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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496화 (496/1,064)

496화

와아아아-!

이틀 동안을 쉬어서 그런지, 병사들의 힘 있는 목소리는 이틀 전과 별 다르지 않았다. 구릉을 넘어 물결처럼 몰려가는 군대의 한 가운데에는 군터가 있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저런 분이신가?"

델라모리가 옆의 시어문드에게 물었다.

"예. 본래 저런 분이십니다."

"총대장이 선봉에 선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데 말이지."

"그 연유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날카로운 칼을 칼집에 재워두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하시지요."

"가장 날카로운 칼이라……. 그렇다 해도, 그 칼이 부러지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는 것을 안다면 저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말이지."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시기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절대라는 말은 없어."

"저도 그리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리 생각하고 있지만, 음…솔직히 장군께서 쓰러지실 것 같지는 않군요."

"대단한 믿음이군."

"저는 제가 직접 본 것만을 믿습니다."

"오. 그런가."

델라모리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우려하는 만큼 기대도 하고 있었다. 그는 군터에 대해 알아보기 전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셀마 성에서 벌어졌던 룬차이와의 일전.

전신이라고도 불리는 전설적인 군주를 상대로 결국 이겨내고 물러나게 만든 사내. 물론 주장은 세레온 우슈무르였다지만 그는 죽었으니,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군터의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는 룬차이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녹포장군 가론드까지 참하지 않았던가.

그 무명은 제국 전역에 퍼졌다. 특히 북부에서는 알 만한 이들은 다 한 번씩은 들어본 이름이 되었으니, 델라모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무운을 빕니다 장군."

"자네 역시."

델라모리와 시어문드가 각기 군사를 이끌고 좌우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군터가 이끄는 선봉군은 베이고르군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

'움직이지 않는군.'

이제 곧 교전이 일어날 정도로 가까이 왔는데도 베이고르군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디로 날아가는지 쏘는 자신들도 모를 화살을 아무렇게나 쏘아대고 있을 뿐.

저 너머에 포진해 있는 군대가 병사들부터 장교, 장군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머저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저들은 지금 저들의 계획대로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다.

'최대한 끌어들이려는 건가.'

발 밑에서 느껴지는, 연기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죽음의 기운은 한 걸음을 더 내디딜 때마다 진해졌다. 아마 본격적으로 적과 맞닥뜨려 교전을 벌일 즈음이면 지금보다 배는 더 심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기어올라오는 놈들을 모조리 찔러라!"

제법 가파른 오르막. 고지를 점한 베이고르군이 창병과 방패병을 내세웠다. 그들의 진형은 제법 견고해 보였다. 올라오는 족족 쓰러뜨리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흡!"

울퉁불퉁하고 곳곳에 경사가 진 이곳은 확실히 기병이 활약하기가 힘든, 아니 거의 불가능한 지형이었다. 당장 기병의 최대 장점이자 존재 이유인 기동력이 험한 지형으로 인해 상실되어버리니까 말이다.

허나 일반적인 군마가 아닌, 장군이 타는 장군마 정도가 되면 조금은 그런 악조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하다.

히히히힝!

군터가 적당히 배를 걷어차자 그의 군마가 콧김을 뿜으며 힘차게 내달렸다. 보통의 말은 힘겹게 올라야 할 경사를 평지 내달리듯 달려 올라간 군마는 경사가 줄어드는 지점에 이르러 높이 뛰어오르기까지 했다.

"어엇?!"

당황한 적병들의 목소리가 군터의 귀를 간질였다. 그들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올라온,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떠오른 적을 보며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촤악!

군터는 말 아래에 뭉쳐 있는 적을 향해 길게 늘여 잡은 창을 휘둘렀다.

바람이 갈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검은 호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창, 방패, 사람…창 날에 걸렸다 하면 예외는 없었다.

"허억!"

피가 솟아오르는 땅에 거대한 인마(人馬)가 뚝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 번 검은 선이 이리저리 그어졌다. 어김없이 잘린 목과 창 등이 두둥실 떠올랐다.

"마, 막아!"

발작적으로 외치지만, 어떻게 막으라는 것인가. 군터는 홀로 병사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를 둘러싼 병사들은 맹수 앞의 쥐새끼들마냥 바짝 굳어 있었다. 반면 수십 명에 둘러싸인 군터는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로우니, 서로의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닌가 싶었다.

"뭣들 하는 것이야! 한 놈이다! 고작 한……."

히히힝!

군터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장교를 향해 말을 몰았다. 막아선, 아니 중간에 끼어 있던 병사들의 몸뚱이가 반으로 잘려나갔다. 그리고 연달아, 미처 몸을 빼지도 못하고 있던 베이고르군 장교의 목에 거무튀튀한 창 끝이 파고들었다.

푸욱!

버둥거리는 몸뚱이가 창에 매달려 위로 떠올랐다. 군터는 고통과 공포로 얼룩진 눈이 빠르게 빛을 잃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커, 커흑!"

사실 이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행위는 그저 시간을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빠르게 목을 치고 연달아 주변의 적들을 베는 것이, 보통이라면 더 효율적인 싸움이다.

허나 지금. 군터는 의도적으로 '비효율'을 택했다.

"으…아아……."

적에게 공포를 심어 위축시키기 위함이다.

와아아아아-!

압도적인 모습으로써 아군을 고무시키기 위함이다.

"장군을 따르라!"

일찍부터 그를 따랐던, 이제는 다들 장교가 된 고참병들은 익숙하게 군터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이끄는 병사들 역시 전염병 같은 열기에 취해 열정적으로 경사진 땅을 올랐다.

