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와아아아-!
전투가 시작됐다.
먼저 함성을 지르며 움직인 것은 제국군이었다. 천부장 급 지휘관들에게는 미리 다 언질을 주었지만, 그 밑의 장교들과 병사들에게는 따로 이야기가 가지 않았기에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에는 전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응전하라!"
용맹하게 전진하는 제국군에게 맞서 베이고르군도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응전했다. 간밤의 일로 인해 피로가 쌓이기는 했지만 전장의 열기는 그들을 금방 취하게 만들었다.
"들어라! 적과 맞서 싸우되 절대 명령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항시 진형을 유지한 채 내 명령을 기다려라!"
시끄러운 수준을 넘어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전장. 그 속에서도 할렌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 구분이 갈 정도로 뚜렷하게 들렸다. 단순히 목청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의 거친 목소리에는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기세다.'
어렸을 적부터 할렌을 봐온 보리스였다. 그렇기에 그가 익숙했지만, 전장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소했다. 그것은 지금 할렌이 그의 기세를 여느 때와는 다르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적을 마주하여 내뿜는 기세만이 기세가 아니다. 타고나고, 갈고 닦은 기질을 어떻게 표출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는 저토록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대장님!"
"천부장님의 말씀을 모두 들었겠지! 어깨를 맞댄다! 창과 방패를 이어 붙여! 곧 적이 모습을 드러낼 거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지형이었다. 도무지 제대로 달릴 수가 없을 정도로 울퉁불퉁한 것은 둘째 치고, 아군 병사들 틈에 끼어 있다 보면 오르막인 지형에 시야가 꽉 막혔다. 귀는 진작에 먹먹하게 변했으며, 적이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눈과 귀가 먼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보리스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전면의 구릉 위에 아주 살짝 튀어나온 무언가를 보자마자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적이다!"
"적? 어디! 어디야?!"
보리스가 본 것은 베이고르의 깃발이었다. 깃발을 든 기수가 모습을 드러내고, 그 뒤를 이어 일단의 병력이 우르르 나타나자 그제야 다른 병사들도 적이 나타났음을 인지했다.
"적이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그들을, 노기 어린 고함이 제지했다.
"명이 있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떼지 말라 했다!"
백부장들이었다. 그들은 할렌이 내린 명을 착실히 수행했다. 바쁘게 움직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대열에서 빠져 나온 병사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정신이 없었다.
전투를 처음 겪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보리스는 열 번이 넘는 전투를 겪었다. 물론 그 중에 제대로 된 전투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으며 그나마 규모가 있었던 전투도 싱겁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일방적으로 금방 끝나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투 경험은 어느 정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리스는 이제껏 그가 겪었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방패 들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 보리스는 고지의 적이 활을 드는 것을 보자마자 방패를 들었다.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팔뚝에 묵직한 감각이 전해졌다.
와아아아-!
몸을 낮추고 방패로 머리와 목을 가렸다. 몇 번 더 방패에 화살이 박히는가 싶더니 전방에서 이전보다 더 큰 함성이 들려왔다.
'온다!'
적의 접근을 직감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리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에게 내려온 명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지금 있는 자리에서 대기한다!"
그것은 그의 친우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쩐지 든든한 느낌이라 보리스는 잔뜩 굳은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이다! 응전하라!"
백부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쩌렁쩌렁하고 살기 넘치는 목소리는 분명 할렌의 것이었다.
"응전하라아아아-!"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지자, 보리스는 십여 발의 화살이 빼곡하게 박혀 제 형태를 잃어버린 방패를 내던지고 칼을 양 손으로 쥐었다.
"보리스!"
"나를 따르라!"
뒤에서 그의 친우, 자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보리스는 무시하고 달렸다. 아마도 그의 수하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을 터였다.
와아아아아-!
적은 한데 뭉쳐서 접근해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온통 경사지고 울퉁불퉁한 지형에서는 넓게 벌려서 움직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으아아아아!"
그렇기에 보리스와 맞닥뜨린 적들은 못해도 수십은 되어 보였다. 그 정도의 수가 한데 모여있었다.
그것을 보면 잠깐이라도 몸이 굳을 법 하건만, 보리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서걱!
보리스의 칼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칼이 만들어내는 광경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허억!"
칼과 칼이 부딪치기 직전, 교묘하게 길을 바꾼 칼날이 손목을 잘랐다. 손목을 자른 칼은 연달아 목을 베었고, 곧바로 그 뒤의 적을 찔렀다.
챙강!
복부를 찌른 칼을 힘 주어 빼내려 하니 칼날이 갑옷에 걸려 뚝 하고 부러졌다. 보리스는 반 토막이 난 칼을 내던지고 바닥을 구르던 창 한 자루를 잡았다.
"대장님! 조금 천천히 가십쇼!"
"우는 소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잘 따라오지 않았느냐!"
