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인간, 아니 모든 생명의 육신은 당연히 생기를 머금는다. 그러니 어찌 보면 생기는 생명의 증명이라 볼 수도 있다. 모든 생명이 크고 작은 생기의 덩어리라 한다면, 생명이 사기에 취약한 이유 역시 설명이 될 것이다.
"아아악!"
최대한 끌어당기고 있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기는 땅 위의 모든 생명들을 시들게 했다. 풀도, 말도, 사람도. 사기에 닿은 것들은 모두 힘없이 스러져갔다. 누구의 말마따나, 그것은 '저주'였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무너뜨리는.
그러나 그 '저주'는 군터에게만은 예외였다.
한 번의 죽음을 겪고, 칸젤과의 합일을 이룬 후부터 사기에 대한 군터의 통제력은 이전과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또한 통제력이 강해진 만큼 내성 역시 강해졌는데, 이 내성이라 함은 육신의 내성을 말함이었다.
그 내성은 '저주'의 영향에서 그를 자유로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사실 내성이라는 말은 완벽하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군터의 육신은 더 이상 사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이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본질에 연관된 본능이기 때문이다.
[흐으…….]
군터는 점점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감각이 넓게 확장해가는 것을 느꼈다. 얼핏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이 모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은 점점 차갑게 식어간다. 반면 그 안에 깃든 영은 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더 거대해져 간다거추장스럽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 피, 이 살덩이가 자신 그 자체라 여겼었다. 육신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이라 여겼었다. 육신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지금. 한때 자기 자신이라 여겼던 육신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렇다. 이것은 감옥. 감옥이다.
감옥은 구속. 묶여 있고 갇혀 있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그것은 괴로움이다.
'벗어던진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답답함에서 해방되기 위해 어찌 해야 하는지도.
'한다.'
육신 안에 깃든, 갇혀 있는 그의 정수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더더욱 거대해지고, 더더욱 강해졌다. 이제 곧 오래된 감옥이 깨지고, 그는 자유로워지리라.
'허나, 괜찮은 건가?'
잔뜩 취했던 술에서 한 순간 깨어난 것처럼, 갑작스레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 머리에 번개가 친 것 같았다.
마지막 한 걸음. 내디디면 절대 돌이킬 수 없다.
'나는.'
한 걸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리라. 그것은 어쩌면 진보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게 진정 자신의 바람일까? 그는, 군터는 고민했다.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 허나 어쩐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든 것. 지금 그의, 군터라는 인간의 삶이 사라질 것이다. 그의 가족, 수하들,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것을 바라는가?
'아니.'
애착? 미련?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보리스가 보다 성장하여 훌륭한 사내가 되는 것을 보고 싶었고, 실비아가 아리따운 숙녀로 자라난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백발이 된 벨리사의 주름진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난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감정적인 때가 있었던가. 군터는 더 없이 절박했다. 수 년, 수십 년 동안 느낄 감정들이 한 번에 몰아치는 듯했다. 그것은 간절함, 절박함이었다. 마음을 확인한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멈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인간이고 싶다.
'나는 인간이다.'
두근!
멎어가던 심장이 다시 맥동했다. 이전처럼 힘차게 뛰지는 않았다. 조금씩, 희미하게.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정도였다.
눈처럼 희게 변했던 피부가 조금씩 불그스름한 빛을 찾았다. 부서질 것처럼 푸석푸석해졌던 머리에도 다시 윤기가 흘렀다.
"후우."
군터는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의 눈은 계속 뜨여 있었으니. 흐려졌던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는 정도가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군! 장군!"
군터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할렌이 붉어진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장군! 정신 차리십시오!"
할렌은 군터가 정체 모를 '저주'에 휩쓸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절박한 표정을 할 이유가 없으니.
"난 괜찮다."
할렌의 외침이 그의 의식을 보다 빠르게 깨웠다.
군터는 그의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기감의 확장 속도는 이전에 비해 한층 더 빨라졌다. 기운의 운용이 그만큼 더 능숙해졌다는 의미이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
군터는 곧 전장을 뒤덮었던 사기가 거의 사라졌음을 느꼈다. 사라진 막대한 양의 사기는 지금 그의 영과 심장의 고동에 맞추어 들끓고 있었다.
"할렌."
"예!"
"병사들을 수습해라. 전투를 이어간다."
제국군이고 베이고르군이고 가릴 것 없이, 모든 병사들이 아직 '저주'의 두려움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이때 빠르게 군을 정비하여 전투를 이어간다면 다시금 승기를 쥘 수 있으리라.
