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장군. 어째서……."
델라모리가 군터를 찾아왔다. 그는 군터의 퇴각 명령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살짝 인상까지 찌푸렸다.
"본래의 계획대로가 아닌가."
"그것을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기다려라."
"……."
잠시 후. 군터는 그의 막사에 모인 수하 군관들을 보며 입을 떼었다.
"납득하지 못한 것 같은 얼굴들이 몇 보이는군."
"커흠. 솔직히 말씀 드리면 그렇습니다. 승기가 거의 넘어온 상황이었는데, 거기서 굳이 퇴각을 명하신 것이…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드리안이었다. 워낙 거침 없는 성격인 그였기에 대표 격으로 나서긴 했으나, 그와 비슷한 표정을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것 때문이었다."
군터의 눈짓을 받은 호닝거가 앞으로 나서더니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 놓았다.
"이게 뭡니까? 항아리?"
그것의 외형은 항아리였다. 크기만 보면 작은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항아리. 그러나 재질이 금속인지, 호닝거는 그것을 두 손으로 힘겹게 옮겼다.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겠나?"
"뭔지는 몰라도…평범한 물건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이 자리에는 뛰어난 무인들이 여럿 있었다. 허나 그런 이들조차도 이 항아리에서 풍기는 음습한 기운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항아리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은밀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기감이 그들의 무공 만큼 뛰어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솜씨 좋은 무인이라고 해서 기감이 발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긴, 그들을 탓할 것도 아니다. 호닝거를 비롯한 술사들조차도 전투가 최고조로 치열해졌을 때에야 간신히 눈치를 챘을 정도이니 무인인 그들이 이것의 존재를 눈치 채는 것은 힘들었으리라.
"호닝거."
"예."
군터의 눈짓을 받은 호닝거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이 물건은 전장의 밑에 묻혀 있던 것입니다."
이런 항아리들은 전장의 곳곳에 묻혀 있었다. 제법 깊게 묻혀 있었기에 본래라면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닝거조차도 땅 밑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른다는 것 정도만 알아차렸을 뿐, 그 기운이 뭉쳐있는 지점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오직 군터만이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고, 그의 특출한 기감 덕분에 그들은 땅 밑에 숨어 있던 이 물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것은 법구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법구와는 조금 다르지만, 술법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법구라 해도 틀리지 않지요."
"보아하니 상당히 골치 아픈 이야기가 되겠군."
아드리안이 툴툴댔다. 그에게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특히 술법과 관련한 것들은 모두 골치 아픈 것들이었다.
비단 아드리안만이 아니었다. 술법이니 법구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만 끔뻑거리거나 인상을 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닝거는 굳은 얼굴을 하고서 설명을 이어갔다.
"전투가 거듭되어 전사자가 늘어날수록 전장에는 사기가 쌓이지요. 이 물건에는 그런 사기들을 끌어당겨 저장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기를 끌어당겨 저장한다?"
델라모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호닝거의 설명을 무리 없이 따라가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모은 기를 이용해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유 없이 이런 물건을 수십, 수백 개 씩이나 땅에 묻어두었을 리는 없겠지요."
"수백?"
"이 물건은 전장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 또한 군터의 기감을 통해 알아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장군께서 군을 물리신 것은……."
"전투가 길게 이어질수록 땅 밑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커져갔다.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가 되니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으음."
"아는 이들도 있겠고 잘 모르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 땅에는 사교의 무리가 적잖이 둥지를 틀고 있다. 주앙 칼 고르는 아국이 금지한 여러 사교의 무리를 허용했지. 그 대가로 그들은 사교의 힘을 얻었다. 그들은 일찍이 있었던 전쟁에서도 크게 활약을 했었지.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개전 초기부터 항상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며 주의를 기울였었다. 허나 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바로 이곳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항아리가 사교의 무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난 그들과 싸워본 적이 있다. 그때 느꼈던 음습한 기운이 이 항아리에서도 똑같이 느껴진다."
"……."
"그들의 사술은 기괴하기 짝이 없어, 일반적인 술법을 생각하고 대했다가는 크게 다치는 수가 있다."
"허면 장군. 어찌 하실 요량이십니까? 시간을 들여서 땅 밑에 묻혀 있는 항아리들을 모두 제거하려 하십니까?"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묻혀 있는 것들의 수가 너무 많을뿐더러, 그 일부는 적진에 가까이에 붙어 있다. 항아리들을 제거한다면 아군 진영 가까이에 있는 일부만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군."
"그럼 어찌 해야 합니까?"
속 타는 질문에 대해 답을 준 이는 호닝거였다.
"기다리면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델라모리의 물음에 호닝거는 거무튀튀한 항아리의 표면을 쓸었다.
