막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이려던 차에, 뒤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군터는 저 황망한 얼굴의 병사가 후군 쪽에서 왔음을 짐작했다.

"장군!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더, 더크만 천부장이…적장에게……!"

숨이 차서인지, 마음이 끓어서인지 병사의 말은 두서가 없는 데다 목소리도 군데군데 끊겼다. 허나 그럼에도 알아듣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 전……."

끝까지 보고를 마치려던 병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목을 뒤로 젖힌 군터에게서, 끔찍한 무언가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막 떠나려던 할렌이 외치지 않았더라면, 안색이 창백해진 병사는 그대로 졸도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장군!"

"……."

할렌의 외침에, 하늘을 바라보던 군터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할렌의 말은 군터를 이성적이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훅 올라왔던 감정의 찌꺼기는 가라앉은 숨결에 조금씩 흘러나갔다.

'더크만의 죽음으로 적이 기세를 올렸겠지만, 후군이 그대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터.'

후방의 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더크만이 죽었다 해도 다른 천부장들이 더 있다. 그들이 제 몫을 해줬다면 적을 물리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들까지도 당했다면.'

별로 떠올리고 싶은 가정은 아니지만, 더크만이 당해버린 순간부터 적의 전력은 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으리라.

"장군! 저를 보내주십시오!"

할렌은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더크만의 복수를 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평소 더크만과 교분이 깊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파헨델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있기에 동료의식 정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죽음에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좋다."

군터는 의욕을 보이는 할렌에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은 그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후방의 잔챙이를 상대하자고 선봉이 방향을 틀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면 다른 이를 보내야 할 터인데, 보낼 수 있는 이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이는 할렌이었다.

"믿고 맡기겠다."

"곧 수급을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할렌이 병사들과 함께 후방으로 향했다. 그가 이끌고 가는 병사들 중에는 보리스도 있었다.

"……."

군터는 병사들 틈에 끼어 움직이는 보리스를 보았다. 보리스는 그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앞서 움직이는 할렌의 뒤통수를 보며 달리고 있었다. 비장하게 굳은 표정하며 지저분해진 몰골까지. 겉모습만 보면 이제는 청년보다는 군인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했다.

*

"각하! 적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직전까지 아군의 몇 배나 되는 적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만약 적장의 목을 베지 못했더라면 끝내 적에게 포위되어 이곳을 무덤자리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곧 다시 정비하여 몰려들 것이다. 그 동안, 잠시라도 병사들을 쉬게 해라."

"옛!"

반드레온 모렌스는 고개를 돌리며 남은 병사들을 헤아렸다. 대충 셈을 해도 결코 삼백이 넘어 보이지 않았다. 비록 적장의 목을 셋이나 베었고, 나름 승리를 거뒀다면 거뒀다 할 수 있지만…그 과정에서 입은 피해가 실로 컸다. 그의 손발이나 다름 없는 병사들을 대부분 잃었으니까 말이다.

'아직. 아직이다.'

적의 후군을 묶어놨다. 거기에 더해 장수 셋의 목을 베었다. 이 정도만 해도 대공이라 할 수 있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 정도만으로는 전세를 뒤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앞서 나가 있는 삼군(三軍)의 진격을 멈춰 세워야만 한다.'

힘든 일이다. 아니,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고작 삼백도 안 되는 병력으로 어찌 수만의 적을 멈춰 세운단 말인가.

하지만 멈춰 세우는 것이 진정 불가능하다면, 그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춰야만 한다. 최대한 본군에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지금쯤이면 소식을 접했겠지.'

아마도 지원군을 보냈을 것이다. 그들이 당도하면 몸을 빼기는 더더욱 힘들어질 터. 정말로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 없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몸.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미련은 없다. 다만 형제의 빚을 갚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

'거버렉 후작. 뒤는 맡기겠소.'

반드레온 모렌스는 지금쯤 왕의 옆에서 마지막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그를 떠올렸다.

믿을 수 있는 자다. 자신과는 다른 의미에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뒷일을 믿고 맡길 수 있었으며, 죽을 자리에 거리낌 없이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각하! 적이……!"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던 중. 수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반드레온 모렌스는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왔군."

