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우선은 정찰이다.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도 모두 들어와라."
허술하다면 허술할 수 있는 명령. 그러나 델라모리는 그가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그의 병사들이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타라냐드의 총독, 자이드라 멕시스가 직접 '타룬트'라는 이름을 붙인 이 특수한 병사들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황금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델라모리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병사 한 명당 못해도 금화 열 닢 이상은 들어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각인부터 시작하여 뛰어난 무장, 각종 특수 훈련 등.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투자는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헛된 돈 낭비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도 그들은 활약을 했고, 그 활약은 그간의 투자가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빼어났으니까.
"옛."
타룬트들이 야음을 틈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들의 장기는 직접 전투보다도 이런 식의 은밀한 임무 수행이었다. 그들은 용맹한 전사였으나, 동시에 조용한 암살자요, 첩자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 '루반다이'들과는 길이 완전히 다르다고도 볼 수 있었다.
"나 참. 아직이야? 시간 지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 새끼들 이거 막사에 처박혀서 농땡이 피우고 있는 거 아냐?"
그들은 납작 엎드린 채 땅을 기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릿하지만, 누구도 그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
밤이 깊어갔다. 베이고르군의 진지에 높이 올라간 횃불의 개수가 늘어났다. 그 즈음, 진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룬트들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보초병들에게 달려들었다.
"무, 뭐……!"
목소리를 높일 틈도 없었다. 소리를 내려던 병사의 목에 단도가 박히고, 타룬트들은 신속하게 보초병들을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쓰러진 보초병들의 옷을 벗겨 갈아입었다. 그 모두가 숨 몇 번 쉴 정도의 짧은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
"대단하군."
다음날 아침. 델라모리가 가져온 베이고르군의 배치도를 보며 군터는 나직이 감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틀을 이야기했지만, 델라모리는 하루 만에 결과를 가져왔다.
"아직 하루가 더 남았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무엇을 더 할 생각이지?"
"무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적당히 교란을 시켜볼 참입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차피 자네 말대로 이틀을 주었었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게."
"오늘 밤. 재미있는 구경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대로였다.
그날 밤. 군터는 구릉 너머의 베이고르 진영에서 붉은 빛과 함께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구분 되는 연기가 피어 올랐다.
'교란이라.'
허락을 하면서도 너무 들뜬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괜한 우려였던가.
"특수부대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군요."
그와 함께 언덕을 올랐던 시어문드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군터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특수부대라…적절한 표현이군.'
정예의 수준을 넘어선 병사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들의 쓰임새는 머릿수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루반다이. 타룬트.'
그 이전에 싸웠던 초원의 수인병들 역시 같은 대열에 놓을 수 있으리라. 비록 그들의 쓰임새는 앞서 떠올린 둘에 비해 한정적이었지만 말이다.
"돌아가지."
"그러시겠습니까?"
"불구경은 충분히 했다. 날이 밝으면 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게 되지 않겠나."
날이 밝은 후. 군터는 그의 말대로 델라모리에게서 간밤의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진지 외곽에 불을 놓았습니다. 화공이라고 하기에는 뭐한 수준이었습니다만, 잠을 깨우는 데는 충분했으리라 봅니다. 더불어, 불길이 번지는 과정에서 운 좋게도 놈들의 군량 일부를 소실시킨 것 같습니다."
"기대 이상의 성과로군."
"실로 그렇습니다."
델라모리는 겸양하지도, 으스대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가만히 서서 감탄의 목소리들을 흘려 듣고 있을 뿐.
"장군. 간밤의 화공으로 인해 적들의 피로가 쌓여있을 것입니다. 한 번 군을 움직이심이 어떠할지요."
시어문드가 말했다.
"오늘 결착을 보자는 말인가?"
"아닙니다. 결착은 조금 시일을 두고 천천히 지어도 될 것입니다. 음…대충 닷새 안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렇다면 오늘 군을 움직이라는 것은?"
"적의 피로를 좀 더 누적시키고자 함이지요."
그 말에 델라모리가 싱긋 웃었다.
"좋은 생각이군."
"장군 휘하의 병사들이 그토록 뛰어나니, 나흘 정도는 기대해도 될 거라 보았습니다만."
"나흘이 아니라 열흘이라도 충분하네. 당장 하루 이틀 정도는 반군 녀석들도 바짝 긴장을 하겠지만, 피로가 쌓이면 다시 무뎌질 수밖에 없지."