예상했던 대로,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휘하 병사들이 어느새 보리스의 옆과 뒤를 지켰다. 그들은 경황 없는 와중에도 진형을 갖추고 적에 맞서 싸웠다. 보리스가 가운데서 버티고 그들이 보조하니 몇 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다.
"보리스! 자네는 너무 급해!"
"놈들이 다 내려오기 전에 막아선 것뿐이야!"
뒤이어 자밀 우슈무르가 그의 십인대를 이끌고 따라붙었다. 그는 또 한 명을 베어 넘긴 보리스에게 일갈했으나, 보리스는 언제나 그랬듯 유들유들하게 받아 넘겼다.
"물러서지 마라!"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제국군을 베이고르군이 공격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정작 힘에서 밀리는 것은 공격을 가한 베이고르 쪽이었다. 처음에는 맹렬히 몰려왔던 그들은 곧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그것은 일선에서 맞서 싸우는 장졸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적의 기세가 빠르게 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독려 없이도 사기를 끌어올리며 용맹하게 적을 몰아붙였다.
'이거…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군.'
혼잡한 전장을 내려다보던 델라모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혀를 찼다.
"어찌 그러십니까?"
부장의 물음에 델라모리는 턱짓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가리켰다.
"보아라. 한심하지 않으냐. 벌써부터 저 꼴이다."
팽팽하게 흘러가던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승기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해빠졌다. 막다른 곳에 몰렸으니 발악이라도 크게 할 줄 알았더니 그마저도 별볼일 없구나."
"그렇다면…병력을 뒤로 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이 정도라면 병력을 뺄 이유가 없지."
"허면 장군. 군터 장군에게 가서 말씀하시지요. 이대로 밀어붙여서 끝을 내자고 말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
"예?"
"시어문드라는 녀석이 그의 옆에 붙어 있으니, 알아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비록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 없이 회의 때 잠깐 의견을 교환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델라모리는 시어문드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
'머리가 좋고 눈치 또한 있는 녀석이다.'
자신과 같은 것을 보았던 그라면, 지금 자신이 하는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을 터였다.
*
"장군. 전세를 보아하니 이대로 전투를 끝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시어문드가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떴군."
군터가 그런 시어문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송구합니다. 허나 장군. 장군께서 보시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합니다. 그렇다면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싸움을 굳이 길게 가져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군터는 눈 아래 펼쳐진 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록 전장의 모든 곳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곳들 중 절반 정도는 현재 제국군이 우세를 굳혀가는 모양새였다. 나머지 절반 정도도 상황이 나쁘지 않으니, 이대로 간다면 시어문드의 말처럼 오늘 내로 전투를 끝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러나 군터는 시어문드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째서입니까?"
"적의 노림수가 있다. 이 흐름은 아마도 베이고르가 의도한 것일 거다."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시어문드의 물음에 대한 답은 다른 쪽에서 나왔다.
"역시…장군께서도 읽고 계셨습니까."
답을 한 것은 뒤편에 서 있던 호닝거였다. 아니, 답이라고 하기는 뭐했다. 그의 말은 시어문드가 아니라 군터에게 향한 것이었으니.
"읽고 있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호닝거가 헛웃음을 지었다.
"놀랍습니다. 장군의 기감은 제가 이제껏 본 중 최고 수준입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난 직접 겪어보기도 했지."
베이고르에는 제국에서 사교라고 부르는 온갖 종교 집단이 있다. 그들은 베이고르 왕실의 재가를 얻어 교단을 형성하고 세를 떨친다.
그들 사교의 무리는 사제 하나하나가 술사이며,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가 제국에서는 금기로 여겨지는 사술을 사용한다. 군터 역시 제국군이었던 시절 그 사술이라는 것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베이고르군이었던 시절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역시 왕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나.'
제국에서는 사술이라 부르며 금기로 삼았지만, 군터는 그 '사술'의 힘이 전장에서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늘 사교의 무리와 그들이 부리는 사술에 대해 유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몇 차례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제대로 된 사교의 무리나 사술을 보지 못했다. 설마 베이고르에서 사교가 사라졌을 리는 없고, 베이고르가 있는 힘을 쓰지 않고 있을 리도 없으니 분명 그들이 어딘가에 집결해 있을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런 그의 짐작은, 이곳에 와 전장을 보는 순간 사실로 드러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까다로울 것 같다는 것이 전부지만, 군터는 그 이상을 보았다. 그는 이 땅 아래에 희미하게 흐르는 어두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준비해놨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전장으로 삼은 것은 베이고르이니, 이 땅에 흐르는 음습한 기운 역시도 그들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겠는가.
"북을 쳐라. 물러난다."
지금. 잠잠하던 땅 밑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군터는 단호하게 퇴각을 명했다. 한창 제국군에게 승기가 기울고 있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