물러났던 적이 다시 그들을 둘러싸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전보다 수가 많아 보이며, 무엇보다 기세가 오른 것으로 보아 지원군이 당도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얼마나 왔느냐.'

그는 적의 지원군이 되도록 많이 왔기를 원했다. 그럴수록 그와 그의 병사들이 살 수 있는 확률은 줄어들 테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으니.

'직접 왔으면 좋겠지만, 그러지는 않았겠지.'

적의 대장. 적포 장군이라 했던가.

'남작령의 일개 기사에 불과했던 놈이…출세했군.'

군터. 그 이름을 기억한다. 얼굴 역시 잊지 않았다. 사실 잊는 것이 더 어려운 얼굴이지만, 반드레온 모렌스의 기억에 남은 것은 그 험악한 얼굴이나 커다란 체구가 아니라 그가 풍기던 위압적인 기세였다.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거물이 될 줄이야.'

또한 그렇게 거물이 된 그를, 이렇게 전장에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인생이란 참으로 재미있군.'

그때 그가 바라보던 적은 군터가 아니라 막시밀리언 코누디스였다. 군터는 정적 휘하의 일개 기사에 불과했다.

"각하!"

"동요하지 마라."

직접 적장의 목을 셋이나 베었다. 호위 병력을 수십이나 둔 그들의 목을 베는 과정에서 반드레온 모렌스 역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쓰러져서 꼼짝도 못할 상처요 피로였으나, 그는 내색도 하지 않고 견뎌냈다.

"저곳이다."

그는 검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사방을 점하고 몰려오는 적들 중에서도 유난히 병력이 단단히 뭉쳐 있는 것 같은 곳이었다.

"단번에 돌파하여 빠져나간다."

"오오!"

장교며 병사들 할 것 없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마력이 있다. 연이은 고된 전투로 지쳐 있던 병사들이 쥐어짜내듯 함성을 내지르고 반드레온 모렌스의 뒤를 따랐다.

"돌격하라!"

어느 쪽이 포위된 쪽인지 모를 정도로, 반드레온 모렌스와 그의 병사들은 기세 좋게 달려나갔다.

사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매우 높은 확률로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와아아아-!

그럼에도 그들이 두려움 없이 싸웠다. 그들을 이끄는 반드레온 모렌스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이웃.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이번 전쟁으로 잃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가슴과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복수심뿐이었다.

채앵!

가장 앞서 달려간 반드레온 모렌스. 그에 맞서 제국군에서도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뛰쳐나왔다. 투구로 대부분 가려진 얼굴이었으나 반드레온 모렌스는 얼핏 드러난 피부며 눈을 통해 그가 '초원인'임을 알아차렸다.

채앵!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교묘하게 말을 움직이는 기마술 또한 초원인임을 감안해도 상당한 수준.

'버거운 상대로군.'

몸이 정상이었다면 당해내지 못할 것 없겠지만, 지금의 몸 상태로는 쓰러뜨리기는커녕 버티는 것이 고작일 것 같았다.

*

채앵!

'상당하군!'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상당한 수준을 넘어 할렌이 상대해 본 적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강했다.

상대의 몸 상태는 척 보기에도 엉망인 것 같았다. 그런 상대와 동수를 이루고 있다니. 나름대로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할렌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상황이었다.

'허나, 죽는 것은 너다.'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제국군이었다.

'원망하지는 마라. 이곳은 전장이니.'

할렌은 거칠게 몰아붙이는 상대의 공격을 차분히 받아냈다. 적장의 말이 달리지 못하도록 그의 말로 하여금 비스듬히 진로를 가로막는 것은 덤이었다.

"약삭빠른 놈!"

상대가 외쳤다. 거칠기는 했으나, 노기는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

그 순간. 왠지 모를 싸한 느낌이 들었다.

할렌이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는 순간. 번개처럼 뛰어오른 상대가 그를 덮쳤다.

"크윽!"

말에서 떨어져 한 덩이가 된 두 사람이 경사진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