"소관의 생각 또한 장군과 같습니다. 허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겠지요."
두 사람만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잠자코 듣고만 있던 모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싸우는 시늉만 하고 물러난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소."
"적들이 우리의 의도를 눈치 채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이번에는 델라모리가 답했다.
묘한 느낌이었다. 시어문드와 델라모리.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전략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머리를 열어보면 조금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생각이 들어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 해도 상관 없네. 눈치를 채고 안 채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놈들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네."
"너무 적을 얕보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얕보는 게 아니라 정확히 보고 있는 거네. 적을 얕보는 것은 물론 절대 범해서는 안 될 금기이나, 적을 너무 높여 보는 것도 만만치 않게 어리석은 일이야."
"……."
모레인은 살짝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델라모리의 말에 뭐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어찌 그럴 것인가. 델라모리는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과를 내지 않았나.
"좋아. 해보지."
군중의 분위기는 밝고 가벼웠다. 누구도 패배 따위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승리는 당연한 것이었고, 얼마나 크게 승리를 하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마지막까지 군터의 막사에 남아있던 할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군. 다들 너무 들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 생각하나."
"예. 자신감이 있는 건 좋지만, 모레인의 말처럼 적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할렌은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숱한 전투를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이였다. 동 나이대의 어떤 지휘관보다도 경험이 풍부했고, 그런 만큼 전장에서의 감각 역시 상당히 발달했다.
전장에서의 감각이란 전투 중에만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다. 전장의 공기를 읽는 것 역시 감각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어째 영 좋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군터는 할렌의 우려를 이해했다.
"괜찮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허나 장군."
"네 말대로, 다들 들떴을지도 모른다. 방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한 번 제대로 정신 무장을……."
"그래도 상관 없다. 어차피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나니까."
"예?"
"난 적을 얕보지도, 방심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다른 녀석들이 조금 들떴다 한들, 문제는 없다."
"으음."
"시어문드의 계책은 나쁘지 않다. 델라모리의 병사들 역시 충분히 역할을 해주고 있지.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할 것이고, 나머지는 적에게 달렸을 뿐이다."
간단한 이야기다. 어차피 휘하 지휘관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건, 그들은 총대장인 군터 자신의 명령을 따른다. 그가 싸우라 하면 싸우는 것이고, 물러나라 하면 물러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방만하게 군다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군터 휘하의 장수들은 그럴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전투가 자신의 손 안에서 굴러갈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장군."
할렌이 조용해지니 이번에는 토어릭이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옵고…공자님 말입니다."
"음?"
"이제는 공자님께도 활약할 만한 자리를 한 번 만들어주심이 어떨지요."
"의외군.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그런 말을 꺼낼 줄이야."
"그간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공자님을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 어떻던가?"
"파헨델에 계실 때에 비해 놀랍도록 성숙해지셨습니다. 물론 파헨델에 계실 때도 특별히 미숙하다 할 만한 부분은 없었지만, 지금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지휘관이 되셨습니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토어릭이 군터를 알듯, 군터 역시 토어릭을 알았다. 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에 담을 사내가 아니었다.
"흠."
"장군. 울타마란 소레딜 장군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에게 어떻게든 공을 세우게 하려고 이상한 이유를 대면서 뒤로 빠지지 않았습니까. 비록 지금 공자님의 나이가 어리다 하지만, 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기회라는 녀석이 때를 맞춰서 찾아와주는 녀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
토어릭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다. 기회는 시기를 맞추어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전장에서의 기회라는 것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는 법.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군터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이었다면 얼마든지 과감해질 수 있었겠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적의 창칼 앞에 내어놓는 일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장군."
군터는 토어릭의 제안을 장고 끝에 받아들였다.
"좋아. 허면 할렌. 네가 녀석을 데리고 움직여라."
그의 말에 할렌이 씩 웃었다.
"데리고 움직인다는 말씀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자님과 공자님이 이끄시는 병사들은 제법 쓸만하니까 말입니다."
"아부는 집어치워라."
"아부라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토어릭의 말투를 흉내 내는 할렌을 못마땅하게 쳐다본 군터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네게 부담을 지우는 것 같긴 하지만, 널 믿기 때문에 녀석을 네게 보내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진지한 군터의 말에 할렌 역시 진중하게 답했다.