"아아악!"

적의 진형은 이미 무너졌다. 더불어 제국군의 사기는 하늘에, 베이고르군의 사기는 땅에 닿았으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밀어붙여라! 허수아비 같은 놈들일 뿐이다!"

군터가 이끄는 선봉대가 적진을 깊게 찔러 들어가니 넓게 펼쳐 움직이던 다른 쪽의 병사들도 탄력을 받았다. 베이고르군의 진형은 곳곳에서 무너졌고, 제국군은 이틀 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기세를 올리며 승기를 쥐었다.

"장군! 왕의 깃발이 보입니다!"

할렌이 들떠서 외쳤다. 베이고르 소속으로 지낸 기간이 길어서일까, 무의식적으로 주앙 칼 고르를 '왕'이라 칭했으나 할렌은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승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면서 잔뜩 흥분해 있던 탓이다.

그런 할렌에게 군터가 버럭 외쳤다.

"들뜨지 마라! 이제 곧이다!"

"예? 그게 무슨 말씀……."

군터의 눈에 비친 전장은 하나의 거대한 화로와 같았다. 음습한 사기가 바람을 맞은 불처럼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곧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짐작, 아니 확신했다.

'뭘 하려는 거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사교도들이 준비했음에 틀림 없는, 음험한 사술이라 더욱 그랬다. 조심하려고 해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니, 함정이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대앵-!

마음이 불편해지던 순간. 군터는 종이 울리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가로막는 적병 하나를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절단해버림과 동시에 군터는 고개를 돌렸다.

대앵-! 대앵-!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찾아 고개를 돌린 것이었으나, 헛수고였다. 또 다른 종소리가 연달아, 사방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일 것 같은 무수한 종소리들의 향연에 군터는 인상을 찡그렸다.

"장군.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군터가 멈춰 서자 할렌이 물었다. 그러나 정작 묻고 싶은 것은 군터였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소리 말입니까? 무슨 소리를 말씀하시는지……."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군터는 눈만 끔뻑거리는 할렌을 무시하고 여전히 시끄럽게 울려대는 종소리들에 집중했다.

'온다.'

시끄러운 종소리들이 신호였던 것일까. 불처럼 이글거리던 사기가 땅 위로 뻗어 나왔다. 눈으로는 볼 수 없었으나 기감으로 그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땅 밑에서 기어 올라온다. 그 거대한 흐름은 위협적이었으며, 동시에 친숙했다.

"뭐, 뭐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종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비명을 지르는 병사들이 나타났다.

발을 부여잡는 이들도 있었고, 팔이나 몸을 부여잡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러대다가 끝내 쓰러져버린다는 점이었다.

"아아악!"

"사, 살려줘!"

몸이 썩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몸의 자그마한 한 부분에서부터 시작해, 오래지 않아 전신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이게…뭐야."

"저주야! 신께서 저주를 내리신 거라고!"

절규하는 이들의 말은 평소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일축했을 테지만, 지금만큼은 설득력을 가졌다. 왜냐하면 이 '저주'가 제국군만을 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이고르군 역시 저주에 몸부림치며 쓰러져갔다.

저주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제국군도 베이고르군도, 병사도 장교도, 구분 없이 덮쳤다.

"장군!"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었다. 영문도 모르고 쓰러져가는 병사들을 보며 할렌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는 어찌 해야 하냐는 듯 군터를 바라보았다.

"……."

군터는 이를 바득 갈았다. 이것은 그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이런 식의 술법이라니. 아니, 이것이 술법이기는 한 걸까.

'이건 그저…땅 아래 뭉쳐 놓았던 사기를 한 번에 터뜨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병사들의 몸이 썩어가는 것도, 어떤 술법적인 작용이라기보다는 사기에 의해 생기를 잃으며 몸이 죽음에 물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한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현상에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병사들이 다 죽어나가거나, 땅 밑에 뭉쳐 있던 사기가 모두 고갈 되기 전까지는…….

'아니. 아니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군터의 머리를 스쳤다.

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욱!

군터가 창을 찔렀다. 적이 아닌, 땅을 향해서였다.

검은 창 날 전체가 땅을 파고들었다. 군터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여전히 역동하고 있는 사기를 감지하고, 그것을 끌어당겼다. 땅 깊숙이 묻힌 항아리들이 그런 것처럼, 군터는 그의 의지로써 만연한 사기를 끌어당겼다.

두근!

막대한 사기가 꿀에 이끌리는 벌처럼 모여들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창 끝에 닿았다가, 창신을 타고 올라와 군터에게로 흘러왔다. 한 곳에 뭉쳐놓는 것이 가장 좋았겠으나, 그러기에는 전장을 뒤덮은 사기가 너무나 막대했다. 그런 거대한 힘을 그저 한 점에 뭉쳐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군터는 그 힘을 그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런 시도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시도했다 한들 시도함과 동시에 한 줌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군터는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고작 법구 따위가 한 일을 자신이 못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비록 그 '법구 따위'가 하나가 아니라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이 쓰였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흐으으…….]

그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내쉬는 숨결 속에 죽음이 묻어났다. 눈은 본래의 색을 잃었고, 그의 몸 위로 사기가 흐릿하게 일렁였다.

두근!

"자, 장군?"

할렌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몇 걸음씩이나 뒤로 물러나고서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뒷걸음을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모든 신경은, 형언할 수조차 없는 불길함을 풍기는 군터에게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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