항아리의 모양은 독특했다. 외관만 대충 보면 일반적인 항아리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표면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들을 보면 그것이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항아리에는 열고 닫을 수 있는 뚜껑이 없었다. 즉, 안에 내용물을 넣고 뺄 수가 없다는 뜻이다. 말이 항아리지, 실상 이 물건은 항아리의 모양을 한 쇳덩이였다.
"이 물건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기능을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기라는 것은 본래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든 인위적으로 끌어 모았다 해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리면 된다 한 거로군."
데라모리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아직 납득하지 못한 이도 있었다.
"허나 장군. 얼마나 기다려야 그 기운이 다 흩어지는 것입니까? 또, 그렇게 기다려서 해결을 한다 한들 다시 전투를 치르면 또 한 번 같은 일을 되풀이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전투로 양측의 병력을 합쳐 족히 수천의 병사가 죽어나갔을 겁니다. 그 죽음들로 인해 발생한 사기. 그 정도의 막대한 기운을 붙들어놓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 이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호닝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기다린 후에 전투를 재개하는 경우, 다시 기다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거요?"
"그것은……."
군터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장군. 그러나 호닝거 공의 말대로라면 이 상황은 결국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전투를 치르게 되면 그때는 주앙 칼 고르의 목부터 베어버릴 것이니, 전투를 길게 끌 이유가 없다."
"옛?"
"이번 전투로 적의 전력을 가늠했다. 다음 전투에서는 내가 직접 선봉으로 나서 주앙 칼 고르의 목을 베고 이 전투를 끝낼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내가 언제 흰 소리를 하던가."
"……."
군터가 강하게 말을 하니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군을 뒤로 물린다."
그럴 확률은 적다고 보지만, 적이 먼저 싸움을 걸어올 경우를 대비하여 군터는 군을 뒤로 물렸다. 사기가 넘실대는 전장으로부터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말이다. 해가 떨어지고 제국군이 진영을 뒤로 물리는데도 베이고르군은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았다. 먼저 치지 않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확고하군."
베이고르군의 생각은 뻔했다. 어떻게든 지금 그들이 선 땅 위에서 결착을 보겠다는 거다.
"저 땅은 저들에게 있어 하나의 요새와도 같군요."
모레인이 중얼거렸다.
군터는 그의 표현이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요새. 요새라. 정말 그 말이 딱 맞지 않은가. 적은 이곳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해놓았다. 제국군은 그렇게 단단히 준비를 마친 적을 상대로 싸워야만 하는 것이고.
*
이틀이 지났다.
군터는 탁자 위에 놓인 항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막사를 나섰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시각. 그는 저 멀리, 이틀 전 무수한 생명이 스러져갔던 전장을 응시했다.
"…틀렸군."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휘하 무관들을 소집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가 소집을 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름을 받은 모든 이들이 그의 막사로 몰려들었다.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한 군터는 호닝거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유일하게 무관이 아닌 신분으로 그의 막사에 와 있었다.
"호닝거."
"예 장군."
"그대의 생각이 틀렸다."
"장군. 아직 이틀이 지났을 뿐입니다. 물론 예상했던 것보다 사기가 흩어지는 것이 더디기는 하지만……."
"더딘 것이 아니다."
"예?"
"흩어지지 않고 있다. 이틀 전과 똑같아. 어제는 의심했으나 오늘은 확신했다."
단호한 말. 호닝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있을 수 없는…아니, 이해하기 힘들군요. 제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사교의 사술은 기괴하지. 그대가 알던 것과 다르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면목 없습니다."
호닝거는 군터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 땅 밑 깊숙한 곳에 묻힌 항아리를 찾아낸 것도 군터였다. 그것도 어디 대충 찍어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위치를 특정하여 찾아냈다. 그때부터 호닝거는 군터의 기감이 자신과 비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나아가 이틀을, 그 귀중한 자신이 날려버렸다는 것을.
호닝거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책할 필요 없다. 누구나 틀리고 실수할 수 있는 것이니."
무뚝뚝한 한 마디로 그를 위로한 군터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쭉 훑어보았다.
"이렇게 되었다. 예상은 빗나갔고, 적은 여전히 위험한 칼을 들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대로 싸우느냐, 아니면 군을 물려 우회하느냐 입니까?"
델라모리의 말에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모두 일장일단이 있지."
"장군께서는 이미 선택을 하신 것 같습니다만."
할렌이 말했다. 오랜 세월 군터를 따라온 그는 군터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맞다. 나는 마음을 정했다."
"허면 어서 출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군터가 군을 물릴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사실, 그의 생각이 맞았다.
"그럴 참이다. 이틀 전에 말했던 대로 내가 선봉에 서도록 하지. 놈들이 뭘 준비했든 상관 없이, 오늘 주앙 칼 고르의 목을 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