"집결하라!"
"저주 따위는 없다! 간악한 사교 놈들의 술법이었을 뿐이다! 놈들의 술법은 파해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정예와 오합지졸의 차이는 기본적인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국군이 장교들의 호령에 이를 악 물고 다시 무기를 쥐고 선 반면, 베이고르군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밀어붙여라!"
와아아아아-!
느닷없는 재앙에 잠시 멈췄던 전투가 제국군의 함성과 함께 재개됐다. 비록 그들의 사기와 전의는 처음에 비할 바 없이 꺾여 있었지만, 베이고르군은 그 이상이었다. 다시 시작된 전투는 '저주'가 덮치기 전보다 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병사들의 피해는?"
"송구합니다. 아직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좌익을 맡고 있는 델라모리는 부관의 자신 없는 대답에 혀를 찼다. 사실 그도 딱히 기대를 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술법이다.'
적이 무언가를 할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무지막지한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무지막지함도 무지막지함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도무지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멍청하게 눈 뜨고 당하는 것뿐이었다.
'꼼짝 없이 파국인가 했더니, 그래도 어떻게든 해냈군.'
그야말로 '저주', 혹은 재앙과 같았던 사술을 어떻게 파해 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숨겨둔 한 수마저 깨졌으니, 이제 어쩔 것이냐.'
그는 신속하게 군사들을 정비한 후 다시금 공격을 개시했다. 저항이 없지 않았으나, 그 저항은 산발적인 것에 불과했다. 베이고르군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설마 이대로 끝인가?'
쉬워도 너무 쉬어서 웃음도 나지 않았다.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적은 그 사술 하나만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하는 적을 보며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장군!"
"음?"
수하의 다급한 외침에 델라모리는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적이 나타났습니다! 좌측에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적?"
델라모리는 좌측에서 적이 나타났다는 것보다 그의 수하가 '새로운 적'이라 말한 것이 더 신경이 쓰였다. '새로운'이라는 말을 썼다면, 좌측에서 나타난 적이 지금까지 상대하던 적들과는 다른 적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밀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속히 지원군을!"
"밀리고 있다고?"
델라모리가 반문했다. 저 오합지졸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적이 측면 기습을 가해왔다고 해도.
'평범한 놈들이 아닌 모양이군.'
델라모리는 지원군을 보내는 한편, 군사들을 더 밀집시켰다.
'어차피 내 역할은 중군의 보조. 이쪽이 주공이 될 필요는 없지.'
측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까지 나타난 마당이다.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전세는 기울었으니, 이대로 굳히기만 해도 승리는 이미 손 안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
'그래도…어떤 놈인지 궁금하기는 하군.'
그가 슬쩍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서는 지금쯤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
"각하! 적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퇴각이 아니다."
"예?"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더 단단히 뭉치기 위해서."
반드레온 모렌스는 당황한 것 같은 수하를 무시했다. 그리고 물러서는 적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적을 앞에 두고 물러서면서도 여유가 있다. 여기서 더 들어갔다가는 이득을 취하기 어려워.'
이득은커녕, 크게 피해나 입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았다.
"허면 각하. 이제 어찌 해야 할지."
"계속 간다."
"옛?"
반드레온 모렌스는 지금의 상황이 한탄스러웠다.
이곳에 오기 전. 서부에서 벌였던 치열했던 전투들. 그 힘겨운 싸움에서 그는 그를 보좌하던 유능한 수하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덕분에 지금 그의 옆에 있는 것은 간단한 명령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부족한 수하들뿐이었다.
'푸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없는 것을 찾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는 재차 명령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적의 후군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
적은 지금 대대적으로 아군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삼군으로 나뉜 적의 기세가 너무도 거칠고 강하여 지금의 아군으로서는 막아서기가 쉽지 않았다.
'이빨을 들이미는 맹수를 전면에서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러니 뒤를 잡는다. 꼬리를 당긴다면, 그 어떤 맹수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신속하게 움직여라!"
반드레온 모렌스의 명에, 병사들이 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십여 번이 넘는 고된 전투로 단련된 최정예답게, 명령에 따르는 그들의 움직임은 기민하기 그지없었다.
*
"…장군."
잠시 멈춰 서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군터는 그의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진작에 알아차렸다. 그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장군께서는…신인(神人)이십니까?"
신인이라. 군터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허나 어떤 의미일지 대충 짐작은 됐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
호닝거는 말이 없었다. 어정쩡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슬쩍 눈길을 돌렸을 때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경외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